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1930년대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서부영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영화였습니다. 누가 좋고 나쁜 지를 이분법적으로 드러내고 어정쩡하며 알 수 없는 입장을 취한 이가 이상하게 그려지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세상은 선과 악, 중립으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선과 악의 대립 속에 중간 지대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선과 악 양쪽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중립 입장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기 마련입니다. 중립이란 입장은 유지되기 힘든 개념인 셈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 정신을 갖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우리민족끼리'를 노골적으로 강조하면서 누구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강요한 것입니다.

일괄타결을 주장하는 미국과 단계적 보상을 고집하는 북한 간의 이견 차로 북한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우리 측의 중재안인 '조기수확론'이 트럼프 대통령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자 김정은 위원장이 던진 짜증으로 보여집니다. 동시에 한미갈등과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노림수이기도 합니다.

애초 중재자 역할을 자청했던 문 대통령의 판단 착오가 불러온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리아 패싱을 우려하던 때에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우며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란 성과를 거뒀고 중재자 선언이후 미국과 북한을 협상장에 앉히는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신뢰를 동시에 받으면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구축을 이룬다는 구상은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일부 대북제재 해제가 비핵화의 완성으로 이끄는 수단이 아닌 핵무장 상태를 지속시켜주는 생명줄로서 판단했기에 모 아니면 도인 '빅딜'을 고집하는 걸로 사료됩니다. 현재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북한의 자금줄 차단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미국이 중국을 의식해 북한에 핵무기를 다소 남겨두는 전략을 취할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을 설득해달라고 문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65시간에 걸친 장거리 열차행을 택할 만큼 하노이 회담에 큰 기대를 걸었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지금의 교착 상태는 크나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고지도자로서 체면과 위신이 손상된 상태입니다. 하노이 결렬 직전까지 순조로운 결과를 낙관했던 청와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전에 미측으로부터 회담에 임하는 전략은 물론 분위기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미국이 한국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로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하노이 회담의 데자뷔입니다. 실무회담이 잘 진행됐다는 청와대의 설명과 달리 사실상 '노 딜'로 끝났습니다. 청와대가 제안한 굿 이너프 딜에 대해 미국은 용인해 줄 듯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한마디로 거부됐습니다. 오로지 4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사전 조율이 충분치 않은 한미정상회담을 서둘렀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결국 미국과 북한 모두로부터 촉진자나 중재자가 될 수 없음을 통보받은 셈입니다.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과의 협력이 우선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아직 휴전 중입니다. 사회주의와 계획경제이면서 김씨 독재국가인 북한은 함께 걸어가기도 합칠 수도 없는 조건을 가졌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끼리'라는 감수성만으로 감싸기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북핵문제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 어느 편에 설 지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북한 핵 미사일이 우리에겐 위협이 되지 않을까요. 중재자와 촉진자는 본인에게 직면한 문제가 아닌 강건너 불구경 하듯 제3자의 입장이란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또다른 변신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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