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중심으로 부산의 무형문화재 네 가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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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최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여러 차례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들로 이어지는지요?

-지난 시간에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정착한 피란민들이 살아온 과정에 대해 소개를 드렸는데 오늘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다른 지역과 달리 희망을 일구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란민들이 모여 희망을 일구며 살아온 이야기라면 무언가 특별함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이야기들인가요?

-제가 질문부터 하나드리겠습니다.‘부산 농악’,‘다대포 후리소리’,‘구덕 망깨터다지기’,‘고분도리걸립’이 네가지가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미동 대성사 경내(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산 농악’,‘다대포 후리소리’,‘구덕 망깨터다지기’,‘고분도리걸립’이 네가지 모두 부산의 무형문화재들 아닌가요?

-맞습니다. 오늘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중심으로 일구어진 부산의 네가지 무형문화재 발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980년 부산농악(아미농악)이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이후 7호 다대포후리소리,   제11호 구덕망께터다지기, 제18호 고분도리걸립 등을 발굴하고 이들은 모두 부산시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데 아미동 대성사를 창건하신 고 효담 김한순 스님의 평생의 노력이 있었답니다.

● 그래서 피란민들이 모여 희망을 일구며 살아온 이야기라는 표현을 하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뿐 아니라 피란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마을들의 특징이 있다면 60년대 이후 주변 지역이 공업 입지로 변하면서 일자리가 생겨나니까 농어촌지역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 무일푼에 가까운 상황에서 오신 분들이지요. 이 분들이 마을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느 정도 삶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마을의 개발 시기를 놓쳐 지금까지의 삶을 이어져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주거가 형성되어 있다보니 개발 이익이 나지 않으니 개발을 포기해서 지금까지 그 삶을 이어져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외 산비탈 경사가 너무 심하거니 도로 등의 여건이 맞지 않아 개발을 포기한 경우도 있지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하루하루 벌이로 생활은 이어져 오지만 마을의 변화는 거의 정체 상태, 혹 변화가 있다면 도로변에 접한 가옥들의 경우 가게라도 낼 수 있으니 벌어서 혹은 빚을 내서라도 2~3층 양옥을 올려서 나름 자리를 잡기도 하지만 뒷골목에 자리한 분들의 삶은 겨우 비바람을 막고 사는 정도를 유지해 온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경우를 보면 마을 아래에 자갈치 시장이나 국제시장 등이 있지만 그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장사하는 정도 아니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막노동판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던 것인데 이런 가운데 여성들의 경우 1960년대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자수를 놓아 생계유지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요.

삶이 이러다보니 대부분 피란지 마을 대부분이 남자들이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집안 싸움이 그칠 날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아미동에는 전국에서 모인 피란민들이다 보니 나름 우리 가락을, 즉 장구나 꽹고리, 북 등을 치는 등 전통 풍물악기를 다루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자연스레 명절, 특히 정월대보름날 시기 등에 함께 모여 풍물을 울리면서 각자 기량을 발휘하게 되고 또한 서로 모여 연습을 통해 그 기량들이 나날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에 아미동에서 그리멀지 않은 서대신동 고분도리 마을에서는 1860년경부터 전승되어 온 시약산 당산의 고분도리 걸립이 있었는데 일제 후반기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대가 끊기듯 했는데 해방 후 유삼룡이라는 어른이 이를 재현하고 계셨답니다. 그래서 아미동 사람들 가운데 우리 풍물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이 유삼룡 어르신 밑으로 모이게 되었답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데 힘이 들었던 피란민들로서는 이미 현지 분으로서 조직을 가지고 걸립패를 운영하는 어른을 만나니 풍물 만으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트인거지요. 그래서 1952년부터 유삼룡 어르신을 중심으로 한 풍물패가 결성되었답니다. 이 때 전북 무주 출신 이명철, 경주 출신 정윤화, 부산 범내골 출신 엄정섭, 진주 출신 조성현, 김천 출신 최상택, 정상열, 광양 출신 김병기, 백종근 등이 초기 고분도리 걸립패들이신데 다들, 북이나 장구, 꽹과리, 징 등 개별 주특기가 있어서 한번씩 풍물판을 벌이면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합니다. 

풍물을 치면서 피란살이의 고달픔을 해소하는 계기도 되었겠습니다.

-네,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의 기억으로 이들 풍물이 정말 신명났답니다. 이 유삼룡 어르신이 고분도리 걸립의 상쇠를 맡아서 10년 약간 넘도록 진두지휘를 하셨는데 1963년경 그러니까 1898년생이신 이 어르신 연세가 일흔이 넘길 즈음에 더 이상 상쇠를 맡기에 힘이 버거우셨던 거지요. 그래서 상쇠를 1905년생이신 이명철 선생이 이어 받았답니다. 마침 이 분 댁이 아미동이다 보니 자연스레 이 걸립패가 아미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풍물, 즉 아미농악을 이끌게 됩니다. 이 아미농악을 이미 195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제가 볼 때 시작은 고분도리 걸립을 시작하던 시기에 맞추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런 가운데 강원도 양양이 고향인 김한순 선생이 1956년 부산으로 이주해 오면서 아미농악단에 입단을 합니다. 입단 후 효담 김한순 스님이 1963년에 현 아미동 대성사를 창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73년 이명철 상쇠 어르신이 별세하시면서 효담스님이 상쇠를 이어받으시면서 자연히 아미동 대성사를 중심으로 아미농악이 발전하게 됩니다. 

아미동 대성사 경내에서 바라본 서구와 중구 시가지 모습(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아미동 대성사를 창건하신 효담 김한순 스님은 원래 스님으로 아미농악에 들어가신 건가요?

-효담스님은 1936년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부친의 독립운동 자금 제공 관련 사정으로 어릴 때 강원도를 떠나 지리산 자락 남원의 실상사로 출가하여 불가에 입문했다 합니다. 이후 구례의 화엄사를 비롯한 여러 곳을 거치며 운수납자 생활을 하다가, 1956년 아미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 아미농악 패들과 자연스레 어울리셨는데 1963년 아미산 자락에 대성사를 창건하시면서 자연스레 아미동 비석마을과 관련한 일에 발벗고 나서시게 되고 이후 이명철 상쇠를 도우면서 절의 일보다 농악 일에 더 매진을 했다합니다.

효담스님의 형님 되시는 분도 강원도의 지경다지기 소리의 예능을 보유하신 분으로 집안이 풍물을 잘하는 내력을 지녔던 것이 자연스레 아미농악과 접목이 된 것같습니다. 

청취자 분들께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가시면 대성사를 한번 들르셔서 아미동을 중심으로 부산의 무형문화재 4개를 발굴하면서 아미동 피란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준 아미동 대성사 창건주이자  '영원한 상쇠' 효담 김한순(1936~2006) 스님을 꼭 한번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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