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사의 유창한 한국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기자회견을 합니다.
참석하실 분들은 진호규 중국 대사관 공보관에게 문자로 신청하면 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떠들썩한 시기, 중국대사가 관련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에 얼른 문자함을 열었습니다. 안내받은 공보관에게 문자를 하려다 지난해 2월 이미 주고받은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문득 작년 이 시기 국회에서 열린 한중 수교 40주년 기념 전시회 취재를 갔다가 한국어에 능숙한 중국대사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단 한 번 인사한 사이였지만, 문자를 보자마자 1년 전 일이 바로 떠오른 건 당시 한국어로 오간 소통에서 느낀 왠지 모를 친근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싱하이밍 신임 중국대사는 기자회견에서 발음이 정확하진 않지만, 높은 수준의 문장 구사력을 보이며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어로 채웠습니다. 특히 한중 관계에 대해선 ‘이웃’ ‘협력’ ‘소통’과 같은 단어를 반복하고, 한국 정부와 각계 인사들이 “눈 속에 있는 사람에게 땔감을 보내주듯” 중국에 성원을 보내줬다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당초 언론사 10여 곳만을 대상으로 했던 기자회견 규모를 키우고, 대사가 통역 없이 직접 한국어로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모습은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공식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외교적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근감 속 드러난 가시

겉으로 드러낸 유화적 모습과 달리, 싱 대사의 브리핑 곳곳에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느껴졌습니다. 우선 전체 내용 중 절반 이상을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을 설명하고 치장하는데 할애했습니다. “중국의 강력한 전염병 차단 조치로 다른 나라의 전염병 상황이 비교적 가벼운 상태이고 해외 확진 환자 수도 전체 확진 환자 수의 1%도 안된다”라는, 실제 방역 비상에 걸린 타 국가들은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말들도 서슴없었습니다.

싱 대사는 중국 후베이성 방문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한 우리 정부의 조치에 대해선 “제가 많이 평가하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곧바로 ‘신종 코로나 사태로 중국과의 교역을 제한하는 건 불필요하다’는 WHO의 권고를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중국의 불편한 기색을 명확히 드러낸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내린 조치에 ‘평가’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한 지 의문이 든 것입니다. 마치 “긴 말 안 할 테니, 알아서 잘하라”는 말로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같은 말, 다른 해석

우리 정부는 중국인 입국 제한 조치에 연일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미 중국 전역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만큼 입국 금지 지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지만, 청와대는 “공식 검토한 적 없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신임 주한 중국대사의 기자회견에도 현재 상황을 잘 극복하기 위해 중국과 긴밀히 소통하겠다는 원론적 답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오히려 ‘평가’라는 단어를 두둔하려는 듯, 외교부 당국자가 나서 “싱 대사가 한국어를 5년 동안 쓰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단이 필요할 때

물론, 지난 3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이 최대 교역국임을 강조한 점에서 정부가 우려하는 지점이 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방역을 위한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입국 금지 지역을 확대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이번 사태 초동 대응에서의 실수를 인정했고, 해외 여러 국가에서도 중국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를 확대하거나 검토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는 ‘중국 눈치 본다’는 국민적 비판을 키울 뿐입니다. ‘이웃’ ‘친구’와 같은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포장한 중국 측 불만 표시에 정부가 발맞추고 있는 사이, 국민은 점점 더 신뢰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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