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용두산 일대 피란민들, 대부분 원산 등 북한에서 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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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1930년대 용두산신사 전경(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서 초량 168계단 일대 초기 피란민들의 주거를 설명드리다가 지난 시간에 판자집을 짓는 재료를 소개해주셨는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실른지요?

-소위 하꼬방이라 부르던 판자집과 바락집이라 부르던 날림주택, 그리고 종이에 골타르를 바른 루핑지를 집 재료로 사용했던 이야기들을 들려 드렸는데요.

피란시절 당시 미군들이 촬영한 부산지역 사진들을 살펴보면 막대기같은 것으로 중심을 잡고 그 위에 가마니 만 둘러씌운 집들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1951년 9월 프랑스 주간신문에 난 사진을 보면 용두산공원, 지금 공원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에 자리했던 피란민 가옥의 경우 땅을 어느 정도 파서 그 위에 막대기를 세우고 판자나 종이박스를 둘러싼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 땅속이 지표면보다 다소 따뜻하기 때문에 겨울을 나기위한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 같은데 이런 경우는 마치 원시 움막집과 같은 구조였지요. 지금은 복개가 된 중구와 서구의 경계가 되는 보수천의 경우 하구쪽이 하천폭이 다소 넓었는데 이 하천바닥에 가마니로 둘러싼 움집같은 가옥에 거주한 피란민들도 있었습니다.

1948년 용두산공원 항공사진_신사가 불탄 곳에 미군 장교클럽이 들어섰다(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지난 시간 방송내용과 함께 사진이 올려져 있는데, 하천바닥이라면 큰 비가 오면 삽시간에 물난리가 나는 곳인데 그런 곳에도 사람이 거주했다는 겁니까?

-정말 위험천만한 장소지요.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밤중에 폭우가 내려서 집이 쓸려 내려가면서 사람이 다쳤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우암동 소막마을의 경우에는 처음에 소막사를 정비해서 피란민 거주지로 사용하다 워낙 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드니까 인근 공터에 군용 24인용 천막을 쳐서 수용했는데 그것도 부족하니까 가운데 막대기로 기둥을 세운 삼각형 가마니 움막을 만들어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습니다만 우암선 철로가 지나던 문현동 철길마을의 겨우에는 1980년대까지도 철로와 집이 거의 2미터도 채 안되는 곳에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답니다.

영도 대평동, 요즈음 ‘깡깡이마을’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여기서는 폐선박 사이에 거처를 마련해서 살기도 했답니다. 배는 하부가 잘록하게 들어간 형태이니 두 배 사이 아래에 공간이 생기잖아요 위에 가마니나 천막으로 덮으면 비가 새지 않고 앞 뒤로 가마니로 막으면 임시거처가 되는 거지요. 제가 아는 선배 한 분이 그곳에서 태어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열차운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일부 피란민들은 철로 한쪽에 세워둔 객차나 화차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기도 했답니다.

좌천동 일신병원의 한국전쟁 당시 아이들의 출생기록을 보면 주소가 막연히 부산역이라 기록된 아이들이 꽤많았다고 합니다.

1951년초 부산 남구 우암동 피란민수용소(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온 시기가 몇차례 나누어 질텐데 초기에 오신 분들 보다 뒤에 오신 분들이 집 마련에 큰 고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들어온 시기를 보면 1차 한국전쟁 발발직후 온 분들이 있고, 2차는 전쟁 초기 적치하에 시달리다 부산이 안전하다고 믿고 오신 분들이 있고, 3차가 51년 1.4후퇴 당시 특히 북한지역에서 대거로 오신 분들이 있고, 그 다음이 1.4후퇴 당시 북한지역에서 철수하면서 많은 피란민들을 제주도나 마산, 거제도 등지로 보냈는데 이 분들 가운데 그곳에서 생계가 안되니까 부산으로 오신 분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어촌이나 시골지역은 자기 땅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부산에는 부두가 있으니 부두 노동일, 공장이 있으니 기술은 없어도 허드렛 일로, 아니면 부두나 역 등지에서 지겟짐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니까요.

1951년초 용두산자락의 피란민 움막집들(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산의 지형이 배산임수형,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바다가 있는 이런 지형이다 보니 해안에 면한 평지는 대부분 부두로 사용하고 있으니 마땅히 집을 지을 곳이 없으니 결국 뒤늦게 들어오신 분들이 하천바닥이나 아니면 초량 168계단 일대나 영주동, 보수동과 같은 산자락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1954년 봄 부두에서 바라본 용두산 피란민부락(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용두산공원, 지금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공간이지만 여기에도 피란민 부락이 형성되었다면서요?

-6·25한국전쟁 당시 용두산은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이 지은 판자집들이 이 산의 정상까지 난립하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1,093채의 피란민 가옥이 마치 갯바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당시 용두산 일대 피란민들은 대부분 원산 등 북한지역에서 피란을 내려온 사람들이었는데 이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국제시장 일대를 생계터로 삼으면서 생활했는데 이 용두산공원에 거처를 마련했던 피란민들이 국제시장을 일군 1세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오늘 마무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용두산 소개를 잠깐 드리고 다음주에 용두산공원에 자리했던 피란민부락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용두산은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이 부산에 조성한 제1호 공원입니다. 1915년에 당시 부산상업회의소에서 일본정원주식회사에 용역을 주어 조성했는데 1916년 10월 17일 용두산 일대 1만2천평이 공원으로 지정됩니다. 물론 초량왜관 시절부터 이 산에 일본신사가 있었지만 공원으로 조성한 뒤로 신사를 거대하게 만들고는 신성불가침 구역으로 만듭니다. 공원 조성 이후에 매일 오전 10시면 이곳 신사에서 정천제(正遷祭)를 거행했는데 이 시간이면 각 관공서에서는 공워 신사방향으로 요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전차도 광복로를 지나면서 신사 아래를 지날 때면 ‘신사전’이라고 큰소리로 말하면 승객들이 서서 요배를 하도록 했다고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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