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를 봤다. 어떤 이는 미국 이민 1세대의 애환을, 또 다른 이는 한국의 할머니를 이야기한다. 내 눈에는 땅과 물, 땀이 보였다. 땅위의 사람이, 그곳이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관계없이, 교만을 버리고 자연을 경외하며 순응하게 된 이야기로 느껴졌다. 막대기를 들고 물을 찾아준다는 현지인을 무시하며 한국 사람은 똑똑하다고 자신했던 영화 속 아버지는 영화 말미 현지인의 도움 속에 물을 찾아 나선다. 도심에서 시골로 오며 농장을 이루겠다는 주인공은 고난을 만나고 이겨내고 나서야, 그 땅 위에서 살아온 이들과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이주한 주인공과 그 가족은 그곳에선 이방인일 것이다. 손자 데이빗에게 한국에서 온 할머니 또한 이방인이다. 손주들을 돌봐주러 미국에 온 할머니와 이국땅에 심어진 한국채소까지, 새로운 땅과 물, 새로운 이들과 적응하기 까지 모두가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땅과 물과 땀이 만나 농작물이 열렸고, 시련 속에서 가족은 하나가 됐다.

'미나리가 개인적으로 특별했던 건, 한 여름 논에 물을 대던 아버지가 떠올라서였다. 벼농사는 돈과 기계가 한다고 여겼고, 커서는 딱 한번 그때 논에 가 본게 전부인데, 유독 그 때 그 시간이 영화처럼 생생하다. 아버지는 은퇴 후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농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태생이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타지에 살았다. 결혼 후에는 땅을 팔아 사업을 한다고 서울에 정착했다. 딸 많은 집 외아들 이어서 농사도 예순 다섯 살에 처음으로 해 보았다. 집성촌이라서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친척이고, 논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대부분 안다. 벼농사 첫해 초보 농사꾼의 논은 티가 많이도 났다고 한다. 말라버린 벼를 보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그 이듬해부터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집과 논을 오가며 부지런히 논에 물을 댔다. 영화 미나리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판 우물에 물이 마르자 수돗물로 채소를 키웠다. 논에 물을 댔던 아버지와 영화 속 아버지가 오버랩 되면서, 일부 LH 직원이 3기 신도시 후보지에 심었다는 왕버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먼 옛날 대부분의 우리 조상은 농부였을 것이다. 농사는 인류역사를 바꾸고 문명을 진화시킨 일대 혁신이었다. 그러나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우리 아버지처럼 땅을 떠나 도시로, 혹은 미나리의 주인공처럼 낯선 땅으로 이민을 갔다.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내고, 땅을 팔아 사업을 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허허벌판 이었던 우리나라는 급성장했다. 이제는 영화 기생충에 이어 미나리까지 미국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생명이 자라던 땅에 사람이 떠나고, 도시는 콘크리트로 뒤덮이면서 땀의 가치까지 함께 사라진 건 아닌지 되뇌게 된다. 빛과 불의 세상이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클릭 몇 번만 하면, 우리의 정신은 세계 어디든지 가고 누구든지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한 끼만 못 먹어도 우리들 육신은 배고픔에 허덕인다. 곧 도래 할 AI의 시대에 사라질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냐 만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이 땅에서 시작되고, 여전히 우리는 생노병사에 시달리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만은 각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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