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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험지' 출마 후보들의 '고군분투'
류기완 기자 | 승인 2020.04.11 14:09

  선거철만 다가오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험지(險地). 평소 듣기조차 힘든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험난한 땅이지만 선거판에서는 말 그대로 당선이 좀처럼 쉽지 않은 지역을 의미한다. 누구나 꺼려하는, 누구도 원치 않는 곳을 자원해서 나서는 이는 언론의 주목은 물론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힘든 고생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시는 여의도로 돌아올 수 없다는 불안감을 떠안은 채 기울어진 선거판에 뛰어드는 이들의 결정을 두고 당 지도부는 용기 있는 결단이라 평가하고, 주변 선·후배 의원들도 열렬한 박수와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이다. 오죽했으면 당 지도부의 험지 출마 요청에 반발해 수십 년간 몸 담았던 당적을 포기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까. 그만큼 정치적 사망선고에 가까운 결정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도 험지에서 '고(苦)'의 길을 선택한 후보들이 있다. 가까운 서울 일대에서 찾아보면 서초·강남벨트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이 그러하다. 한 후보는 당 원내대표의 지원 유세를 따라온 기자들에게 "당 지도부 차원에서 선거 유세를 도와준 건 33년 만에 처음"이라며 조금 과장됐지만 어느 정도 뼈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떨어지면 도전하고 떨어지면 도전했던 게 어느덧 3번 째 도전이 됐다는 후보의 말에 불현듯 외로운 세월이 느껴졌다. 앞선 첫 출마 당시의 무모함도 두 번 째 출마 당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꿔보겠다는 강한 의지도 미미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선거 유세 중 허리 굽힌 90도 인사가 지역민들에게 외면 받는 건 다반사다. 심지어 지나가는 어르신들에게 '빨갱이'라며 손가락질 받는 것도 익숙하다. 때문에 소속 정당을 등에 업지 않고 오롯이 지역 주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 해결만을 고민한 결과물이 고스란히 후보의 공약에 담겼다. 당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다면 인물로라도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가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소위 '텃밭'에 전략 공천으로 꽃가마 타고 안착한 후보들과는 달라보였다.

 수도권 지역 가운데 '일산벨트'라 불리는 고양 갑·을·병·정은 지난 총선에서 진보 진영이 싹쓸이를 한 곳이다. 심지어 고양갑 지역은 유시민 전 의원과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차례로 국회로 보내며 진보성지로도 일컫는 곳이다. 김현미, 유은혜 장관도 이 지역을 기반으로 19, 20대 연속 국회에 입성하며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 말 그대로 통합당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과 엎치락 뒷치락하는 이 지역 통합당 후보들의 선전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 현역 의원들이 불출마한 자리를 전략 공천으로 메웠지만 선거 전부터 일정 기간 지역 민심을 다져왔던 도전자들의 거센 공세에 수성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더욱이 급하게 전략 공천 받은 후보가 해당 지역의 특성과 민심을 가르는 이슈에 둔감하기까지 하다면 선거 당일까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대 후보에 맞서 지역에 대한 진정성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얘기다.

 지역구에서 소속 정당은 외면 받아도 인물로 승부를 걸겠다는 도전자들의 진정성에 종종 '험지'에서도 이변이 발생한다. 고통과 인내가 클수록 이후 찾아오는 열매가 달콤하듯이 정치인들의 험지 출마는 분명 도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가 단숨에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던 것처럼. 이 밖에도 선거판에서 안정을 포기하고 도전을 선택한 이들의 성공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아쉽게도 많은 정치인들이 험지 출마 당시 반짝하고 국민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졌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선거 유세 현장 취재를 통해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과거 투표용지에 이름은 보지도 않고 번호만 보고 찍고 나오겠단 얘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요즘은 유권자 저마다 각자 후보를 지지하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한다. 인물보다는 당에 얽매이는 풍토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우리 지역을 위해 어떤 인물이 좋을까에 대한 저마다의 진지한 고민이 표심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유권자의 의식 수준이 점점 성장한다면 정치인들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더욱 험지로 뛰어들지 않을까.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일도 머지않아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모하다시피한 도전이 끝끝내 한국 정치 지형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중물이 됐듯이 총선에서 험지를 극복하고 당당히 여의도에 입성하는 후보들이 늘길 바란다. 그들이 여의도 정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국민들의 정치 혐오와 환멸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길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며 한표 한표의 무게감을 느껴본다.

류기완 기자  skysuperman@bbs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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