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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8편)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민 판잣집, 철거하면 복구...수용시설 한계에 자연스레 생겨나"
박찬민 기자 | 승인 2020.06.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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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소개하고 계시는데, 아미동 화장장을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1900년대 초 부산에 사설화장장이 세 곳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미동은 지금 은천교회 일대에 화장장이 있었다고 설명드렸지요.

1909년경 아미동에서본 부산항(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아미동 화장장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미동 천주교아파트 자리가 화장장 자리였다고 기억을 하시는데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소장님?

-아미동 천주교아파트 자리가 화장장 자리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1929년 이후의 화장장 자리입니다. 자세히 소개드리자면 당시 부산지역에 세 곳의 사설화장장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사설화장장들이 시설 미비로 인한 민원발생 등을 이유로 당시 부산부에서 1928년 세 곳의 사설화장장을 통합하여 부영화장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29년 일본인 공동묘지 아래쪽 현재의 아미동 천주교 아파트 자리에 부영(府營)화장장을 건립했지요. 천주교 아파트 자리의 부영화장장 건립 당시 큰 말썽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미동에는 조선인이 983세대4천3백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곡정이라고도 불렀던 현 아미파출소 위에서 아미초등학교 북쪽, 그러니까 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 건너편에서 천주교아파트 앞 사이 일대는 수 백세대의 조선인 밀집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산부가 발표한 화장장 이전 예정지가 현 아미파출소 바로 뒤에 있는 아동종합보호센터 자리였습니다. 당시 아미동 가운데서도 곡정이라 불렀던 이곳 주민들 대부분 이 화장장 앞을 지나는 개울물을 사용하고 있는데다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공동우물이 이곳에 있었답니다.

1952.3년경 아미동에서 바라본 비석문화마을과 부산항(스웨덴대사관 제공)

부산부에서 이곳에 화장장을 건립하겠다는 발표를 하니 주민들의 저항이 매우 거셀 수 밖에 없었지요. 당시 언론에서는 부산부의 태도를‘조선인 무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민족의 대립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과 주변 조선인들이 즉각 반대하는 대응조직을 만들어 정무총감을 만나 문제해결을 요구하기까지 했던 겁니다. 결국 부산부는 기존 화장장 예정부지인 아동종합보호센터 자리는 장제장으로 하고, 화장장은 이 보다 더 위쪽으로 올라간 오늘날 천주교 아파트 자리에 1929년 설치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일제시기 아미동 화장장이 해방 후에는 당감동으로 이전했다가 지금의 선두구동 영락공원으로 이전하게 되었죠. 그런데 일제시기 당시 부산부에서는 이곳에 부립화장장을 건립해야 했을 정도의 상황이었던가요?

-네, 아미동 화장장은 1957년 당감동, 현 개성고등학교 부지로 이전했다가 1995년 현재 영락공원으로 이전했습니다.

여기서 일본의 장제문화 가운데 화장문화는 불교의 영향이었던지 매우 강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1917년부터 1926년까지 년간 부산부 내의 일본인 인구 사망자는 평균 861명인데 약 90%, 즉 평균 806명은 화장을 했다 합니다. 게다가 일본인의 화장 비율보다는 미미하지만 조선인들도 일부 화장장을 이용했으니까요. 게다가 복병산 기슭의 일본인 묘지, 주로 납골묘였지요, 이 납골묘가 지금 1906년부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이전해 왔기 때문에 인근에 화장장을 마련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자연스런 절차일 수도 있겠지요.

2016년 아미동에서 부산항(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그리고 1926년 당시 년 평균 806명의 화장 숫자가 10년 뒤인 1936년에는 그 배로 증가했는데, 정책이라는 것은 앞을 내다보고 실시하는 것이니 그 당위성을 인정할 만 하지요. 게다가 부산의 최대 빈민촌이 있는 곳이니 조선인을 무시하는 차원도 있었구요. 그리고 이미 그 일대에 화장장이 있다는 기 근거지 등등이 이곳에 부립화장장을 건립할 수 밖에 없는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된 부산부 입장이었다고 봅니다.

공동묘지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아미동 일본인 공동묘지에 피란민들이 집중하게 된 시기와 동기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여기서 당시 상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부산인구가 47만여 명이었던 것이 1952년에는85만 명을 넘게 됩니다. 피난민들이 급증하니 부산시에서는 적기 수용소, 영도의 대한도기주식회사,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개의 수용소에 7만 명가량을 수용할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는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피난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아무런 대책없이 내몰린 피난민들은 판잣집을 지어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합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두 주변의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봉래동과 대평동, 남항동 바닷가, 청학동 산자락, 보수천 주변, 보수공원이 있었던 보수동 산자락, 충무동 해안가 등에 마치 비온 뒤 죽순 자라듯 시내 곳곳에 판자촌이 마구잡이식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시는 무허가 판잣집을 도시미관, 위생, 교통난 등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철거했는데, 마치 시범 사업하듯 1951년 용두산, 복병산, 부평동, 보수천 부근 등의 판잣집이 철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 그 자리에 다시 판자촌이 생기는 등 철거와 복구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졌습니다.

2018년 아미동에서 바라본 비석문화마을과 부산항(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1951년 후반에서 52년 초반에는 제주도와 거제도 등지로 피란을 갔던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 듭니다. 그곳에서는 도저히 생계유지 수단이 없으니 도시로 가면 막노동 일이나 시장 좌판이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지요.

당시 피란 정부와 부산시에서는 몇 세대씩 엮어서 군용 대형 천막을 주어 도심 외곽으로 보내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갈데 없는 피란민들이 당시 아미동 원주민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일본인 납골묘 일대에 피란민들이 천막 생활을 시작합니다. 초기 이곳에 왔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 산상교회 주변이 초기 피란민 천막시설이 자리했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박찬민 기자  highha@bbs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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