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박경수의 아침저널 - 집중인터뷰]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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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박경수의 아침저널 - 집중 인터뷰] 

■ 대담 :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 방송 :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07:20~09:00)
■ 진행 : 박경수 BBS 보도국장

▷박경수: 민주당 강창일 전 의원 전화 연결해서 얘기 나누겠습니다. 강창일 전 의원은 제주에서 4선을 지낸 민주당 중진의원이시고요 역사학자이시기도 하고 또 국회 불자 의원들의 모임입니다. 정각회 회장도 지내셨습니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강창일: 네, 안녕하세요. 강창일입니다. 

▷박경수: 의원님, 오랜만에 뵙는데 근황이 무엇보다 궁금합니다. 최근에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으셨더라고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강창일: 제가 역사학을 했고요. 또 그분이 통합 화합 좌우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독립된 통일 국가를 이룰까 하는 데 온 힘을 받았던 아주 혜안 있는 정치가였습니다. 1947년 7월 암살을 당하셨어요 그분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됐었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 분인데 1947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통령감 제1순위가 몽양 여운형 선생이었어요. 김구 선생도 아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아니고요. 그런 분이 비운에 돌아가셨어요 그다음에 제대로 복권이 안 됐었어요. 그런데 우리 이부영 전 의원님께서 15년에 걸쳐서야 그분을 완전히 복권시켜서 독립운동가로서 우뚝 서 있죠. 이부영 선생께서 저 보고 이거 좀 맡아서 너무 오래했고 나이도 있고 해서 맡아서 새롭게 해달라 이렇게 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박경수: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전 이사장은 이부영 전 의원이시고 그걸 이어받으신 거군요. 

▶강창일: 네, 그렇습니다. 

▷박경수: 그런데 여운형 선생이 해방 이후에 대중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았나요? 

▶강창일: 네, 그분 돌아가신 날에 7월에는 서울에 모여서 애도를 표했다고 그래요 그때 동영상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체육 대한민국 우리 대한체육회를 만드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나라 체육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이번에 이기흥 체육회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몽양 선생님께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1대 초대 조선 체육회장을 지내셨다고 업적이 대단하신 분인데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박경수: 이제 의원님이 이사장을 맡으셨으니까 몽양 선생님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이 더 많이 알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강창일: 네, 그렇게 하고 싶어요. 

▷박경수: 의원님이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으셨으니까 이사장님으로 불러야겠습니다. 이사장님, 오늘이 故박원순 서울시장 발인일입니다. 조문을 다녀오셨다는 기사도 제가 봤고요. 이사장님은 인연이 깊으셨다고 제가 들었는데 

▶강창일: 정치권에서 지금 보면 아마 제가 제일 깊지 않을까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 32년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참 그분의 지금까지 해 오신 일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역사학자인데 지금 활발히 역사를 바로세우는 데 앞장선 역사 문제연구소가 있었어요. 1990년대인데 변호사해서... 2억 정도 있어서 자기 집도 없으면서 그걸 사가에 양옥을 역사문제연구소에 생각서 기증을 했었어요. 수인이 그게 한 30억 정도 된다 그래요 역사문제연구소 제기동에 5층짜리 빌딩을 마련해서 거기에서 젊은 역사학자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요. 그뿐만 아니라 저하고 같이 제주 4.3 진상규명보고서 작성단의 단장을 맡아주셨어요. 저는 강사로서 일을 했고 그래서 4.3 진상보고서가 나왔고 이거에 따라서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오늘까지 분향소를 따로 4.3 주관단체들이 따로 만들어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고요. 그런 것도 있고 제가 국회의원 되고 난 다음에는 아름다운 가게를 제주도에 만들어달라고 해서 아름다운 가게를 제주도에 만들었고요.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인권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분이에요.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그래서 저하고 대만, 미국까지 여러 차례 같이 동행해서 다니기고 했었어요. 너무 너무 큰 별이 떨어졌다 생각해서 마음이 되게 아픕니다. 

▷박경수: 아무래도 고인이 이렇게 역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를 전공하셔서 그랬던 걸까요? 

▶강창일: 네, 그렇습니다. 그분이 서울대학교 1학년 때 사회과학 다니다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서 제적을 당했어요. 그래서 단국대학교로 옮겨서 단국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어요. 나중에 또 서울대학교 법대를 아마 졸업했을 거예요. 그때 역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제대로 된 역사학을 세워야 되겠다 이런 일념으로 본인이 직접 논문 쓴 것보다 많은 분들 역사학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 줬고요. 그래서 재작년에는 지금 광화문에 전봉준 그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박경수: 아, 동학농민운동

▶강창일: 네, 크게 전봉준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 박원순 시장님께서 서울시에 땅을 내놓고 해서 동상을 만들 수 있었어요. 여러 가지 업적들이 있습니다. 

▷박경수: 그러니까 서울대 재학 시절에 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된 뒤에 단국대 사학과를 가서 역사를 공부하시게 된 거네요. 

▶강창일: 네, 그렇습니다. 

▷박경수: 그후에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변호사로 인권운동을 벌이신 거고

▶강창일: 첫 변호사 수임 2억을 받았는데 그것을 저희들 역사문제연구소 만드는 데 쾌척해 주셨어요. 

▷박경수: 제가 기억하기로는 고인께서 처음 서울시장에 당선되셨을 때 그때 재산이 마이너스 3억 정도 지금도 늘어났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큰 돈을 민족역사문제연구소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강창일: 그분이 참 물욕이 전혀 없는 분이에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이사를 갈 곳이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 분들한테 사모님이 이사 갈 수 있도록 해야 될 거 아니냐 이런 얘기도 했는데 물욕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변호사를 계속했으면 좋은데 그다음에 시민운동을 했고 희망제작소 같은 데 참여연대 만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변호사 일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돈이 생길 리 없고 있는 재산들 전부 팔아서 시민운동하는 데에 전부 쏟아부었어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큰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정치인 이전에 정치하기 이전에 하나의 시민으로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박경수: 어떻게 생전에 최근 만나신 적이 있었나요? 

▶강창일: 네, 한 달 전에 종종 저한테는 전화도 해 주셨어요. 제가 나이로는 서너 살 선배입니다. 종종 제가 불출마 선언했을 때 작년 12월경에 그때도 강 의원님 불출마하시면 안 된다고 국회에서 그렇게 바른 소리해 주는 분이 있어야 될 거 아니겠냐고 몇 차례 만류했었고요 

▷박경수: 불출마를 만류하셨군요. 

▶강창일: 네, 네. 자기도 정치하는 데 그렇게 떠나면 어쩌냐고 이런 얘기했었어요. 그다음에 코로나19 포럼을 만들었어요. 민주당 국회의원 60여 명 정도 참여하고 있는데 저한테 전화가 와서 고문으로 참여해달라고 해서 흔쾌히 그럽시다 해서 코로나19 정책 포럼의 고문으로 가 있어요. 거기에다가 10여 일 전에 전화가 왔어요. 저녁식사 같이 하자고 그래서 언제 날짜 잡아서 시간날 때 같이 합시다 이렇게 해서 전화를 끊었는데 그리고 일주일 지나서 비보를 듣게 돼서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박경수: 이사장님 얘기를 들으니까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사회적인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사실 안타깝다 비난의 목소리도 있고요 이런 부분은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강창일: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입니다. 사람은 살다보면 과와 공이 다 있기 마련인데 그래도 지금은 제가 끝나지 않았거든요. 이럴 때는 고요히 명복을 빌어주는 게 사람의 도리예요. 사람이 짐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장례도 치르기 전에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더욱 가슴이 아프고요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인가 딱히 정치권에서 그래요 저도 떠났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의 수준이 이런 것인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되었죠. 5일제 끝난 다음에 이것저것 사실 진실도 밝혀야 되고 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상상이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식의 논쟁들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게 보통 사람들 한 것보다 특히 정치권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활용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것 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경수: 통합당에서는 결국 조문을 하지 않았고요.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만이 오셔서 머리를 숙였는데 그런데 김종인 위원장이 장례 절차도 끝나지 않았는데 내년 4월 서울시장 부산시장 선거 얘기를 하면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고요 또 전략적이다 이렇게 평가하시는 분도 있을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강창일: 그분이 정신 나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나이도 드시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고 또 집안이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자죠 명문 집안인데 어떻게 그런 명문 집안의 사람 입에서 그럴 수가 있는지 생과 사의 문제인데 죽음의 문제인데 그런 식으로 천박하게 한 것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저 그분 아는데 그럴 분이 아닌데 정신 나갔나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아주 점잖으신 분 아닙니까? 단순히 그분 인격 모독하기보다 말의 실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잠깐 실수인데 이것이 너무 부풀려졌지 않느냐 진짜 그게 그분의 본심이라고 그러면 정신 나간 사람이에요. 

▷박경수: 김종인 위원장이 실수를 하신 것이지 본 마음은 아닐 거다 이렇게 바로보시는 거네요. 

▶강창일: 네, 그분 그럴 분 아닌데... 정책으로 과잉 해석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문상해야 되는데 안 했나요? 잘 모르겠어요. 

▷박경수: 결국 문상은 안 하셨고요. 청취자 분들의 문자가 많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한국전쟁의 영웅입니다. 백선엽 장군 일각에서 친일 논란은 계속되고 있고요. 향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는데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평가를 하시는지? 

▶강창일: 그분은 친일해서 반민족행자로 낙인찍혀 있거든요. 이것도 그 이후에 정부 수립된 이후에 6.25 전쟁 때에 전쟁 영웅... 동시에 존재하는 신분이죠. 각각 평가하면 되고요 공만 옛날에는 평가했는데 이제 과 부분도 드러났지 않습니까? 과는 과대로 평가하고요 국립현충원 이전되는 말이죠 그건 조심해야 돼요 그런 데 가면 안 되는 거죠. 국립현충원이라는 곳은 참 공과 과 이런 일제강점기 친일 매국행위자 그런 분들이 현충원에 묻히는 것은 이 나라 정체성의 문제가 되죠. 이 나라가 일제 30년 지나서 독립된 나 아니겠습니까? 독립된 나라에서 독립의 제일 반대되는 길을 걸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 국가가 운영하는 현충원에 묻힐 수 있느냐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박경수: 결국 대전현충원으로 안장되는 걸로 결정이 됐습니다. 

▶강창일: 만약에 국립묘지가 있으면 국립묘지로 가면 좋아요. 국군묘지 같은 게 있으면 그런 데 가면 되죠. 그런데 현충원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바람직하지 않고 이 다음에 제대로 되면 국군묘지 같은 게 따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박경수: 아, 국군묘지를. 

▶강창일: 민주화운동했던 사람들 민주화운동했던 사람 민주화운동 묘지도 만들었으면 좋겠고요. 광주 같은 것은 그런 것이거든요. 광주 5.18 묘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가는 게 좋지 않으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국군묘지라는 부분은 당연히 국군묘지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분이죠. 

▷박경수: 국립묘지를 나눠서 구분하면 이런 논란이 일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보시는 거군요. 

▶강창일: 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대전 현충원에 있는 분들 말이죠. 대전에 있는 분들은 서울에 옮기고 이쪽으로 옮기고 그렇게 하면 좋잖아요. 

▷박경수: 이사장님 시간 관계상 오늘 인터뷰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강창일: 네, 수고하세요. 

▷박경수: 강창일 전 의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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