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초량 168계단, 사연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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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 지난 시간에 피란수도 부산이 오늘의 부산을 일군 역사적 원동력이 있다고 소개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떤 내용을 이야기 해 볼까요?

-오늘부터 당분간 피란시기에 형성된 부산지역의 피란민 마을들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열흘쯤 전 부산지역의 한 일간 신문 1면 머릿기사에 이렇게 나온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겁니다.

“위기 때마다 빛나는 부산시민정신”

이날 아침 신문을 펼쳐들고 이 내용을 본 순간 저는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방송을 듣고계시는 분들도 다들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금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많은 분들이 실의에 빠져 계신 모습을 저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3일 이후 4개월이 넘도록 국민들 뿐 아니라 정부조차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연일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날 누군가 어려운 세입자들을 위한 임대료 인하라는 ‘착한 임대료’를 제안 하면서 많은 분들이 이에 동참하면서 마치 십시일반하듯 어려운 상황을 서로 이해하고자 하는데 전국적으로 부산에서 착한 임대료 동참인원이 가장 많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역시, 부산이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빛나는 부산정신‘은 멀리 임진왜란 시기부터 나타납니다. 임진왜란 발발 첫날 부산진전투에서 많은 시민들이 부산진 성안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군인들과 함께 싸우다 장열히 전사했을 뿐 아니라 동래성 전투에서는 관기들까지 나서서 성내 건물 지붕 위에서 왜적들에게 기와장을 던지면서 끝까지 저항한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수도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산자락 비탈을 밭으로 일구어 생활하던 지금의 산복도로 일대 원주민들이 스스럼없이 피란민들의 거처로 내주었고, 1.4후퇴 이후인 51년 11월에는 부산시 사회과에서 피란민들을 위한 방 비워주기 운동을 펼쳤을 때 많은 부산시민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피란민들을 위해 방을 내주어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79년 부마민중항쟁 당시에는 시내 전체가 최루탄 가스에 휩싸여 시민들 뿐 아니라 도심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 연일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시위대에게 빵과 우유, 김밥 등을 건네주면서 격려하던 일들이 엊그제같이 눈에 선합니다. 이런 시민정신, ’위기 때마다 빛나는 시민정신‘이 오늘의 부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초량 168계단 일대의 변화 비교 사진(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지금부터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산복도로 권역의 대표적 마을인 초량 168계단 일대를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이곳 옛 계단 옆의 가옥 몇 채를 사들여 모노레일을 만들고 아래에서 위로 연결된 집과 집사이를 드나들면서 방문객들이 자연스레 어려웠던 피란시절 부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시재생과 더불어 문화마을만들기의 일환으로 조성된 곳이라 보시면 됩니다.

동구 초량동 초량초등학교 바로 뒷편에 위치한 이 일대를 1945년 8월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살펴보면 가파른 지형에 마치 남해 다랭이 마을과 같은 다락밭, 즉 경사지형에 밭들이 계단처럼 차곡차곡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으로 내려온 마땅히 갈 곳없는 피란민들이 좁은 지형에 길게 늘어선 밭자락 위에 하꼬방이라는 판자집을 지으면서 주거지로 형성된 곳이지요. 이렇게 계단형으로 차곡차곡 늘어선 곳 가운에 사이로 계단을 낸 것이 그 수가 168개가 되니 오랫동안 초량 168계단이라 불렀던 겁니다. 

이곳에 주거를 마련하게 된 상황을 살펴보면 결국은 슬픈 사연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작은 지혜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바로 아래 부산항과 지척거리에 있다보니 부두 일용노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답니다. 당시로는 이 일대 아래에 2층 건물조차 없던 시절이니 여기서 멀리 오륙도 방향에 배가 들어오는 것이 훤히 보입니다. 집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들어오는 배가 부두 노동자들의 일거리가 되는 군수품이나 잡화 등을 실은 배가 들어오면 서둘러 챙겨서 내려가면 배가 부두에 닫는 시간에 맞춰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요즘 생각하면 아침 일찍가서 기다리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일감도 없는데 빈지게를 지고 부두에 우두커니 있어 봤자 끼니 때가 되면 배만 곪고 사람도 기운이 빠지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영주동 산자락이나 초량 168계단 지역은 부두노무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던 피란민들에게는 일감에 맞춰 움직이면 되니 더없이 좋은 주거환경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 일대 이야기를 엮어보면 이런 스토리가 됩니다. 집을 짓기는 했지만 판자쪽이나 천막 조각, 종이박스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이니 툭하면 비가 새거나 찬바람이 들어오니 아버지는 눈 만 뜨면 집을 수선해야 했지요. 게다가 상수도가 없으니 어머니는 종일 물동이를 이고 공동수도나 산자락 개울에 물을 길러 가시면서 아이들 보고는 배가 들어오나 잘 봐라 고 당부를 해 놓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오륙도 쪽을 바라보다 ‘아부지, 배 들어오는데요~’하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다 위에 항내로 들어오는 배를 보면 그 배가 자신의 일감과 연관이 있는 배인지 살펴보고는 아니다 싶으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일감이 실린 배다 싶으면 씻고, 지게를 챙겨서 내려가면 되었던 거지요.

● 앞서도 조금 언급을 해 주셨는데요. 당시 피란민들이 살았던 집에 대한 표현이 기록들을 보면 ‘하꼬방’, ‘바락집’과 같은데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

-하꼬방의 ‘하꼬’는 상자를 뜻하는 일본어인데 집이 집이 아니라 마치 큰 상자 하나 놓아 둔 것과 같은 형태라는 의미가 되구요, 바락집은 바라크는 영어로는 ‘주둔군을 위해 지은 막사’라는 뜻으로 일종의 임시거주처라는 의미입니다. 거의 무일푼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의 입장에서 우선 비바람을 피할 거처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시내 평지 지역을 대부분 건물이 들어서 있거나 땅주인들이 어느 정도 위세를 하는 사람들이니 엄두를 못내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눈치가 있는 사람들은 이면도로 남의 집 담벼락 아래, 통행이 가능한 정도의 여유는 두고서 집을 짓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서구의 천마산 자락이나 중구의 보수동, 동광동, 영주동 산자락, 동구의 초량동, 수정동 산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대부분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의 소유 땅이거나 혹은 국유지 등인데 일부 사유지에는 땅주인이 거의 거저 주다시피 적은 월세로 땅을 내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현 롯데 광복점, 즉 옛 부산시청 뒤편에 어시장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가서  생선을 담는 나무상자를 모아오거나 사와서 벽체를 만드는데 사용하고 산에 가서 기둥감이 될만한 나무를 베서 집의 틀을 만듭니다. 그러고는 가마니 따위로 휘감으면 그냥 집이되는 거지요. 대부분 2~3평, 커봐야 4평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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