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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김형균 도서출판 동쪽나라 대표

방송 : 2020년 6월 21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지난 시간에 현대 한국불교사에 유마거사라 불리시는 분이시죠. 대원 장경호 거사님 이야기를 다룬 바 있습니다만 오늘은 대원 거사님의 뜻을 이어서 역시 불교 발전을 위해 매진했던 분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대원 거사의 둘째 아드님이신 중원 장상문 거사이신데요. 중원 거사는 대원 거사의 뜻을 이어서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 현대화를 기치로 한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과 또 한국불교 1600년사에 처음으로 방송 포교의 닻을 올린 BBS 불교방송의 초대 사장으로서 그야말로 위법망구했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미디어 포교는 물론이고 문서 포교, 기타 군 포교까지 요소 요소에서 전법의 원력을 실천했던 중원 장상문 거사님과 인연이 많았던 분이시죠. 김형균 도서출판 동쪽나라 대표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김형균 동쪽나라 대표님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김형균 : 네. 안녕하십니까.

 

김봉래 : 대표님 요즘 뭐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시대라고 하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나와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김형균 : 책 읽고, 조그만 책 내고 조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김봉래 : 출판인의 길을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오신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우리 김 대표님 모시게 된 것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재가불자의 표상이 되었던 분이시죠. 대원 장경호 거사님 이야기를 했고, 이제는 그 분의 아드님이시죠 중원 장상문 거사님 이야기를 좀 듣기 위해서인데요. 저도 사실 불교방송 입사하면서 장상문 사장님이 초대 불교방송 사장님이어서 사령장을 직접 받고 입사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30년이 훌쩍 지났네요. 우리 대표님은 중원 장상문 거사님과 어떻게 인연이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형균 : 예. 장상문 거사님이 대원회 회장으로 또는 재단법인 대원정사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게 81년도입니다.

 

김봉래 : 1981년이요.

 

김형균 : 네 그 시점에 오셔서 그래서 이제 아버님이 75년도에 입적하시면서 남겨놓은 뜻을 받들어서 대원회의 활성화, 대원정사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데 온몸을 받치겠다는 그런 선언을 하시고 대원회에 임하셨죠.

 

김봉래 : 그 때 대표님께서 일을 하시고.

 

김형균 : 그 때 저는 천태종에서 만드는 <월간 금강>이라고 하는 잡지를 창간을 해서 하고 있었는데 편집장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잡지를 보신 장상문 거사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내가 잡지를 하려고 하는데 도와 달라. 그래서 제가 이제 자리를 옮겨서 대원회로 입사를 하게 되고 대원회에서 이제 거사님을 모시고 그 때 같이 일을 하고 계시던 권오현 법사님을 모시고 그 두 분 모시고 출판 관련된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대원>지인가요.

 

김형균 : 그렇죠. 원래는 <대원회보>라고 있었는데.

 

김봉래 : 대원회보요.

 

김형균 : 네. 그것을 <대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서 잡지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랬으나 그것은 아직도 하나의 기관지에 불과한 그런 성격을 띠고 있어서 얼마 후에 장상문 대사님이, 거사님이, 우리는 자꾸 대사님이라 불러가지고... 장상문 거사님이 좀 더 잡지의 틀을 바꿔보자 그렇게 말씀하셔서 <대중불교>라는 잡지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김봉래 : 그게 몇 년 도죠.

 

김형균 : 85년도입니다.

 

김봉래 : 1985년. 당시만하더라도 불교 잡지가 몇 개 있었죠.

 

김형균 : 네. <법륜>이라는 잡지가 있었고요. 또 아까 말씀드렸던 <금강>이라는 잡지가 있었고 그 이외에 각 사찰에서 소진되는 그런 잡지들이 있었지만 잡지가 큰 어떤 역할을 하거나 큰 부수를 발행하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김봉래 : 예. <불광>지도 생각나고요. 태고종에서 발행하는 <불교>라는 잡지가 오래됐었고.

 

김형균 ; 예. 그런 게 있었습니다만 부수나 이런 것이 취약했습니다. <불교사상>이라는 잡지가 있었고요.

 

김봉래 : 그렇죠. 그래도 이 <대중불교>만큼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잡지사에 있어서 하나의 어떤 획을 그은 잡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김형균 : 네. 거사님의 뜻은 불교를 대중화시켜야 한다. 즉 대중들을 위한 불교를 만들어야 된다. 불교가 그렇게 개혁을 해야 된다하는 것이 늘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불교의 개혁이 뭐냐, 절에 가서 잘 알아듣기 힘든 스님들의 말씀만으로는 우리 불교가 개혁이 되기는 힘들다. 이 대중사회 속에서 불교가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선을 보여야 된다 라는 것이 주요 사상이셨습니다. 그래서 대중불교라고 하는 포인트를 내세우시게 되는데 거기에 맞춰서 <대중불교>라는 잡지가 대중들을 위한 뭔가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잡지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다른 모든 일반적인 학문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현대화하는데 일반인이 비전문가들도 읽을 수 있는 이러한 쉽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들게 되죠. 그렇게 하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각 지방의 소식들, 지방 이야기 이런 것을 취재를 해서 많이 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 지방에 지방 기자를 두고 거기에서 취재된 이야기를 싣고 하면서 생활 속의 불교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하나 다 보여주기 시작했죠.

 

김봉래 : 그러니까 1981년에 대원회 회장 그리고 대원정사 이사장으로 오시면서 그야말로 아버님 대원 거사의 뜻을 이어서 좀 더 발전을 시킨 그런 상황이었던 거고 그 과정에 우리 김형균 대표님도 함께 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잖아요.

 

김형균 : 그렇습니다.

 

김봉래 : 그래서 그 때 대원정사를 재단법인으로 이렇게 또 설립을 하셨다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게 언제쯤인가요.

 

김형균 : 재단법인 대원정사는 원래 대원정사가 있었고 그것은 사찰 이름으로 거기 있었던 것이 대원정사죠. 그것을 대원 재단법인으로 만든 것은 약 80년대 가까이 되어서 그래서 대원정사를 재단법인으로 만드는 그 역할을 하고 그래서 장상문 대사님이 당신 사유 재산을 기부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재단의 성격을 확실히 갖추게 된 겁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러니까 대원 장경호 거사님은 사재로 대한불교진흥원을 설립하신 거고, 또 아드님은 재단법인 대원정사를 설립을 하셨네요.

 

김형균 : 네. 그래서 장상문 거사님이 세우신 것이 재단법인 대원정사, 사단법인 한국불교 대원회, 지금 우리가 대원회라고 호칭하는 이 대원회를 설립하고, 그 외 대원불교대학을 설립하고 그래서 일반교양대학으로 유지를 하다가 정식적인 불교대학으로 설립을 해서 교육기관을 해서 2년제로 이렇게 만드는 데 역할을 하시죠.

 

김봉래 : 그렇군요. 어쨌든 우리 김형균 대표님과는 대원정사 시절이 가장 인연이 많이 남아 있겠습니다. 그 때 떠올리면 어떤 추억이나 기억들이 이렇게 떠오르시는지요.

 

김형균 : 제일 노력하시던 것이 출판 부분하고 그 다음에 불교방송 부분, 이것을 자주 말씀을 하시고 추진을 하셨어요. 그리고 사유재산을 투입하셔서 대원정사 옆에 대원불교회관이라고 하는 300평짜리 건물을 지으셔요. 그래서 가보면 두 개의 건물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하나의 건물을 땅을 사들이고 거기다 새로운 건물을 지으셔서 거기에 대원불교대학을 세우고 대한불교진흥원도 거기에 사무실을 만들고.

 

김봉래 : 거기에 뭐, 불교방송도 거기에 입주를 하는 방안도 연구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김형균 : 불교방송도 허가가 나면 거기서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저기를 했고. 거기에 또 무엇을 만들었냐 하면 선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와서 참선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만들었고 그리고 정기 강좌로 불교대학을 계속 운영하니까 아주 거기 사람이 많았고.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지하 식당에 음식을 만들어서 가난한 이런 분들이 찾아오면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하는 그런 급식소를 운영을 해서 남산의 유명한 장소가 되기도 했죠.

 

김봉래 : 무료급식 이야기는 대원 장경호 거사님 시절에 시작이 된 거로 아는데요.

 

김형균 : 네. 그 때는 건물이 저쪽이었고 그랬는데 이쪽에도 또 해서 급식을 계속 해 나갔다 이런 말씀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어쨌든 장상문 거사님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봉직을 했었고 사업은 잇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사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오로지 불교 발전에 힘써달라고 하는 부친의 유지를 받드는데 전념했다 이렇게 보면 될 것 같아요.

 

김형균 : 그렇습니다. 장상문 거사님은 오랜 세월 그러니까 51년도에 일본에 UN 사령부의 대북방송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8년 동안 동경에서 대북 방송 일을 보시면서 방송 실무를 충분히 익히셨죠. 그것이 거사님으로서는 정말이지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 텐데 이후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외무부에서 일을 하면서 스웨덴 대사, 멕시코 대사, UN 주재 대사 등 이런 주요 공직을 거치고 아주 큰일을 많이 하시다가 환갑이 되는 나이에 퇴직을 하시고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오직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겠다 이런 결심을 하시고 그런 뜻을 발표하십니다.

 

김봉래 : 굉장히 원력과 신심이 아버님을 빼닮은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불교방송도 설립추진위원장을 직접 맡으셔서 최일선에 서셨다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김형균 : 네. 방송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은 60년대에도 조계종이 한 번 시도를 했었고 70년대에도 대원 장경호 거사가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했지만 두 번 다 설립을 못하고 실패를 하죠. 그런데 80년대 들어서 장상문 거사님이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된다.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고 이것은 내가 어떻게든 이루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시고 조계종, 천태종, 이러한 6개 종단 대표들과 함께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가지고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불교방송 개국을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설립 허가가 난 어떤 상황이 됐고요. 그 쪽에서 진흥원의 다보빌딩을 매입해서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것이 또 하나 중요한 거죠. 그러한 내외의 어떤 요건이 갖춰지면서 마침내 불교방송이 90년도에 문을 열어가지고 개국을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온 것이고 거사님의 소원이 성취된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김봉래 : 그렇죠. 장상문 거사님이 안계셨다면 불교방송은 조금 더 설립이 늦춰졌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데, 그래서 허가를 종단에서 맡고 운영은 대한불교진흥원이 책임지는 식으로 이렇게 분담이 되었다 그렇게 들었는데요. 그런 뒷이야기 들으신 게 있으신가요.

 

김형균 : 제1대 사장으로 장상문 거사님이 취임하시고 그 이전에는 이사장으로는 조계종에서 의연스님이 맡고 이렇게 해서 서로 분리는 했습니다만 모든 실무와 진행하는 것은 장상문 거사님이 책임을 맡고 했죠. 진행을. 제가 기억나는 것은 제가 거기 있을 때 와보라고 해서 거사님 방에 가보니까 이렇게 설계도 같은 것을 펼쳐놓고 방송국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하는 그런 거, 또는 기자재는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게 어디서 났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일본에 계셨을 때 준비해온 것이다, 보고 얻어온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때가 한 85년도 이쯤 됐을 때인데 이미 그 때부터 방송국은 어떻게 하고 설립해야 되고 구상을 다 하셨죠.

 

김봉래 : 그러니까 대원정사에서 일을 보시면서도 불교방송에 대한 꿈을 키워갔고 실천 방안을 세밀하게 생각을 하셨어요.

 

김형균 : 그래서 내용은 어떤 거로 해야 하고 88년, 89년 되면 누구를 고정 출연자로 해야 할 것인가 해서 출연진도 설정하시고 그 분들 직접 만나서 출연요청도 하고. 그 분 중에 정목스님도 계시고,,,

 

김봉래 : 아. 그렇군요. 대한민국 최초의 스님 진행자였죠.

 

김형균 : 정병조 교수님도 그 때 이미 사전에 다 이야기가 되어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나가셨죠.

 

김봉래 : 중원 거사님으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출판 사업 또 불교 대중화 사업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방송을 통한 전법, 이것이 어떤 필생의 과업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좀 드는데, 중원 거사님께서는 불교방송이 어떤 방송이 되기를 바라셨나요.

 

김형균 : 대원 장경호 거사님부터 이어져 온 불교를 생활화하자, 생활불교를 유지하는 것에 키포인트가 첫째 뭐냐 하면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라는 그런 캐치프레이즈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집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약간의 금기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을 일반 재가자들이 모실 수 있냐, 집에다가. 부처님은 거룩하게 법당에다 모셔야 된다, 이런 개념이 그 당시에는 완전히 되어 있었죠. 그런데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사진으로 모시던 그림으로 모시던 모시자 이런 이야기가 나왔고, 그렇게 모시고 하려면 염불 소리도 들려줘야 하고 아침에는 아침 염불, 그죠. 이러한 염불소리가 들어가야 하고 법어도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방송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불교를 생활화하는 데 가장 핵심이고 꽃은 무엇이냐, 그것은 불교방송이다. 이런 생각과 말씀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아버님으로부터도 이어졌지만 특히 장상문 거사님이 아주 치중해서 말씀을 하시던 부분입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불교방송이 있는 곳이 바로 법당이고 또 불교방송을 들으면서 보면서 하는 일이 곧 불사다 그렇게 탤런트 김용림 선생님도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그런 원력을 그야말로 실현하신 거네요.

 

김형균 : 네. 그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래서 불교방송의 내용 이런 것도 상당히 그런 부분에 치중해서 짜고 출연진도 그렇게 하고 또 훌륭하신 전문가들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모셔오죠. 그 당시 그렇게 하면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문화, 학술 또 수행 이런 것에 전념하던 분들이 방송에 나와서 말씀을 많이 하는 그런 계기를 갖게 되었고 또 어디서 큰 강연회 같은 게 있으면 그게 중계가 되고 이런 생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 중요한 사안들이 방송을 타고 나가는데 늘 장상문 거사님은 무릎을 치는 것이 이 방송은 전국적으로 나가야 된다. 왜 이게 우리 서울에서만 이렇게 퍼져야 되느냐. 지방 방송국을 개국을 해야 된다. 이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지방방송 확장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을 손수하시면서 그리고 부산, 광주 이런 데를 직접 찾아다니시면서 거기 사람들과 함께 방송국을 설립하자라는 제안합니다. 그 쪽 지역의 불자들과 유명 인사들을 만나 가지고. 오늘날 지금 몇 개쯤인지 제가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김봉래 : 7개 지방사가 있습니다.

 

김형균 : 7개 지방사가.

 

김봉래 : 제주도까지.

 

김형균 : 그 당시 이미 다섯 개 까지 장상문 거사님이 만들어서 했고 세 개는 다 세우셔서 개국해서 나가는 거까지 하시고, 나머지 두 개 하시고 그렇게 했죠. 그렇게 했을 때 우리 불교가 마치 양복을 입었다가 한복을 입은 것처럼, 한복을 입었다가 양복을 입은 것처럼 그 모양새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김봉래 : 저희 불교방송이 생기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요. 그 중에 하나는 원성 아닌 원성을 들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부적 같은 것을 많이 줬거든요. 그런데 이제 스님들이 질문.답변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자비의 전화’라고. 스님들이 질문을 받을 때 마음이 중요한 거지 그런 껍데기의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가지고 부적을 많이 안 하게 되는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서 항의 아닌 항의를 받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중원 장상문 거사님을 초대 사장님으로 모시고 저희가 일을 해왔었는데 그 때 잊히지 않는 말씀이 이거거든요. “좋은 불자가 좋은 방송을 만든다.” 그런 말씀을 저는 가슴에 새기고 있는데 김형균 대표님께서도 중원 거사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일을 하시면서 그 분의 인품이라든가 그 분의 평소 언행이라든가 뭐 이런 것 속에서 참 아 훌륭하시다 이렇게 느끼신 적이 계실 것 같아요. 많이.

 

김형균 : 예. 거사님은 계획서 같은 것을 올리면 그것을 꼼꼼하게 보시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거사님의 의견을 주시는 그런 타입이십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이런 결정을 내리시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도 좋다, 저렇게 하는 것도 좋다 이런 의견을 주시는 정도였는데, 원고를 보신 경우도 있어요. 본인이 원고를 보시면서 좀 손을 보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것에 직접 참여를 하셔서 이런 것을 한다. 특히 단행본 만들 때는 그런 것을 특별히. 또 잡지는 빨리빨리 해야 하니까 그럴 시간이 없었지만 단행본 할 때는 원고 수정까지도 하시고.

 

김봉래 : 그러셨군요. 제가 개국 전에 입사해가지고 외국 외빈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요. 그 때 영어로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못하는 영어인데 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새까맣게 교정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주셨어요. 그 기억이 나네요.

 

김형균 : 그렇게 꼼꼼하시면서 그래서 <대중불교>가 나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인 정기 독자가 한 3만 명에 이르게 되었어요.

 

김봉래 : 대단하네요.

 

김형균 : 그것은 몇 천 명뿐이었던 한국의 불교잡지들의 숫자에 비하면 굉장히 많아진 거죠. 거기에 시중에 내보내는 판매용으로 내보내는 게 한 5,000부, 그래서 한 3만 5천부 씩 찍는 큰 잡지로 성장을 했는데, 그 잡지를 배송하려면 옛날에 다 봉투에다가 넣고 주소 딱지 붙이고 이런 거 하지 않습니까. 그거 할 때 환갑도 넘으신 어르신께서 오셔서 그 일을 같이 하시는 거예요. 진짜 욕심이나 또는 무슨 직위 개념 이런 게 없으세요. 그냥 같이 이야기 하고 같이 밥 먹고 그렇게 소탈하게 하셨던, 아주 뭐 화려하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고 그러시죠.

 

김봉래 : 정말 중원 거사님이 좀 더 오래 사셨더라면 우리 불교방송을 비롯해서 또 출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면에서 불교가 조금 더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하는데. 사실 우리 대표님도 출판계에 오래 몸담으시면서 아까 <대중불교> 말씀도 하셨지만 <굴렁쇠 어린이>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거든요. 보면.

 

김형균 : 우리가 한계를 느끼는 게 이제 <대중불교>를 3만 부 이상을 발행할 때 거사님이 하신 말씀이 이 <대중불교>가 10만 부가 넘어서면 한국불교는 확 바뀐다. 새로운 한국불교가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 이 <대중불교>를 계속 키워서 10만부 달성을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 이런 진짜 마음에 쏙 드는 그리고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감탄스러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김봉래 : 뚜렷한 어떤 비전과 목표가 계셨군요.

 

김형균 : 네. 그래서 그 잡지가 전국에 많이 읽히도록 지방 기자들 한테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 지방 순회법회도 가고 지방으로 도는 그런 행사들 많이 벌립니다. 그것을 전국순회법회라고 하는데 그게 단기 교양대학도 만들고 일주일짜리, 각 지역마다 일주일치 씩 교양대학을 만들어서 유명한 교수님들이 가서 일주일의 강의를 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한 60~70군데에서 서로 해달라고 할 정도로 그게 순회 교양대학이, 단기 교양대학이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은 발전해가지고 정식 불교대학이 전국에 많이 생겼지 않습니까. 그 때는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강사도 없고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퍼져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뭐냐하면 <대중불교>입니다. 또 <대중불교>가 점점 커져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바로 그런 전국 순회포교였습니다. 서로가 상보하는 그런 시스템이 된 거죠. 그런 종합적인 것 거기에 불교방송도 오픈해야 한다, 지방에, 이런 것이 다 하나의 틀을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같이 나가는 그런 틀이 된 겁니다.

 

김봉래 : 굉장히 포교의 인프라를 깔아 놓는데 집중하셨다. 어떻게 보면 저희는 그런 인프라 위에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고 멋진 집을 지어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불교방송이 그러다보니까 어언 30년이 넘었지 않습니까. 탄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쭉 봐오셨는데 소회가 어떠세요. 주위에서 보시기에.

 

김형균 : 방송을 들을 때마다 어 이런 분도 계셨네, 좋다. 이렇게 우리가 접하지 못한 분을 접할 때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늘 하던 금강경 강의도 재미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좀 뭐라고 할까 신선도에서는 그렇잖아요.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제일 잘 하는 게 어디냐 하면 바로 불교방송입니다. 잡지도 신문도 그런 부분에서는 역할이 불교방송보다는 못했죠.

 

김봉래 : 저희는 매일매일 편성이 바뀌니까요.

 

김형균 : 그렇게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이 더 전문적이고 깊이 들어간다면 방송은 그 부분에서 그렇게까지 깊이 들어가지는 않고 여기 새로운 강의가 있다, 여기 새로운 꽃씨가 있어서 씨앗이 난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죠. 그런 것이 아주 좋았고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제가 볼 때는 좋았습니다. 즉 우리가 마음을 편히 하고 불교 공부 좀 이런 식으로 해야겠구나 하는, 또 신앙심을 내가 더 이렇게 하고 선수행을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끔 유도해주는 것, 이것이 저는 불교방송을 들을 때마다 그런 역할을 잘 하고 있구나. 어떤 때는 그게 조금 부족하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봉래 : 감사합니다. 제가 초년에 정치권 출입을 할 때 모 정당에 가면 그러는 거예요. 같은 종교방송인데. 모 방송은 너무 이렇게 칼로 찌르듯이 아프게 이렇게 하는데 불교방송을 들으면 왠지 푸근하다 그런 말씀을. 물론 제 앞이니까 덕담을 해줬겠지만 그래서 중도적(中道的)적인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치우친 쪽으로 편을 들 수 없는 것이고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모두 보듬고 나가야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저희 방송국의 5대 지표 가운데 하나가 ‘치우침 없는 생각을 이끌어가는 방송’이거든요. 그것이 어떤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원효스님의 화쟁처럼 모든 견해를 감싸 안고 가는 그런 푸근한 방송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과연 중원 거사님의 뜻이 얼마나 저희 불교방송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늘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게 되는데, 불교방송에 거는 어떤 주문이랄까요 그런 게 계시다면 이런 기회에 좀.

 

김형균 : 제가 40년 이상을 언론, 신문기자로 시작해서 잡지 그 다음에 출판을 40여 년 간 종사를 했는데.

 

김봉래 : 지금도 하고 계시죠.

 

김형균 : 네. 지금 이 종이책, 글자 이것은 시대가 이제 많이 바뀌어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이나 어떤 길을 제시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방송은 그 한계에서 아직은 밀리지 않고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계에서 지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SNS도 있겠지만 방송이 그 부분에 더 역할을 해야 하고, 즉 제가 바라는 것은 출판이 무너지고 신문이 위축되고 이런 언론이나 출판문화가 위축되는 이런 현 시점에서 라디오 방송이나 TV 방송이 그러한 부분을 같이 아울러서 신앙생활, 포교 이런 것에 좀 더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봉래 : 지금 뉴미디어 시대를 넘어서 어떻게 보면 종합미디어 시대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지향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오랜만에 저희 스튜디오에 나오셨는데 마무리 말씀을 주시면서 오늘 순서 마칠까 합니다.

 

김형균 : 네. 처음에 방송국이 설립됐을 때 저도 여기 무슨 진행자로 나와서 몇 개월 한 적이 있습니다. 자꾸 그 생각이 나면서 고생하셨던 장상문 거사님, 또 권오현 법사님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 분들의 그런 노력과 성취가 있으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장상문 거사님의 보살행은 정말로 하늘과 땅을 맞닿는 그런 큰 업적이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 말씀 듣고 나니까 저희가 더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방송 출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형균 : 네. 감사합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김형균 대표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불교 대중화를 위해서 아주 진력하신 중원 장상문 거사님의 말씀 중에서도요, 저는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는 말씀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사실 방송이 있는 곳이 바로 법당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해서 거사님의 원력이 실현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정말 불교방송과 함께 하는 일이 또 불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30주년을 맞기까지 정말 여러분의 원력이 함께 했음을 잊지 않고 더욱 정진해야겠다, 이런 다짐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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