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연 : 안종국 제주불교신문 기자

● 진 행 : 이병철 기자

● 2020년 4월 6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코너명 : 한주간 교계뉴스

[앵커멘트]

지난 3일은 제주4.3 72주년으로, 평화공원에서는 150명만 참석하여 추념식이 열렸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2년마다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는데요, 제주불교계로서는 4.3사건으로 크나큰 희생을 치렀던 만큼 의미가 깊은 날인데요, 제주불교신문 안종국 기자를 연결해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종국]안녕하세요?

[이병철]4.3 희생사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4.3의 해결은 결코 정치와 이념의 문제로 보면 안된다고 추념사에서 밝혔다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제주4.3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태도의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치유해 나가는 ‘정의와 화해’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화해와 상생은 이념의 적대가 낳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국가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임이 분명하며, 국가의 폭력적 수단이 동원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병철]우리 불교계는 당시 해방 이후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불교의 자주화를 도모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위한 불교적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고, 4.3이 발발하자 무자비한 서북청년단과 공권력의 행태에 분노하여 일부의 스님들이 입산하여 무장대를 지원하기도 하였잖습니까? 이를 두고 이념적 잣대로 바라보거나 일방적으로 매도된 이러한 부분도 평화와 화해의 완성을 위해서는 불가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지난 72년간 우리나라 분단의 역사에서 극단적인 이념적 대결로 인해, 4.3에서 제주도민이 열망했던 진정한 독립과 외세의 지배가 아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을 좌익폭동으로 덮어씌운 측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중에 두 번이나 4.3추모식에 참여한 대통령으로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고, 왜곡된 4.3의 진상규명과 이를 바탕으로 화해와 평화의 길을 만들어 나갈 때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병철]우리 제주불교계도 4.3사건으로 희생되신 스님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토벌대에게 쫓긴 마을 주민들을 숨겨 주었거나, 소개령 당시 절을 지키다가 희생당하신 것이잖아요?

[안종국]그렇습니다. 제주4·3사건으로 조사된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의 16명의 스님인데요,

이성봉 스님의 경우에는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청년을 숨겨주고 있었는데, 그 청년을 뒤따라온 토벌대가 청년의 행방을 물었으나 스님이 모른다고 하자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성봉 스님은 본래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로 1937년에는 두 달에 걸친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하여 제주도 순회포교를 실시하였고,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검사위원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또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한 분으로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대단히 혁신적인 활동가였습니다. 이러한 훌륭하신 스님이 1949년 10월 4.3의 와중에 무자비하게 6발의 총탄에 총살당한 것입니다.

[이병철]함덕에서 신홍연 스님도 마을사람을 숨겨주었다가 희생당하셨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신홍연 스님은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를 창건하신 분인데, 4.3당시 토벌대가 무자비하게 살육을 벌이자 함덕리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피해 절에 숨어서 몰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수색에서 발각되어 신홍연 스님은 귤나무에 묶인 채 마을 청년들로 하여금 죽창으로 스님을 찌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곳곳에서는 토벌대가 산에서 잡혀온 사람들을 마을사람들, 심지어 부녀자에게도 죽창을 쥐어주고 찌르게 하였다고 하니 가히 인면수심의 잔혹한 현장이 따로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희생된 신홍연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는데, 가부좌 상태로 굳어 있어서 시신을 펼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을 상좌이신 김두전 스님이 기도를 하자 몸을 풀어 매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병철]4.3의 광풍이 정말 비극이 따로 없었군요? 당시 희생되신 스님들은 주로 불교혁신을 주도했거나 해방된 정국에서 자주적인 단일국가, 즉 분단을 반대하신 분들이 많았죠?

[안종국]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몇몇 스님을 살펴보면, 백인수 스님는 용장사 승려로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을 역임했고,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된 분입니다. 해방정국에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셨고, 민족문제에 매우 적극적인 분이고, 신도들과 마을 주민들에게도 매우 신망받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인수 스님는 1949년 1월 6일 토벌대의 도평마을 집단 학살로 처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병철]이일선 스님도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분이셨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이일선 스님 스님의 경우에는 1950년 예비검속되어 산지천 앞 바다에 수장된 분인데요, 이일선 스님은 선운사에서 출가 백양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에 내려온 이후 제주에서 활동하셨습니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였고,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서 친일을 반성하여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신 분입니다.

특히 이일선 스님은 4.3사건의 기폭제가 되는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선전동원부에서 활동하였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3인의 의장단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력이 있었는데도 1950년까지 활동하였던 것은 상좌인 김우송 스님이 헌병장교였기 때문에 이 김우송 스님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병철]이일선 스님은 왜색불교를 정화하고 3.1절 투쟁을 주도한 스님이군요.

[안종국]이일선 스님은 강연과 선전선동 활동에 매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분입니다. 이론과 논리가 정연했고, 철저한 민족자주주의자로 분단을 반대하던 정말 애국주의자였지만, 이렇게 뛰어난 분을 토벌대가 그냥 두어선 안되었겠죠.

[이병철]일본으로 도피하신 스님도 계셨죠?

[안종국]네. 고인봉 스님은 은수사 주지였는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1950년 앞서 이야기한 이일선 스님이 예비검속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급거 피신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일본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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