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 딱지를 떼기도 전인 지난 2017년 말, 나눔의 집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정신없이 현장 취재를 마친 제게 소장님은 점심 공양을 권하셨고, 그렇게 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거주하시는 생활관으로 향했습니다. 따뜻한 국수 한 사발을 먹고 계단을 내려가던 길, 1층 거실에 멍하니 앉아 계시던 한 할머니께서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또 놀러 와요.”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깊었던 목소리. 형식적인 듯 형식적이지 않은, 할머니의 초대에 저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 한 마디 속에 내재된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사계절이 세 번을 돌고 돌았습니다. 기자회견장부터 법정까지, 여러 취재 현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장에서 마주한 할머니들은 늘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갔지만, 변한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사과를 회피했고, 정부 역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적인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숫자는 늘어가, 이제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는 15명뿐입니다. 93살의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판단 받자“고 주장한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섭니다.

하지만 많은 국제법 전문가, 심지어 위안부 문제에 앞장서온 교수들까지도 ICJ 제소가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섣부른 결정이 오히려 ‘위안부’ 문제 해결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ICJ로 가는 길부터 만만치 않습니다. ICJ에 본 사안이 회부되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 합의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정부가 먼저 ‘위안부’ 문제의 제소를 언급할 경우, 일본 측에서는 ‘독도’ 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은 오랜 시간 독도 영유권 문제를 ICJ에서 심판 받자고 주장해왔지만, ‘독도는 당연히 한국 땅’이라고 여기는 우리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징용과 식민통치 불법성 여부 등 일본이 과거 한일 역사 문제를 ICJ로 끌고 올 경우 상황은 더 복잡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우여곡절 끝에 회부가 됐다고 해도 전면 승소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ICJ 추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신희석 연세대 박사 역시 “ICJ가 ‘위안부’ 제도의 불법성을 공식 인정하는 한편, 우리 법원이 일본의 주권면제를 존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며 일부 승소 가능성을 더 높게 봤습니다. 물론 일본의 불법적인 만행을 세계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주장해온 ‘주권면제 원칙’이 인정될 경우 그 동안 국내에서 나온 판결은 완전히 뒤틀리게 됩니다. 지난 달 서울중앙지법은 ‘일본이 주권면제 원칙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배상 판결을 내렸는데, ICJ가 이를 부정해버리면 우리나라가 받을 타격이 더 클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은 ‘오히려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뻔뻔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제3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협정 3조는 외교 상 경로로 분쟁을 해결하며 외교적 해결이 불가할 경우 이를 중재위원회에 넘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난 2011년 헌법재판소 역시 “정부가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둘러싼 분쟁해결절차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는 제자리이고, 정부의 ‘위헌’ 행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승소 여부조차 불투명하고 2년에서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는 ICJ 제소를 무조건적으로 밀어 붙이기보다, 정부가 먼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여러모로 더 ‘실효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신중하게 고려 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보다, 진정성 있는 정부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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