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산성교회 도로 건너편 집들 흔적 생생"

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designed by 이효재

●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1951년 부산 부산진구 부암동 미군 하얄리아부대 밖 군수품 나무상자 판매점(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 지난 시간에 피란수도 부산 당시 피란민들이 살았던 집, 즉, ‘하꼬방’, ‘바락집’이라 표현하던 집들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오늘은 그 부분을 이어서 소개해주시죠?

-어시장이 인근에 있었던 서구, 영도구, 중구지역에 판자집을 지었던 분들은 대부분 생선을 담는 나무상자를 구해서 집의 벽체를 꾸미는데 사용했다고 소개를 드렸지요.

피란수도 부산 당시 부산 곳곳에 미군과 연합군 부대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교들이 군에 징발되어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들 미군이나 연합군 주둔부대 인근에는 거주했던 피란민들이 의외로 집을 지을 재료 구하기가 쉽기도 했습니다.

1952년 보수천 하구의 피란민 움막들(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왜 그렇습니까? 군인들이 재료를 갖다줬나요?

-아닙니다.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다보니 엄청난 군수품들이 부산항으로 들어오는데 각 지역에 주둔한 군부대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군수품들이 매일처럼 도착합니다. 대부분 군수품들은 부피가 크거나 무겁기 때문에 우든박스, 즉 나무판재 등으로 외부를 감싼 채 수송되어 이동합니다. 각 부대에 도착한 군수품들을 사용하기 위해 포장재료를 뜯어내는 과정에 엄청난 양의 목재가 폐기물로 나오지요. 

그래서 군부대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산사람들이 군수품 담당자에게 이 군수품 포장 목재들을 받아와서 판자집을 지을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거지요. 그래서 피란을 내려오신 분들이 부두 노동일이나 허드렛 일 등으로 번돈으로 이들 판재를 사와서 판자집을 지었던 겁니다. 

1954년 부산 남구 우암동의 종이박스 등으로 지붕과 벽체를 만든 피란민 주택(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나무 판재로 집의 뼈대는 만들 수 있지만 틈사이로 들어오는 비나 바람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일단 군수품 상자를 해체한 뒤에 나오는 나무 판재로 집의 틀을 만들고 나면 이제는 군수품 상자 가운데 종이박스를 구해옵니다. 군수품  종이박스를 모아서 벽체나 지붕의 방풍과 보온재료로 사용합니다. 종이박스로 마갑한다는게 이해가 안되시겠지만 당시 군수품이나 구호품을 담았던 종이박스들을 보면 식물성 기름이 코팅된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적을 해서 비를 맞아도 박스종이가 쉽게 흐트러지는, 즉 해체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러니 이 종이박스로 벽체나 지붕 외관을 감싸면 어느 정도 시간 동안은 견디는 거지요. 그러다 종이박스가 너덜거리면 다시 그 위에 겹쳐서 붙이는 겁니다.

부산 동구 매축지마을 지붕의 여러 세월 흔적들 모습(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민들 입장에서 우선 비바람을 피할 응급처치격인 판자집이라 해도 그 부실한 재료로 버텼다는 것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당시 그런식으로 지은 집들이 현재 남아있는 곳이 있나요?

-네, 지금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산성교회 도로 건너편에 있는 집을 살펴보면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작년까지 확인했는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위쪽 산자락에 있는 가옥이 지붕에 사용된 판재가 당시 일본에서 부산으로 보낸 군수품 상자를 해체한 판재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초 종이박스시장. 미군 구호물품, 레이션박스 등이 기름을 먹인 종이로 제작된 박스여서 지붕이나 벽체 재료로 사용되었다.(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시절 이후 지금까지 70년 세월동안 건축자재들이 상당히 발달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그런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집이 견뎌졌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에 비밀 아닌 비밀이 있습니다. 소위 하꼬방이라는 판자집을 만들었으니 기둥이나 벽체가 부실하지요. 지붕 역시 부실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붕이나 벽체로 비가 새거나 찬바람이 들어오게 되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벽체나 지붕용 건축자재들이 매우 발달합니다. 그런데 이 집을 완전히 허물어서 새로 짓지 않을 경우 그저 보완하는 수준으로 지금까지 세월을 버텨온거지요.

지붕이나 벽체의 경우 기존의 것을 헐어내고 새로운 자재로 대체하면 집이 그냥 주저앉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집의 뼈대를 받쳐주는 기둥감이 부실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붕을 수리하면서 기둥을 좀더 튼튼한 것으로 이음하여 보완하고 지붕에는 새로운 재료를 얹는 방식으로 벼텨온 것입니다. 그래서 피란 당시 지은 집들 지붕을 살펴보면 초기에 얹었던 판재가 보이고, 그 위에 천막지 같은 재료가 나타나고 그 위에 소위 루핑지라 부르던 1980년대까지 빈민촌에서 사용했던 재료가 나오고 그 위에 스레트, 그 위에 요즈음 많이 쓰는 경량철골재들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가옥의 보급품 상자 판자로 이은 지붕(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시절에 지었던 집의 원형을 찾으면 그 속에 세월에 따른 건축자재의 역사도 보인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특히 1950년대 개발되어 1960~70년대 산동네 하꼬방이라 부르던 집들이 많이 썼던 루핑지는 정말 초인기 재료였습니다. 이 루핑지는 롤로 된 두터운 마분지에 콜타르를 바르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서 마치 장판지처럼 둘둘 말아서 롤로 판매했던 지붕재료인데 이것으로 지붕 뿐 아니라 외부벽체도 감쌌습니다. 비록 종이지만 콜타르를 발랐기 때문에 방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 놓아서 날씨가 더워 콜타르가 약간 끈적거려도 모래로 인해 서로 붙지 않는 겁니다.

당시 피란을 내려왔던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벽지는 신문지로 방바닥은 가마니를 깔고 살았는데 이 가마니가 처음에는 까칠해서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볏짚 끝이 살을 찌르곤 해서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질반질해져서 마치 융탄자 같았다고 해요.

1952년경 영도대교 아래 피란민 판자촌(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