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서관 320호.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공범으로 지목된 공익근무요원 강 모 씨의 두 번째 공판이 열렸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의 법정. 하지만 강 씨가 미리 제출한 반성문을 읽던 재판장은 갑자기 실소를 터트렸다. 반성문엔 “판사님이 교정시설에 수용되어본 적은 없겠지만…”, “범죄와 관계없는 가족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등의 문구가 담겨있었다. 웃음기를 거둔 재판장은 단호했다. “이렇게 쓴 반성문이라면 내지 않는 것이 낫다”. 내용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변호인은 “표현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수습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싸늘해진 후였다.

반성 없는 강 씨의 반성문을 취재하며, 문득 ‘우리가 박사다’라는 이름의 텔레그램 대화방이 떠올랐다. 대화방에 참여한 2백 여 명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성 착취물 관람의 자유를 외쳤고, 조주빈을 불법 수사의 피해자로 여겼다. 조주빈과 강 씨, 그리고 그들을 수호하는 수 백여 명의 박사방 참여자들에게는 반성과 부끄러움 따윈 없었다. 녹색 수의를 입은 강 씨에게서 머지않아 똑같은 법정에 설 조주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체포 직전까지 박사방 회원들에게 “내가 있는 국가는 수사가 안 된다”고 말했다던 조주빈. 사실, 지난 10년간 음란물 제작배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 가운데 82%는 벌금 혹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또, 불법 촬영 혐의를 받는 사람들 중에는 8.2%만이 실형을 선고 받았을 뿐이었다. 성범죄자들에 대한 허술한 처벌 시스템이 조주빈 일당과 같은 괴물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던 셈이다. 조주빈이 대화방에서 국가의 수사를 거론하며 위세당당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N번방 사건으로 온 사회가 뒤집히고 나서야 관련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성범죄, 특히 최근 활개 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를 엄단 할 수 있는 키(Key)는 법원에게 쥐어져 있다. 경찰이 아무리 수사를 잘해도, 또 검찰이 구형량을 최고치로 높여도 결국 형량에 대한 최종 결정은 법원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오는 20일 회의를 열어,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논의한다고 한다. 점점 더 교묘해지는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폭주를 막을 것인가, 아니면 제2의, 제3의 조주빈을 또 만들어낼 것인가.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결정에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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