지난 11일 열린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언론사 법조팀장 간담회.
지난 11일 열린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언론사 법조팀장 간담회.

요즘 법조계의 화두는 ‘절차적 정의’와 ‘실체적 정의’입니다. 어려운 용어 같아 보이지만 간단히 말해 절차적 정의는 “과정상의 정의”, 실체적 정의는 “결과의 정의”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8년 전 발생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사건’을 두고 불거진 개념인데, 두 정의가 상충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정의의 충돌은 특이한 상황같지만 형사사건에서 자주 목격되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성범죄나 아동범죄 용의자를 증거나 적법절차가 부족하다고 무죄로 풀어주거나, 또 반대로 강제 자백으로 피해 증거를 찾아내 범죄를 입증하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실, 절차적 정의는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절실했던 개념입니다. 과거 검찰을 포함한 권력기관이 조작된 실체적 정의에 접근한다며 힘없는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무조건 찍어눌러 범죄를 완성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실제 범죄자들은 법망을 피해 활개를 쳤고, 이들에 매수되거나 잠식된 권력기관은 사건을 뭉개거나 제 식구 감싸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절차적 정의의 결핍이 아닌 되려 오용되는 사례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모 지상파 방송 복수물이 시청률 1위를 달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는 범죄자에 대해서만큼은 절차적 정의를 건너뛰고 통쾌하게 실체적 정의를 구현해주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모 방송 드라마 홈페이지 일부 캡처.
모 방송 드라마 홈페이지 일부 캡처.

이른바 ‘김학의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력층의 복마전(伏魔殿)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악덕 건설업주 윤중천씨로부터 호화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던 동영상CD속 인물은 누가 봐도 김 전 차관이었습니다. 동영상을 본 경찰과 검사, 언론과 전문가 그 어느 누구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동영상 속 인물은 제 식구(?)의 명예를 위해 '누구인지 확인이 불가하다'는 “불상의 남성”으로 뭉개졌습니다. 공소시효도 지나버렸습니다. 곡절 끝에 재수사가 이뤄졌지만, 김 전 차관의 해외 도피 시도가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절차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요새 김학의 사건의 논점은 이 출국 금지 과정에서 직권남용이라는 절차적 정의가 훼손됐고, 여기에 현직 지검장이 연관되어 있다는 데 집중되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절차적 정의는 중요하고, 김학의 전 차관의 해외 도피를 막는 과정에서 절차적 정의가 훼손됐다는 의혹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론 추이를 보면 본말이 전도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김학의 사건에서 이것만이 절차적 정의의 훼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차례의 부실한 수사와 뭉개기, 제 식구 감싸기라는 더 큰 절차적 정의의 훼손이 있었고, 그렇서 해서 나온 게 법원의 무혐의 처분이란 걸 조금만 상세히 들여다 보면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은 범죄가 절차적 정의에 가려 피해자가 된 느낌입니다. 지난 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언론사 법조팀장 간담회에서 “왜 절차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사건이 김학의냐”고 거듭 언급했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김학의 사건의 본질은 권력층의 부패와 부조리에 책임을 묻는 것인데, 이 부분이 온데간데없다는 겁니다. 출국 금지 과정에서 절차적 정의가 잘못됐다면 응당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김학의 사건의 실체적 정의마저 희석되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검찰 개혁의 화두가 더욱 선명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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