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연 : 충남 서산 서광사 주지 도신 스님

● 진 행 : 이병철 방송부장

● 연 출 : 김종광 기자

● 코 너 명 : 이슈

● 방 송 :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방송시간 : 2022년 1월 18일(화)

[이병철] 네, 노래하는 스님으로 잘 알려져 계시죠. 한편으로는 서정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이시기도 합니다. 충남 서산 서광사 주지이신 도신 스님이 제주에 인연차 오셨기에 제주BBS에서 모셨습니다. 스님은 또 제주 출신인 중광 스님과 인연도 깊으신데요. 그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도신 스님] 네, 안녕하십니까.

[이병철] 우선 저희 BBS 불교방송에 찾아주신 데에 감사드리고요. 제주 청취자 분들에게 인사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도신 스님] 반갑습니다. 우리 제주 불교방송을 사랑해주시는 청취자 여러분 너무 반갑고요. 이렇게 제주도에 와서 방송을 통해 인사하게 되어서 좋습니다. 금년 22년도 여러분께서 바라시는 대로 뜻들이 이루어지시고 제주 불교방송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후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병철] 감사합니다. 노래하시는 스님으로 유명하신데, 포교를 노래로 하고 계시는데요. 노래를 통한 대중 포교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도신 스님] 저는 어린 시절에 8살 때 절에 입산을 했는데요. 부모에 대한 그리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아파하는 중생이 꼭 내 어머니, 형제만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들이 다 아파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노래를 통한 포교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우연히 중광 스님을 수덕사 일주문 쪽, 행사가 있을 때 스님이 오셨다가 제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시고 노래로서 포교하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저를 데리고 올라가셨어요. 스님이 서울 종로구 충신동의 감로암이라는 곳에 거주하고 계셨거든요. 스님을 따라 감로암으로 갔죠.

[이병철] 그러면 그 중광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말해 주시죠.

[도신 스님] 그래서 저는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거기서 음악 학원을 다니고 노래를 배웠죠. 사랑과 평화의 밴드 주자였던 이남이 씨라고요. 그 선생님도 만났고, 그런 인연으로 신중현 선생님도 만났고요. 저와 중광 스님 유일한 당시 제자가 이남이 씨 딱 두 사람이었죠. 그런 인연으로 스님을 모시고 오래 살았죠. 한 15년 가까이 살았는데 스님이 그림 그리실 때 특히 옆에서 수발을 많이 들었죠. 이남이 씨하고.

[이병철] 수발이라면 어떤 수발이었나요?

[도신 스님] 물 같은 거 떠다드리고, 스님이 힘이 빠지시면 직인 같은 걸 옆에서 도장을 찍어서 드리면 스님이 누르셨죠. 많이 했죠. 술 심부름도 많이 하고.

[이병철] 스님께서 마지막 작품을 하실 때쯤 옆에서 지켜보셨을 것 같은데요.

[도신 스님] 그때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스님께서 감로암에 어머니를 모셨던 혜련 스님이라는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스님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때부터 감로암을 떠나서 경기도 이천 내 벙어리절간이라고, 하나 지어놓고 사시다가 나중에는 백담사로 재입산하셨어요. 큰스님 밑으로. 거기서 다시 병마를 얻으셔서 내려오셔서 열반하셨는데, 그때는 제가 스님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병철]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셨겠네요.

[도신 스님] 많이 남죠.

[이병철] 그러면 스님께서 중광 스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다고 말하셨습니다. 그 전환점이 무엇인가요?

[도신 스님] 저는 제 인생 자체가 굉장히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처한 환경적인 것들, 형제들 간의 이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같은 것들. 근데 그렇게 유일하게 그런 부분들을 걷어내 주신 분이 스님이셨던 거죠. 스님께서는 사찰에 주로 요구하는 엄한 교육보다는 인간 본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 그러면서 사실 받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옆에서. 제가 스님을 모시고 살 때 옆에서 일일이 다 보여주신 어른이라서 마음이 열렸고, 이 세상을 닫아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 나보다도 무수히 아픈 중생들이 있을 텐데 그 중생들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들을 포교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병철]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원효대사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찌보면 그것과도 약간 연관이 되는 것 같은데요.

[도신 스님] 그렇습니다. 사실은 중광 스님의 시 중에 ‘나는 걸레’ 라는 게 있거든요. 스님은 저잣거리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곡차도 드시고 난설난행을 하신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꼭 들어야 할 말씀, 깨달아야 할 내용들이 굉장히 많으셨죠. 그러니까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가 되는 가운데에서 본인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감동을 받은 분들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이병철] 중광 스님 하면 곡차 얘기도 하셨지만 그런 기행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워낙 예술 쪽으로 뛰어나시다 보니까 한국의 피카소라는 닉네임도 얻으셨죠. 그렇기에 이런 저평가된 것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 있으실 텐데요.

[도신 스님] 이제 저희 불교 쪽 입장도 저는 이해하죠. 불교는 어쨌든 조직 세계 안에 있는 거고 조직 세계 안에서는 지켜져야 하는 그런 게 있거든요. 스님께서는 예술을 하시다 보니까 파행적으로, 어긋나 있는 부분들이 좀 많이 있으셨죠. 하지만 지금 폭넓게 생각한다면 어른 하나의 예술인으로서 좀 더 가치 있는, 지금 솔직히 밖에서 가치 있는 예술이나 문화를 사들여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체 내에서 본인이 훌륭하게 만드신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불교 쪽에서 당시에 조금만 더 활로를 열어드렸다면 그렇게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도 제대로 평가를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 불교라면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불교에는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스님이 치탈도첩도 당하시고 멸빈당하셨잖아요? 그런 아픔이 있기도 하고요.

[이병철] 스님의 재평가를 위해 제주도에서 중광 미술관을 건립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중광 스님과 인연이 깊으셨던 만큼 중광 미술관 건립, 빛을 발하기 위해 여러 부분들, 작품 기부 같은 것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도신 스님] 아마 스님 작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사실 중광 스님 미술관이 제주도에 빨리 만들어졌어야 하거든요. 지금이라도 만들어진다면, 저부터도 실천하겠지만 가지고 계신 분들이 기부하시는 형태로 미술관이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병철] 앞으로 미술관에 작품들을 얼마나 기증받을 수 있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여지는데요. 마지막으로 제주 청취자 여러분에게 중광 스님 미술관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도신 스님] 제주가 낳은 자유인 중 한 분이셨거든요. 무위자재한 분이셨고 본인이 스님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본인이 예술인이라는 것보다도 본인은 스스로 항상 자유를 말씀하셨던 그런 어른인데, 아마 중광 스님 미술관이 건립되는 것은 제주도에 정말 큰 자유가 생기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중광 스님 미술관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를, 응원해주시기를, 또 후원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병철] 중광 스님의 미술관이 제주도에 건립된다는 것은 미술계에 큰 획을 긋는 그런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중광 스님과 인연이 깊었고 노래하는 스님으로 잘 알려지신 도신 스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오늘 출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도신 스님]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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