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마샬이 지은 책 ‘지리의 힘’이 대형서점 가판대에 다시 등장했다. 연예인들이 책을 소개하는 케이블 채널 방영 후 역주행을 하더니 정치사회 분야 1위까지 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방 책장 한 구석에 고이 모셔진 '지리의 힘'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368쪽 ‘펴낸일’에 2017년 5월 25일 1판 11쇄라고 적혀있다. 누렇게 색 바랜 페이지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니 한 권을 독파했던 3년 전 그 시절이 떠오른다.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던 격변의 당시 ‘지리의 힘’에 담긴 여러 대목에서 뒷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하면 “지정학적 위치가 개인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 책 서문의 제목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지리에서 시작되었다!’이다.

  돌이켜보면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역사도 ‘지리’에서 시작됐고 ‘지리’에 좌우돼온 듯하다. 경북 선산(지금은 구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80년대 말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부터 ‘TK 출신’이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용어에 갇혀 살았다. 본적 또는 고향의 부가적 의미가 개인의 삶을 옥죈다는 것은 기자를 직업으로 갖게 된 뒤 더 크게 다가왔다. 방송사 지방국 근무 시절 도심 외곽에 살다가 아이들 공부를 위해 학군이 나은 아파트촌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흘러 서울 본사 발령이 나면서 주말부부를 몇 년 하다가 소형 평수의 낡은 아파트를 은행 빚 덕택에 지금껏 살고 있다. 그렇게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반백년을 보냈다. 그 속에서 지리의 힘은 늘 나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힘’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 학부모와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선택’의 여지를 별로 갖지 않는 탄생과 성장, 인사 이동의 운명적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초라할 수도, 어쩌면 남부러울 수 있는 곳에서 앞으로의 인생을 기약하고 있다.

  팀 마샬의 ‘지리의 힘’ 한국어 초판이 발행된지 만 4년이 다 된 지금 대한민국은 ‘부동산의 힘’이 세상을 옳아맸다.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책은 그래서 ‘부동산의 힘’이란 제목을 덧씌워도 됨직하다. ‘지리’라는 렌즈를 통해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부동산 문제를 들여다보면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지리는 언제나 우리를 가두었다. 그 운명은 한 국가를 규정하거나 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운명일 수도 있다...(중략)...마찬가지로 유럽은 거대한 교역지대가 되겠다고 스스로 의식적으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다만 길이가 길고 적절하게 연결된 하천들의 연계가 이를 가능케했을 뿐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결과는 천년의 세월에 걸친 팽창이었다(P.362~363)”

  ‘지리의 힘’을 읽었던 그 해 봄 문재인 대통령은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해 감동을 줬다. 하지만 3년의 시간이 흘러 이 말은 대통령 취임사 중에 유일하게 지켜진 부분이란 냉소 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취임 후 23번의 부동산 대책에도 ‘강남 아파트값’을 잡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팀 마샬의 책 ‘지리의 힘’이 안겨준 메시지를 대입하면 서울의 강남은 러시아가 목을 매는 ‘크림 반도’일 수도, 중국이 집착하는 ‘극동 연해주 바다’일 수도 있다. 인체로 따지면 너무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심장부인 그 곳을 ‘정복’이란 잣대로 마구 휘저어 버리면서 지리적 운명을 거스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때릴수록 튀어오르는 강남 집값은 어쩌면 '지리의 복수 혹은 부동산의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터를 잡고 사는 이들 상당수가 지정학적 선택의 여지를 갖지 못했음에도 마치 강대국의 경쟁자 다루듯 힘으로 대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살기 좋다는 강남 입성을 일찌감치 포기한 내게 ‘부동산의 복수’는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경제산업부 이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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