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학교 3곳 용두산에 자리잡아...공중화장실 악취에 학습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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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지난시간에 용두산공원의 판자촌이야기를 진행하면서 54년 12월 10일 아침에 발생한 용두산 대화재 피해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고 소개하셨는데, 지금 용두산은 사계절 녹음이 우거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만나는 용두산의 녹음은 화재 이후 복구된 모습이겠네요?

-그렇습니다. 피란시절 부산에서 발생한 많은 화재들은 앞으로 차차 지역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용두산은 이 54년 12월 10일 발생한 화재 이후 불과 보름 만인 12월 26일 새벽에 한 차례 더 발생하면서 그야말로 민둥산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1956년 4월부터 부산시내 29개처 공공기관에 용두산의 영역을 할당해서 상록수와 낙엽수를 심은 것이 오늘의 녹지 기반이 되었습니 다. 

당시 용두산대화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광복로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 끝지점 부근에 있는 체력단련장 담벽의 화강석 돌담과 부산호텔 뒤편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 담벽 등에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지요.

한편 용두산대화재 후 이듬해인 1955년에 지역주민들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건립한 수화예방용 부적비가 용두산타워 뒤편 용두산 북쪽 자락 기슭에 서 있는데 이 수화예방비라 부르는 이 비석 뒷편에 새겨진 부적형 문양이 재미있어요.

한자 불 火자를 가운데 두고 사각형으로 주위를 둘렀는데 이 사각형 네 방향으로 물 水자를 새겨놓고 다시 사각형으로 마감한 모습인데 마치 불을 물로 가둔 모습인데 당시 누가 이런 발상했는지 모르지만 꽤 유머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951년 국립국악원이 개원된 옛 부산부립도서관의 1926년 모습(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용두산 수화예방비 소개를 해 주셨는데 이 수화예방비 비석과 부적문양은 피란수도 부산이야기가 각 포털사이트에 올라와 있으니까요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용두산공원의 피란민 부락은 대략 언제쯤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그 외 이곳 판자촌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도 있을 것 같은데 소개 부탁드립니다.

-정확한 연구가 없는 상황입니다만 용두산공원 피란민촌 형성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용두산 산자락에 위치한 가옥이나 건물 담벼락 아래 군데군데 나무 판자와 가마니 등으로 엮은 집들이 조성되었다가  51년 1.4후퇴 이후 이 용두산에 피란민 부락이 집단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용두산 공원에는 피란민 판자촌 1천 여 세대 뿐만 아니라 피란학교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피란시기 부산에 오늘날 초등학교라 부르는 당시 국민학교 24개교, 중학교 49개교가 피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당시 오늘날과 같이 중등 3년, 고등 3년 과정이 아니라 6년제 중학교로 운영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들 피란학교 가운데 서울 수송국민학교와 덕성여고, 정신여고 등 세 학교가 용두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앞 시간에 용두산 자락의 피란민 부락 규모가 일개 동 규모에 가까웠다는 소개를 드린 적이 있지요. 그래서 이곳 피란민 부락은 각 조별로 구획을 해서 오늘날 통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선발된 조장들이 있어 주민들에게 행정 정보를 통보하거나 주민 대표격 역할을 했답니다. 용두산에는 십 여개의 조로 구획되어 있고 화장실도 각 조별 공중화장실이 있었습니다. 당시 피란민 판자집들이 부엌과 화장실이 별도로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용두산 곳곳에 공중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했답니다. 용두산 십여 곳에 자리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인원 수가 주민 1천 8백 87명, 수송국민학교 학생 1천 3백명, 덕성여고 3백명, 정신여고 학생 2백명 등 무려 3천 7백명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덕성여고 피란학교는 지금 부산근대역사관과 동주여자고등학교 사이에 있었는데 학교 교실 창문 바로 밑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답니다. 당시 공중화장실이 요즘과 같은 수세식이 아닌 소위 퍼세식이라 부르는 노출형이거든요. 그러다보니 덕성여고 측에서는 악취로 인한 학습환경은 물론 여름철 위생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요. 그래서 주민들과 학교 당국의 양해 아래 학교 인근 개인주택 을 고가로 매입하여 이전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답니다. 이 가옥은 당시 싯가로 1백5십만원 정도 밖에 안되는 건물이었지만 3백5십만원을 지불하기로 했다고 해요. 이 비용을 덕성여고 측에서 2백5십만원, 학교가 위치한 9조 주민들이 모은 1백만원으로 해서 지불했는데 건물주가 건물을 비워주지 않았답니다. 여러차례 통보를 해도 응하지 않으니까 결국 1952년 6월 15일 시당국에서 강제집행에 들어갔지만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답니다. 

사실 5월달부터 화장실 이전을 기대하면서 거액의 비용까지 들였지만 2개월 동안 아무런 진척은 없고 날씨가 점차 더워지니 학생들이 매일처럼 악취에 시달려서 하루 1시간 수업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7월 중순에 이르러서 부산시 보건과의 도움을 통해 이웃한 10조 변소가 증설한다는 계획이 있어 우선 2~3일간 만 10조 변소를 이용하기로 하고 인부들을 불러 9조 변소를 매몰해 버렸답니다. 이런 상황을 뒤늦게 알게된 10조 조장과 주민들이 분격하여 큰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화장실 사용 인구가 배로 늘어나니까 용변 대기 순서도 배로 늘어서 10조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9조 조민들이 나서서 부서진 화장실을 복구하고는 주민들에게 별도의 용변권(당시 50전)을 나누어 주어 사용하게 하고 덕성여고 학생들은 이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답니다. 졸지에 화장실없는 학교가 되어버린 덕성여고에서는 서울시 교육국에 진정서를 넣어 해결방안을 호소하였다는 신문 기사가 있습니다. 

결국 갑작스럽게 불어난 피란민들에 대한 정부나 부산시의 대처가 미흡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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