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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 애국정신 이어받아 민족의 자존심 가져야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이후 항일운동 방향 의열투쟁으로 전환
김상진 기자 | 승인 2020.05.29 17:10

● 출 연 : 노상만 박재혁의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진 행 : 김상진 기자

● 프로그램; 부산BBS ‘부산경남 라디오 830’ 금요인터뷰

● 방송일시: 2020년 5월29일 금요일 오전8시30분

앵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곳이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입니다. 역사관이 어떤 곳입니까?

답)네, 1895년 5월 22일 창립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개성고등학교가 창립부터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조명해보고 현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모색하고자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곳이 바로 역사관입니다. 지금 학생들이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의 우리나라 여러 사정과 교육을 올바른 시선으로 평가함으로써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야 할 것인가를 사색해 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미래를 향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기위해 1991년 11월 23일 역사관을 개관했습니다. 역사관 규모는 약 300평이고, 보유 자료는 8,000여점으로 일제강점기시대 식민지교육 자료도 많이 보유하고 있고, 부산상업고등학교 시절의 상업 관련 자료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앵커) 박재혁 의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답)부산에서 최초로 초중고의 근대교육을 시작한 개성고등학교는 한국인이 한국인의 돈으로 한국의 인재양성을 위하여 한국인만 입학한 민족학교입니다. 제1회 학생들이 1910년 대붕회를 조직하여 한일강제병합을 반대하는 항일운동을 하여 퇴학당하는 등 일찍이 학교의 교풍이 항일운동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교사는 일본인이었지만 학생들은 한국인들만이 다닌 민족학교라 박 의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선배님들이 하루빨리 독립을 하여 국권을 찾아야되겠다는 민족애의 발로가 3세기를 거치면서 후배들에게도 그 정신이 이어져 우리학교 출신 독립유공자가 32분이나 되고 항일운동을 일으킨 사건이 19가지가 됩니다.박재혁 의사는 1915년 3월 제4회로 졸업했습니다. 우리 역사관 내 항일운동관이 3곳 있는데 박재혁기념관이 특별히 만들어져 있습니다.

앵커) 며칠 전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가 창립했는데요. 어떻게 해서 창립하게 됐는지 창립 취지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네,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창립이 많이 늦었습니다. 금년 9월 14일이 박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100주년이고, 내년 5월 11일이 순국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임에도 박 의사에 대한 선양사업이 그동안 미흡했습니다. 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동상 건립도 우리 동창회에서 노력하여 건립했습니다만 부산시를 비롯해 관련 기관이 다소 소극적이었지요.그래서 작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동창회에서 박재혁 의사 평전 발행과 모교 교정에 흉상건립, 박재혁 의사 기념관 개관을 서둘렀습니다. 앞으로 부산광역시, 국가보훈처, 지자체, 기념사업회, 그리고 사업회 회원과 뜻을 같이하는 유지들의 협조를 받아서, 더 큰 선양사업을 통해, 박재혁 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의 뜻을 받들고, 그 얼을 기림으로써 민족의 자존과 정기를 올곧게 세워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앵커) 기념사업회 구성은 어떻게 되는가요?

답)현재 개성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고 계시는 이경재 회장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전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하신 김영춘 국회의원, 최형욱부산광역시동구청장, 서은숙부산진구청장,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박철규관장, 법무법인 좋은 정희장 대표변호사, 주식회사 부일금고 박일국 회장, 주식회사 일광 백인종 회장, 광복회 회원이면서 부산항일학생의거 관련 전문가이인 이상국 대우조선해양 부장, 그리고 유족 대표로 박재혁 의사 여동생 박명진 여사의 손녀 김경은 여사 등 13명으로 이사가 구성되었고, 일반회원은 100여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회원은 계속 증가할것이라 생각합니다.

앵커) 앞으로 어떤 사업들을 펼치게 됩니까?

답)우리 사단법인에서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데요,현재 박재혁 의사 동상이 부산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데 시민들 접근성이 어려워 시내 도로변으로 이전하는 문제, 박 의사 생가가 부산 동구 범일동 183번지 좌천동 가구거리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 훈격 상향 조정 문제, 초중등 교과서 등에 활동사항을 수록하는 문제, 독립기념관 내에 어록비 건립, 정기적인 추모 행사와 학술교류, 기타 항일독립운동을 선양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연극, 오페라, 초중고학생들 백일장 등 숙원사업을 우리 법인과 관계기관, 시민들의 힘을 모아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앵커) 청취자 중에서 박재혁 의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건데요, 박재혁 의사가 어떤 분인지 자세히 소개해 주시죠.

답)네, 불꽃같이 살다간 청년 박재혁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동구 범일동에서 1남 1녀 중 3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박재혁 의사는 부산진사립육영학교 재학 중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 후 같은 부산동구 출신이며 외동아들들인 최천택, 오재영(오택)을 만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의형제를 맺고, 2학년 때 이들과 함께 일본이 금지도서로 정한 ‘동국역사’ 책을 등사하여 재학생들과 부산경남의 여러 학교에 배부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알리는 데 힘 썼습니다.  3학년 때는 구세단을 조직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두 차례 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심한 구금을 당하는 등 학생시절부터 이미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졸업 후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 차장으로 취업했으나 재학시절 항일운동 경력으로 해고당하고, 경북 왜관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곡물무역상에 취업 중, 1917년 6월 독립운동을 위해 주인으로부터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상해로 떠나 싱가포르, 홍콩, 부산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했지요.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원봉 단장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아주 악랄하게 취조하고 고문을 하는 등 악명이 높았던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고,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40분경 중국고서 상인으로 가장하여 고서를 좋아한다는 하시모토를 면담하고 책을 꺼내는 척하면서 폭탄을 내어, 유창한 일본말로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포를 잡아 우리의 계획을 깨뜨리는 까닭에 오늘 너를 죽이는 것이다.” 하고 폭탄을 내동댕이쳤습니다. 하시모토는 부상을 입었으나, 박 의사는 무릎을 크게다쳐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1심인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2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1921년 3월 31일 3심인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5월 5일 동지인 최천택이 면회를 갔을 때 어머님께 큰 불효이나 ”내 뜻은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가져온 계란 꾸러미를 도로 내밀며 ”왜놈의 손에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고 단식을 하고 있음을 말했다고 합니다.  단식 중 1921년 5월 11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순국시간이 11시 20분경이었는데, 12시에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굵고 짧게 생을 마감한 박의사께 정부에서는 1962년 의사의 공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좌천동 공동묘지에 있던 박 의사 유해는 1969년 10월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장 안장되었으며, 2008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앵커) 박재혁 의사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까요?

답) 박 의사가 1920년 9월 14일 거사를 일으킨 당일 당시 일제 신문사인 부산일보가 호외를 발행함에 따라 부산경남사람들은 알았으나, 3.1운동 이후 엄격히 언론이 통제되어 있던 시대라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 예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이 20일이 지난 10월 5일 이었습니다.그리고 단식으로 순국했음에도 매일신보, 동아일보, 독립신문 등에서 복역 중 앓고 있던 지병인 폐병으로 병사했다고 왜곡 보도한 것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되고,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짧은 생애라 박 의사의 독립운동 행적의 기록이 많이 없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 의사가 3대 독자로 후손들이 없음도 큰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대판매일신문<마이니치>, 대판조일신문<아사히>은 이번 사건의 범인은 부산 태생이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배일사상을 가진 것으로 보아 금 후 도저히 안심할 수 없다. 일선동화는 단념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 일본의 동화정책이 근본적으로 실패했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앵커) 올 9월이면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100주년이 되는데요, 어떤 사건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독립운동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11월 10일 김원봉이 의열단을 창단하였지요. 지금까지 독립운동은 점잖게 함으로 제대로 실제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다고 보고, 의열단은 무력을 동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폭탄제조를 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이 운동 목표로 선정한 소위 7가살(살인 대상), 5파괴(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외적중요기관)를 정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목표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기 위해 조선으로 무기 등을 보내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탄로가 나서 무기는 압수당하고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어 대부분 부산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악질 중 악질로 소문난 하시모토가 부산경찰서장이 아닙니까. 의열단 최초의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의열단은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김원봉 단장은 부산 출신이고 항일투쟁정신이 투철한 박재혁 단원에게 1920년 8월 31일 ”지금 곧 부산으로 가서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죽이되 그냥 죽일 것이 아니라 누구 손에 누구에 의해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깨닫도록 그의 죄를 밝히도록 합시다.“ 라고 밀명을 내렸습니다. 밀명을 받은 박재혁은 일본을 거쳐 9월 6일 부산에 잠입하고 폭탄은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시절 의형제를 맺은 동지 오재영(오택)에게 맡기고, 거사를 위해 역시 동지 최천택, 김영주 등과 함께 거사일을 택일하고자 틈을 노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박재혁이 부산에 잠입했다는 소문이 나자 일제경찰은 박의사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재혁은 빨리 서둘러야 되겠다고 느끼고 9월 13일 최천택과 함께 부산경찰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에 올라가서 부산경찰서를 탐색한 후 내려오면서 둘이서 마지막이 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그 다음 날 9월 14일 오후 2시 40분경 중국고서 상인으로 변장하여 서장 면담을 요청하고 하시모토 서장을 만나 김원봉 단장이 전한 말을 하면서 포탄을 터트렸습니다. 서장은 경상만 입고 박재혁은 다리를 크게다쳐 현장에서 체포된 사건입니다.적의 소굴에 들어가 서장을 처단함으로써 의열단 거사의 최초로 성공한 의거였습니다. 이 사건 연루자 최천택, 오재영, 김영주 등 6명은 박 의사가 끝까지 단독범이라 주장함으로써 기소유예로 풀려났지요. 박의사의 인간미와 동지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앵커) 박재혁의사 순국 이후 항일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답)박재혁의 투탄은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모색이 진행됐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의열투쟁을 결행하기 위해 1919년 11월 10일에 의열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의열단에 의해 계획된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 시도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는데, 조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의열단원 박재혁이 제2의 오사카로 불리는 부산에서, 부산경찰서장의 면전에서 폭탄을 투척했지요. 이 투탄은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위축되어가는 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고, 이후 1920년 12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1921년 9월 김익상 등의 조선총독부 투탄, 1922년 3월 김익사, 이종암 등이 상하이 황포탄에서 다나카 일본육군 대장 저격,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경과 총격전을 벌였고, 1923년 3월 김시현의 등의 두 번째 총독부 폭파 준비, 1924년 1월 김지섭의 일본왕궁 2중교 투탄,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일본 밀정 김달하 처단 등 크고 작은 의열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그리고 일제에게 조선통치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고, 조선인의 자주독립 정신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저항정신, 의열투쟁의 맥락을 민족사에 남겼습니다. 멀리는 안중근 의거로부터 박재혁 의거로 이어지는 항일투쟁의 국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현재 우리들이 이어받아야 할 박재혁 의사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자신의 목숨보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되겠지요. 광복이 된지 75년이 지났으나 일본은 아직도 수출규제, 화이트리스트 배제, 하늘 길 규제, 왜곡된 역사교육, 독도영유권 제기 등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고, 일본 우익과 언론들은 혐한을 일삼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며 지금도 식민지 취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과거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고 글로벌시대에 더불어함께 살아가되 민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되며, 모든 면에서 반드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역사교육은 자자손손 이어가야 되겠습니다. 단제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세계를 리드하는 대한민국이 통일조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앵커) 끝으로 청취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네, 오늘 불교방송국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리고, 끝까지 청취해주신 청취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35년간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도록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오늘의 대한민국은 조국 광복을 위해 항일투쟁에 몸 바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위에 건국되었다고 생각합니다.따라서 우리는 늘 이분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순국선열에게 소홀을 넘어 무관심까지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계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고 도와드리고 예우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끝)

 

 

 

김상진 기자  spc5900r@bbs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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