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전 일이다. 친할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시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소를 키웠다. 하루종일 외양간에서 큰 눈을 껌벅거리며 여물을 먹는 소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한 기억의 한자락으로 남아있다. 8살 어린 소년에 비친 소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웬지 모를 슬픔과 고단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소의 눈을 보면 무슨 말인가를 꼭 하고 싶어한다고 여겼다. 인간을 대신해 힘겨운 노동을 감내해야는 자신의 처지를 알아달라는 애처로운 호소를 하는 것만 같았다.

시골 할아버지,아저씨들에게 소는 삶의 소중한 동반자였다. 들녂에 나가 농부는 소의 몸에 쟁기를 매달아 밭을 갈고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지금처럼 경운기나 트랙터 등 농기계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소가 없이는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마을에서도 소가 없는 집은 소를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쌀이나 돈을 주기도 했다. 소는 시골 농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지만 도시로 유학간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서는 목돈 마련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소를 팔아야만 했다.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농부들이 많아 그때부터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게 됐다.

불교에서도 소는 아주 귀하고 친숙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참된 본성을 소로 지칭하기도 한다. 사찰 법당의 벽화로 만날 수 있는 심우도는 인간의 불성을 소에 비유하고,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10단계 과정을 야생 상태의 소를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해 그린 것이다. 고려시대 고승이자 정혜결사 운동으로 한국 불교 선 사상의 체계를 세운 선사로 꼽히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자신의 호를 소를 기르는 사람, 목우자라고 했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은 스스로 법명을 깨어있는 소즉 성우(惺牛)라고 지었다.

만해 스님이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불성(佛性)이 있고 그 불성을 잃어버린 소에 비유한 것으로 '심우'는 불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공주 계룡산의 천년고찰 갑사의 창건 설화에도 소가 등장한다. 16세기 말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갑사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향나무와 기와를 소가 매일 구해와 대웅전 복원 불사를 원만하게 마쳤고 스님들은 소의 공덕을 기려 갑사를 오르는 길목에 공우탑(功牛塔)’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법주사가 위치한 속리산의 이름이 신라 시대 구봉산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바뀐 것도 소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선덕왕 당시 진표 율사가 법주사를 건립하기 위해 구봉산을 찾았을 때 논밭에서 일하던 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자 농부들이 율사를 따라 출가했고 그 뒤로 구봉산을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로 속리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땅끝마을의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의 창건 설화에도 어김없이 소가 등장한다. 미황사를 창건한 신라 의조화상은 8세기 신라 경덕왕 8년 땅끝마을에서 불교 경전과 보살상, 그리고 검은 소를 실은 돌배를 발견했고 그날밤 꿈에 인도의 왕이 나타나 불상과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절을 짓는다면 국운과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고 말했다. 다음날 소는 달마산 중턱을 지나 실제로 넘어졌고 그 자리에 세운 사찰이 지금의 미황사라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지난해 8월에는 집중호우로 섬진강이 넘치면서 전남 구례지역이 물바다로 변하면서 축사에 있던 소들이 해발 530미터 고지에 자리한 사찰, 사성암으로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소들이 우리를 탈출해 3킬로미터의 아스팔트 산길을 따라 사성암까지 간 것은 수해를 피해 부처님 품으로 찾아간 셈이어서 소와 불교의 깊은 인연을 새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여겨진다.

불기 2565년 신축년, 흰 소의 해가 밝았다. 그 어느해보다도 짙은 어둠과 우울의 그림자가 자욱하게 드러워진 새해 첫날, 몸도 마음도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해에는 소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적 삶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를,그리고 느릿느릿해도 꾸준한 황소 걸음의 저력이 발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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