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꼽히는 고 조정래 변호사가 올해 6.10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민주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가 훈장을 받았습니다.

고인은 평생을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자리이타의 정신을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고 조영래 변호사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기획보도 오늘은 첫  순서로 고인의 생전 활동과 삶의 궤적을 류기완 기자가 전합니다.

 

마흔셋의 짧은 생,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인권 변호의 상징으로, 선·후배 법조인들 사이에는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가 있습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신평 /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 "아주 존경하는 선배였고요...조영래 변호사님은 큰 산과 같았어요...산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지만 이 산이 대단한 산이라는 그런 사실은 알 수가 있었죠. 그 앞에 서면 아주 마음이 편해지고 무엇이라도 그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고 조영래 변호사는 학생 때부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와 부조리 등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실천가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경기고등학교 시절, 학생들을 이끌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학생운동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때문에 71년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후에는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수배생활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도 조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을 쓰며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이를 계기로 개발과 발전에 소외된 주변 이웃들에게 연민과 자비심을 갖고 사회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특히 수배 기간에는 신분을 숨기고 보일러 기사 등으로 생활하면서 노동자의 삶이 자신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평등사상과 이들이 모두 고귀한 존재라는 생명존중 사상을 깨닫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장기표 / 신문명정책연구원장] : "모든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7년의 짧은 변호사 생활이었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공익 소송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84년 국내 최초 집단공익사건인 망원동 수재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 조기정년철폐 사건 등의 담당 변호사로 대규모 집단 소송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공익 증진에 크게 기여함은 물론, 군사 정권의 폭압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조 변호사의 이러한 활동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천정배 / 前 국회의원·前법무부 장관] : "문제 있던 기업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했는데 이게 사실은 변호사의 관점, 법조계 관점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소송이었죠...한편으로는 굉장히 이상이 높으면서도 현실에 뿌리박는 실천적인 자세, 역량 이것을 전 늘 기억하고 닮으려고..."

[스탠딩]

엄혹했던 시기 사회개혁과 인권 확장에 앞장섰던 고 조영래 변호사.

그가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 있었던 건 인권에 대한 신념과 세상을 향한 자비심이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BBS 뉴스 류기완입니다.

영상취재: 최동경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