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영등포 노예’다. 결혼 3년차, 내 일신은 아내에게 맡겨진 상태다. 평일 저녁과 주말 등 스케줄부터 옷차림새까지, 보고와 결재를 통한 ‘빅 와이프’의 권력 하에 있다. 친가에선 왜 쩔쩔매고 사느냐고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게 사는 남편은 한둘이 아니다. 경제권을 빼앗긴 유부남들이 마치 서로가 찬 족쇄를 자랑하는 수인들처럼, 누가 더 적은 용돈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이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갑자기 문득 내 처지가 새삼스러웠던 것은, 국회 ‘공수처법’ 통과 국면에서 끝까지 당론이 아닌 소신을 지킨 남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때문이다. 금 의원은 지난해 국회 본회의의 대미를 장식한 공수처법 표결에서 유일한 이탈표를 던졌다. 이후 ‘당론에 반대했다’는 여당 지지자들의 반발이 잇따르자 문자메시지를 통해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날씨가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민주란 뭔지를 되물은 것이다. 

  대가는 쓰다. 지도부는 뭔가 조치를 할 듯 하다. 사석에서 만난 한 의원은 금 의원을 비롯해 ‘조국 사태’ 당시 자성론을 내세운 의원들을 가리켜 “개인의 철학적 관점”이라고 평가했다. “권력에 관한 문제를 철학으로 풀면 안 된다”고 나무랬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정치는 우리 사회 ‘중요한 가치’의 분배를 다루고, 각자는 이해관계가 대립된다. 그래서 정치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의 요체가 ‘한 사람당 한 표’라면, 민주주의의 권력은 ‘다수의 표’에서 나온다. 금 의원은 ‘당인’이고 당론을 따르는 것이 맞다. 당론을 따르지 않으려면 당론 결정 기구에서 충분한 의사를 표하고 적극적으로 설득하거나 받아들이는 게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론’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저버린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4+1협의체 안에서도 지금까지 없었던 ‘공수처’의 등장에 우려를 나타내는 의원은 꽤 있었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찬성으로 돌아섰고 대세 속에 자신의 의지를 묻었다. 어쩌면,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이후부터의 정치가 그런 식이었다고 본다. '다수'라는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애썼고 국민들을 향한 설득보다 조국 사태의 반동에 의지해 입법을 밀어붙였다. 주말마다 국회대로를 타고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이어진 시위 현장에서는 “검찰 개혁”이라는 구호 뒤엔 늘 “조국 수호”라는 또 다른 외침이 따라 붙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공수처법’에 앞서 통과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희망을 건다. 지금껏 주어진 거대양당 체제를 떠나, 피선거권자들 역시 조금 더 많은 선택지를 원하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동형 적용 의석은 물론 30석에 불과하지만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본다. 교통과 인터넷의 발달로 지역, 연고에 관한 개념은 점점 약해지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이해를 매개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각 분야 전문가들과 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비례대표가 더 많이 필요한 이유다. 앞으로 지역의 일꾼과 지지하는 정당·정책을 구분하면서, 공정한 비례대표 선출로 소수자의 권리를 공론에 붙일 수 있는 형태의 선거제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이 된다면, 지금껏 그늘에 가렸던 다양한 색들이 조금 더 선연하게 불거져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담론에 소신을 파묻을 필요 없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꾸려 사회 인식 저변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현대 정치의 핵심에는 모든 시민이 (작지만 지극히 중요한) 국가의 통치자라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사상이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작지만 지극히 중요한 ‘나’의 통치자이자, 가정의 소수자로서 소신 있는 1표를 행사하고 싶다. 자유롭게 입고 먹고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금태섭 의원처럼 소신표를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가 권력을 원하고 가정의 평화와 화합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새해 소원을 비는 자리, 아내는 “내년에는 더 내 말을 잘 들으면 좋겠어”라고 속삭였다. 나는 아내를 3000만큼 사랑한다. 하지만 올해는 소수의 권리를 더 많이 보호하기 위한 연동형 비례제가 적용된 30만큼의 자유가 허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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