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수도 부산 시절 용두산 화재에 국보급 문화재도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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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용두산공원의 피란민 판자촌 시절의 에피소드 몇가지를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오늘은 피란시절 용두산공원에서 발생했던 안타까운 이야기 한가지 전해드리고 아미동 피란민부락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화체육부 산하에 국립국악원이 있습니다. 이 기관은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궁중음악기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신라에서 고려, 조선, 대한제국시대를 거치면서 시대에 맞는 명칭을 사용하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로 이어져 왔습니다. 해방후 구궁중아악기관이 해체된 후 한때 구왕궁아악부로 존속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1월에 국립국악원이라는 직제가 법으로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식 개원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피란수도 부산 시절인 1951년 4월 10일 용두산공원 자락에 국립국악원을 정식 개원했습니다. 당시 국립국악원이 개원되었던 장소가 현재 광복로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 끝자락 조금 못가서 오른쪽에 작은 운동 쉼터가 있는 곳입니다. 앞시간에 이곳 석축에 용두산 대화재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소개드렸던 그 장소입니다.

1903년 복병산 북쪽 자락의 일본인 묘지와 용두산(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이곳은 일제시기 부산도서관이 개관한 장소인데 한국전쟁 시기 부산도서관은 동광동 옛 부산부청으로 옮겨가고 이 옛 도서관 건물에 국립국악원을 개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두산 자락의 국립국악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비극이 발생합니다. 한국전쟁이 갑자기 발발하면서 문화재들도 부산으로 이전해 왔는데 그 가운데서 창덕궁에 소장하고 있던 왕실 유물들은 국립국악원 창고로 소개해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구황실에서 임금님이 사용하시던 국보적인 서적과 여러가지 물품, 장식품, 그리고 역대 조선왕 가운데 12분의 어진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지요. 1953년 8월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왕실 유물들을 보관할 공간이 정비가 안되었던지 이 왕실 유물들은 그때까지 부산에 남겨져 있었답니다.

지난 시간에 54년 12월 10일 용두산대화재가 발생하여 일대 피란민 부락 1천 여채를 소실시켰다고 소개드렸는데 당시 이 화재에서는 왕실 유물들은 손상을 입지 않았답니다. 이 용두산대화재 이후 화재민 이주 대책을 세우는 동안 일부 피란민들이 화재가 발생했던 옛 집터에 다시 판자집을 조성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보름만인 12월 26일 새벽에 용두산 남쪽 언덕의 판자촌에서 불이 나서 판자집 약 600호가 소실됩니다. 이 화재로 국립국악원 창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 12명의 어진영 가운데 9명의 임금 어진과 궁중일기 등 약 4천여 점 중 3천 5백여 점이 화마에 소실되는 비극이 발생한 겁니다. 

한국전쟁 피란시기 많은 대형 화재가 발생해서 인명 피해도 많았지만 이런 국보급 문화재 소실이라는 비극도 발생했습니다. 왕실 어진영은 전주 풍남동에 위치한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는데 현재 태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임금의 어진 만 봉안되어 있습니다. 

1910년대 초 부민산에서 바라본 서구와 중구(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이어진다고 하셨는데 ‘비석문화마을’이라는 표현이 어딘가 익숙치 않은데 어떤 곳인가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서구 아미동 사하구 감천동과 이웃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약 10년 전부터 감천문화마을이 부산 도시투어의 핵심 공간으로 떠오르면서 이곳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과거 일본인 공동 납골묘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독특한 공간의 주거라는 것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수 년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수소문하여 찾는 곳이 되면서 문화마을이라는 명칭을 덧붙인 것입니다.

아미동은 조선후기 동래군 사천면 구 초량리에서 1866년 즉 개항 10년전 사하면 부민리에 속했다가 30년뒤인 1896년 동래군에서 부산부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부민동 일부를 곡정(谷町) 1, 2정목으로 편성했다가 해방 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아미동으로 바꾸었다 합니다. 공식 기록은 이렇게 나오는데 이미 1924년 발행된 지도에 아미동이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어 오래 전부터 토속적으로 부르던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1910년대 토성동 현 서구청 뒤에서 바라본 아미동모습(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일제강점기 곡정이라는 지명을 지닐 정도로 아미동은 부산대학병원이 자리한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골짝에 해당하는 지형입니다.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있는 아미파출소에서 아미초등학교 앞을 지나 산상교회 앞을 거쳐서 감천문화마을로 가는 도로가 조선시대 옛길인데 산비탈이 매우 심해서 산자락 길을 가면서 옆으로 서너번 꺽이는 형태로 도로가 나 있습니다. 산상교회 앞에 감천문화마을 입구에 이르는 곳은 아미고개라 불렀던 곳입니다. 이 길은 과거 조선시대 동래에서 부산진을 거쳐 다대진으로 가던 지름길로 이 일대에서 용두산 주변 원도심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다대진으로 가는 길목이고, 원도심을 한 눈에 조망되는 공간이라하셨는데 이곳에 일본인 공동 납골묘를 조성하게된 된 이유가 있는가요?

-1876년 부산항이 근대 개항장이 되면서 과거 초량왜관 지역이었던 광복동과 용두산 공원 일대가 일본전관거류지가 됩니다.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들어와서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이웃한 만주까지 넘나들면서 농업, 어업, 공업을 비롯해서 금융과 서비스업까지 전 분야에 걸쳐 투자하면서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서 눌러 앉고 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그들의 땅처럼 여기게 되고 결국 이곳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거점 인근에 묘를 조성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조선 정부와 교섭 끝에 대청동과 동광동에 연이어 있는 복병산 남쪽 자락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차츰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확대하면서 1905년부터 대청로를 넓히는 등 시가지 정비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청로 주변 복병산 자락을 절개해서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착수하면서 그들의 공동묘지를 아미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 1906년 입니다.

아미동과 곡정이 나타나 있는 1924년 발행 부산지도 부분(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그런데 왜 이곳 아미동을 택했는가 인데 당시 이곳은 다대포로 가는 길목이어서 도로가 확보되어 있고. 게다가 아미동 일대는 부산의 3대 빈촌지역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조선 정부와 합의하에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을 표면에 내세우고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니 집단 항의를 받을 염려가 적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묘지를 조성한 곳에서 내려다 보면 죽은 자가 그들이 일구어 놓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지요. 그러니 후손들 입장에서는 먼저 이곳을 개척한 어른들, 당신들이 일구어 놓은 곳을 마치 감상하듯 내려다 보면서 후손들을 격려해 달라는 의미였던 거라고 봅니다.  

아미동에 화장장까지 건설했다면서요?

-1900년대 초에 부산에 화장장이 세 곳 있었습니다. 좌천동 증산 남쪽 기슭, 영도 영선동 삼거리, 그리고 아미동에. 이 아미동 화장장은 지금 중구 신창동 대각사 자리에 들어서 있던 일본불교 동본원사 부산별원이 사설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지금 아미동 은천교회 주변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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