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시절 모습이 담긴 부산 무형문화재...지켜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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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피란수도 시절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주민들이 발굴하고 재현한 부산의 무형문화재 네 가지를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어디부터 이야기를 이어갈까요?

-지난 시간에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다른 피란민 정착촌과 달리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이를 마침내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소개드렸지요. 1952년부터 이 아미동을 중심으로 시작된 우리 풍물가락과 전통문화가 마침내 부산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는데 그것도 무려 네가지, 게다가 대성사라는 작은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되고 전개된 것을 소개드렸습니다. 지난 시간 방송을 마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단편적인 소개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습니까?

-대성사를 중심으로 발굴 등록된 무형문화재들을 살펴보면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일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런 연희와 같은 전통놀이를 통한 사람들과의 결속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성사를 창건하고 지역의 무형문화재를 통해서 지역민들과의 유대를 결속하면서 나아가 이를 전승하기 위해 노력하신 그 어른, 효담 김한순스님께서 그동안 노력하셨던 일들에 대한 지순한 마음을 청취자 분들에게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전쟁 피란시기 아미동지역 피란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전통민속놀이가 이어져 왔는데요. 이 놀이들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면서 이후 대성사를 중심으로 네가지 무형문화재가 등록되기까지의 숨은 이야기들도 궁금합니다?

-먼저 지난시간에 효담 김한순 스님이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출신이라 소개를 드렸는데 가족분들과 연락을 하다보니 양양과 강릉 사이의 명주군 신왕리, 오대산국립공원 동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답니다. 아무튼 스님이 10대 후반경 남원 실상사 등지에서 공부하시다가 22살 무렵인 1956년에 부산으로 이주해 오시면서 당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정착하셨답니다. 이 때 스님의 아미동 생활은 아마 비승비속으로 지내셨던 것같습니다.

당시 아미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있다보니 정초가 되면 자연스레 풍물을 치면서 다른 마을로 걸립을 다니는 일이 생계에 보탬이 되었답니다. 이런 과정에 효담스님도 젊은 혈기에 자연스레 아미동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아미농악패를 형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고향이 강릉 바로 위인 양양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강릉지역 일대에 유명했던 단오절 행사 때 사람들이 풍물을 노는 것이 눈과 귀에 익혀져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시간에 소개드렸던대로 초기 유삼룡 어르신이 대신동에서 고분도리 걸립의 상쇠로 진두지휘를 하시다가 1963년경 상쇠를 아미동 출신 이명철 선생에게 넘겼는데 이 시기에 효담스님이 아미동에 대성사를 창건하시게 됩니다. 비록 좁은 공간입니다만 절 마당이 있으니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풍물을 연습하거나 행사를 준비하는데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던 거지요. 이런 과정에 1980년 부산농악, 당시는 아미농악이라 했습니다. 아미농악이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등록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아미농악이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는 과정에 숨은 일화가 있답니다.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1970년대 후반기에는 진보성향의 대학생들이 유신반대를 위한 데모와 집회를 끊임없이 진행하던 시기입니다. 이 때 학생들이 교내 집회를 할 때 농악과 같은 풍물놀이를 집회 현장에서 흥을 돋구거나 신명을 내는데 많이 응용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연스레 진보적인 학생들이 대성사 효담스님과 아미풍물패에 와서 배우기도 하고 때로 수배 중에는 이곳에 숨어들기도 했답니다. 이런 과정에 이런 훌륭한 풍물을 문화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들이 모여지고 똑똑한 학생들이 모여서 교수님들과 상의하면서 문화재 등록 절차를 밟아서 결국 1980년 2월에 부산시무형문화재 제 6호로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이때 탄생한 아미농악, 지금은 부산농악입니다만 지신밟기 형태의 걸립농악입니다. 가난한 지역 사람들이 정초에 각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비손하는 내용이지요.

데모하던 학생들이 노력해서 등록한 무형문화재네요. 표현이 좀 어색합니다만 과정이 그럴듯합니다. 이후 만들어진 세 가지의 무향문화재는 어떻게 만들어 졌죠 소장님?

-이 아미농악이 부산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자신을 얻은 효담스님은 이후 서구 지역 무형문화재 발굴과 재연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 때 뒤를 이어 발굴한 것이 1987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7호로 등록된 다대포후리소리입니다.

후리소리는 주로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에서 후릿그물질을 할 때 노동의 고단함을 소리로 달래는 어촌 노동요인데 이 후릿그물질이 대부분 조선시대 수군진이 있던 장소에서 많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산의 경우 이 다대포 외 수영구의 좌수영 어방놀이도 비슷한 부류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2001년 10월에 구덕망께 터다지기를 부산시 무형문화재 11호로 등록했는데 이 역시 노동요에 해당합니다.

이후 스님은 아미농악 풍물패의 원격인 고분도리걸립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시다 지난 2006년 열반하셨는데 이를 내자이신 김귀엽 보살님과 자제분들이 뒤를 이어 노력한 끝에 2011년 3월에 부산시 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부산농악은 대사가 별로 없는 판굿형이라면 고분도리걸립은 정초에 각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비손하는 안택 축원과 액막이형 주술 풍물굿이 일품인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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