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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뉴스와사람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불교학의 고향인 카슈미르.간다라 지역과 유대 가졌으면"
김봉래 기자 | 승인 2020.02.18 09:33

 

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권오민 교수(경상대 철학과)

방송 : 2020년 2월 16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의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대승불교권인 우리 한국불교에는 인도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전래된 여정에 따라서 다양한 불교문화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불교의 기원은 어땠는지, 그 원형은 어땠는지 알고 싶은 욕구가 늘 있는데요. 실크로드를 비롯해서 오늘날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권 지역의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폐허 속에서 옛 영화를 상상해보는 것은 설레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 이 시간에는 아비달마 전공자로서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역 순례를 다녀와서 순례기를 펴내신 분이죠, 경상대 철학과 권오민 교수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역 불교유적순례를 다녀오셔서 순례기를 펴내신 경상대학교 철학과의 권오민 교수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권오민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권오민 : 예. 안녕하십니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봉래 : 네. 제가 소개해드리기를 불교의 철학적인 해석이랄까요, 아비달마 전공자다 이렇게 소개해드렸는데, 각 부파마다 불교에 대한 해석이 많이 달랐잖습니까. 그래서 아비달마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그것이 인도의 대승불교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뿌리가 됐었는데, 최근에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역 순례를 다녀오셨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다녀오시게 되셨는지요.

 

권오민 : 소개해주신 대로 저는 아비달마를 주로 공부하고 있는데, 먼저 아비달마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있었어요. 대개 소승이라고 일컬어져서 간단한 소개를 좀 해드려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부처님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한테 의지해야 하느냐, 그 때 부처님의 유훈이 있죠. 혹 아십니까.

 

김봉래 : 어. 그럼요. 법(法)에 의지하고 율(律)에 의지하라.

 

권오민 : 혹은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그러니까 당연히 법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하죠.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 즉 교법이라든지 혹은 깨달음을, 나아가 그의 말씀을 집대성하고 그것을 해석해서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것인가 하는 그 방법론까지 정리를 해야 하죠, 이제. 그 같은 법에 대한 해석 체계가 아비달마입니다. 불교의 가장 원형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비달마라고 하는 그 불교가 대개 인도에서는 서북부 굉장히 오지인데, 서북부 변경 지역인 카슈미르에서 발전을 했습니다. 카슈미르은 사실 아비달마교학의 본산입니다. 그래서 대개 아비달마에 대한 해설사, 그러니까 해설하는 분들, 해설을 비바사(毘婆沙, vibhāṣa)라고 하고요 그 같이 전문적으로 해설하는 분들, 논사들을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바이바시카(Vaibhāṣika)라고 그럽니다.

 

김봉래 : 스승사(師)자를 썼죠.

 

권오민 : ‘사’자는 그룹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권오민 : 바이바시카, 대개 한자로는 비바사사(毘婆沙師)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그 비바사사, 바이바시카의 본산이 카슈미르입니다. 또 간다라는 카슈미르 바로 인접국입니다. 물론 피르판잘이라는 큰 산맥이 있지만, 바로 인접국이고.

 

김봉래 : 동서남북으로 치면.

 

권오민 : 서쪽입니다. 카슈미르 서쪽이 바로 간다라입니다. 세친이라든지 수많은 불교논사들의 고향이 간다라거든요. 그래서 제가 읽고 연구하는 문헌들 이른바 아비달마라 할지, 사실 뭐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지도론>이랄지 혹은 <유식론>이라 할지 그런 대승 논서도 간다라에서 저술되었습니다. 제가 읽고 연구하는 그런 문헌들은 거의 다 카슈미르, 간다라에서 생겨났어요. 그래서 한 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읽고 연구하는 논서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쉽게 가 볼 수도 없는 것이, 사실 그 지역이 알다시피 분쟁지역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은퇴하기 전에 한 번은 가봐야겠다 해서 2015년 여름방학 때 그 지역을 답사하였고, 이후 그곳에서의 기록들을 불교계 신문에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것을 작년에 책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책에 보면 고대인도의 서북부 변방 지역에 위치해 있던 카슈미르, 간다라 이 두 곳이 불교학의 고향이다 이렇게 책 제목이 되어 있거든요. 아까 말씀하신 그런 부분하고 중첩되는 그런 내용일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 쪽에 보면 불교가 사라진 비운의 땅이다, 이렇게 또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실제 가셔서 어떤 감상이랄까 그런 게 참 궁금해요.

 

권오민 : 먼저 불교학의 고향이라는 그 말에 대해서 해명이 좀 필요한데요. 불교학의 고향이 어딜까요? 물으면 대개 인도라고 하지요. 그런데 인도라는 나라가 서유럽만큼 넓은데, 대개 철학의 고향 그러면 아테네, 그리스 아테네인데. 불교학의 고향은 어딜까? 사실 상당히 막연하거든요.

 

김봉래: 날란다라고 하는 불교승원이 있지 않습니까.

 

권오민: 날란다라고 하는 승가대학은 불교학의 본산이 맞습니다. 그런데 날란다는 5세기 6세기 지나야 비로소 역사상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돌아가시고부터 천년 동안은 어디였을까요? 불교학의 고향이 없어져 버렸어요. 없어진 이유는, 뭐 인도 땅에서는 이미 1,000년 전부터 불교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학의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불교학에서 연구되는 거의 모든 문헌들은 이 카슈미르 지역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탄생했던지, 또는 이 곳을 거치게 됩니다. 먼저 역사상 남아있는 확실한 증거가 2세기 무렵, 여기서 제4결집, 불교학 전체의 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김봉래 : 제4결집이요.

 

권오민 ; 제4결집이라고 하는데, 사실 제4결집이라는 것은 사실 제1, 제2는 분명한데 제3부터는 현대학자들이 갖다 붙인 말일뿐이지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제1, 제2결집이 근본 결집이고요, 그 이후에는 각 부파마다 결집이 늘 이루어졌습니다. 어쨌든 2세기 무렵에 협존자의 발의와 카니시카 대왕의 후원에 의해 카슈미르에서 결집이 일어났죠. 결집의 결과로서 생산된 문헌이 바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입니다.

 

김봉래 : 아 <대비바사론>요.

 

권오민 : 불교에서 가장 방대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후에 세친이라든지 이런 수많은 논사들이 바로 그 <대비바사론>을 다시 해석하는, 아까 말씀드린 비바사사, 해석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4결집을 주최했던, 발의했던 분이 협존자(脇尊者)라는 분인데요, 파르슈바(Pārśva), 협존자, 그 분이 결집을 어디서 하지, 그러니까 당연히 당시 불교의 중심이 마가다였거든요. 인도의 중원. 그런데 마가다는 외도들이 너무 많아 불교의 교리가 상당히 손상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는 할 수 없겠다. 그리고 당시 쿠샨제국의 수도였던 오늘날 페샤와르, 푸루샤푸르는 습기와 더위로 인해 결집하면 경전이 훼손될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도 할 수 없겠다. 최적지는 사방으로 산악이 견고하고 야차들이 지키는, 물산이 풍부하여 현성(賢聖)들이 모여들고 선인(仙人)들이 노니는 카슈미르이다, 그래서 여기서 결집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김봉래 : 그게 이제 2세기경이다 이런 말씀이구요.

 

권오민 :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 때요.

 

김봉래 : 카니시카 왕 때요.

 

권오민 : 네. 뭐 그 뿐만 아니라 이곳이 불교학의 본산이다 보니 굉장히 많은 문헌들이 찬술되었는데, 대개 설일체유부의 율장이라고도 하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율장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허공을 날아 북인도로 가시면서 녹음에 쌓이 카슈미르를 지나시면서 이곳은 사마타를 닦고 비파사나를 공부하는 이들의 제일가는 처소가 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세요. 그래서 협존자도 모든 현성들과 선인들이 이곳에 모일 것이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전설이겠지만 서도요. 실제로 이후 여기서 수많은 문헌들이 생산되었고. 무착 ․ 세친을 비롯한 이런 불교 수많은 논사들이 간다라 출신입니다. 그 분들이 사실 불교의 핵심적이고도 중추적인 이론들을 생산한 분들이죠. 뿐만 아니고 동아시아, 그러니까 중국, 한국, 일본, 동아시아로 전개된 불교는 전부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거치게 됩니다. 중국의 초기불교사를 장식한 분들은 모두 이곳과 관련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역경의 대종장으로 일컬어지는 구마라집, 그 분도 어려서 카슈미르에 유학하셨고 현장스님도 물론 카슈미르에서 공부했지요, 2년간. 그러니까 카슈미르가 사실인 즉 불교학의 본산이라고 말할 만하지요.

 

김봉래 : 그렇군요.

 

권오민 ; 그런데 그 땅이 지금은 10세기 이후부터는 불교가 황폐해지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카슈미르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되고 이로 인한 양국 사이의 분쟁, 전쟁, 또한 파슈툰족이 주류인 간다라는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탈레반과 관련되어 있고, 뭐 이런 등등으로 인해서 지금은 비운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봉래 ; 그러면 교수님의 여정은 구체적으로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서 어떻게 마무리 된 건가요.

 

권오민 ; 옛날 구법 고승들, 상당히 많이 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아는 고승들은, 법현을 비롯하여 송운과 혜생 일행, 혹은 현장(玄奘) 혹은 우리가 잘 아는 신라스님인 혜초, 이런 분들이 가셨는데, 대개 육로로 여행을 하신 분들, 의정(義淨)스님은 해로로 여행하셨고요, 육로로 여행하신 분들은 모두 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특히 현장스님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힌두쿠시를 넘어서 간다라로 오셔서 카슈미르로 여행하셨고, 혜초스님은 반대로 카슈미르에서 간다라로 여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간다라와 카슈미르 사이에는 국경선이 놓여있기 때문에, 전쟁도 있었고요,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는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요, 우리의 휴전선과 같은 정전선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국경은 폐쇄되었고, 오로지 펀잡의 국경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도 령 카슈미르의 주도인 스리나가르에서 펀잡을 거쳐서 시알코트라는, 옛날 명칭은 샤카라입니다, 우리가 아는 밀린다팡하의 무대입니다, 샤카라라는 시알코트를 거쳐서 탁실라, 페샤와르 그리고 스와트, 그리고 다시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로, 그런 코스를 밟아 여행을 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러시군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현장법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구법승들이 다녀갔고 또 많은 그 순례기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대당서역기> 그러면 다들 잘 아는데, 그런 전승들이 서로 내용이 좀 다른 경우가 있더라고요. 교수님께서 쓰신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좀 상세하게 쓰여 있더라고요. 이런 사실들을 좀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요.

 

권오민 : 뭐 불교학자로서 가장 난감한 부분이죠. 사실 뭐 경전 역시 경전마다 성격이 다 다르고 그 주장하는 바가 다르거든요. 구법고승들이 쓴 여행기도 서로 내용이 다를뿐더러 인도에서 생산된 문헌과도 다를 수 있어요. 혜초스님이나 현장스님은 어떤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서 생산된 문헌을 보시기보다는 그 지역에서 전해진 전설, 전승, 대개 당시 왕조에 관한 이야기는 정확하지만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굉장히 상이한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지역을 여행하면서 들은 전설을 쓰시다보니까, 전설이 시대에 따라서 다르거든요. 다르게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종교문헌이다 보니 상당히 왜곡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세친이 <구사론>을 어디에서 썼다고 하면 좋을까. 그럼 당연히 우리 동네에서 썼다고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래서 현장스님에 의하면 세친은 간다라에서 <구사론>을 저술했는데, 진제삼장이라는 분에 의하면 아요디아에서 <구사론>을 저술했습니다. 또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간다라의 페샤와르와 중천축의 아요디아는 서로 대립해요. 대승불교,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는 대승불교인데, 진제스님에 의하면 대승불교의 문헌들은 거의 다 페샤와르에서 생산되었고, 아요디아에서는 소승문헌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현장스님은 반대로 페샤와르에서 전부 소승문헌들이 생산되었고 아요디아에서는 대승문헌들이 편찬되었다,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약간 좀 왜곡된 점도 없지 않았겠죠. 그래서 종교문헌은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절대적으로 문헌에 있는 사실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상당히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죠. 종교분쟁도 사실은 그런 문헌에 의한 글자대로만 이해하다보니까 서로 이념을 달리하게 되고, 서로 충돌하게 되었지 않은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봉래 : 특히 교수님께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 중현, <아비달마순정리론>을 내신 분이시죠. 그것이 말하자면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한 그런 책이 되는데, 두 논서에 대해서도 이렇게 저렇게 얽힌 내용들이 좀 많이 있나 봐요.

 

권오민 : 대개 우리가 간다라, 카슈미르를 이야기 하면 구사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구사론>은 불교교학에서도, 불교사상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헌입니다. 지금 티베트에서는 여전히 게룩파를 비롯한 모든 종파에서 반드시 학습하는 교과목입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도 한 때 뭐 ‘구사 8년, 유식 3년’ 이런 말이 있다시피 <구사론>은 모든 불교교학의 기초였거든요. 대개 아비담(阿毘曇)이라고도 하는 아비달마불교는 대승불교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의 기본교재가 바로 <구사론>이었습니다.

 

김봉래 :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구사론>이 상대적으로 연구가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네요.

 

권오민 : 신라시대의 원측이라든지 구사론의 소(疏)를 해설하신 분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고려시대를 거치며 조선시대 때는 배불정책으로 인해서 불교학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다 사라지고 없어진 겁니다. 아무튼 <구사론>을 세친논사가 카슈미르로 유학을 가서 비바사를 익혔는데, 사실은 당시 불교학이라는 것이 국가기관의 정보인양 상당히 비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다라 출신이 외국인인 세친에게 카슈미르의 유부학설을, 비바사사의 이론을 전해줄 수가 없다고 해서 추방했어요. 그래서 세친이 본국인 간다라에 돌아가서 저술한 게 <구사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사론>에는 정통 유부학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설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경량부라는 부파의 이설로써 카슈미르의 유부학설을 비판하기도 하였고, 그래서 중현이라고 하는 분이 이에 대한 비판서로서 <순정리론>, 정리(正理)에 맞게, 정리라는 것은 논리 즉 올바른 이치입니다, 논리에 부합하게 불교 이론을 천명하겠다, 아비달마를 천명하겠다고 해서 <순정리론>을 저술합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40여년 이 두 논서를 중심으로 아비달마를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카슈미르와 간다라엘 가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장스님은 인도엘 17년간 유학하셨는데, 원래 목적은 날란다에 가서 <유가론> 즉 <유가사지론>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가시면서 오시면서 <순정리론>을 네 차례 배웁니다. 카슈미르에서도 2년 간 승칭법사로부터 <순정리론>을 배우며, 날란다에서도 5년간 계현법사로부터 <유가사지론>과 함께 <순정리론>을 학습합니다. 그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이 논서를 학습합니다. 17년에 걸친 인도순방 중 이토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논서는 <유가론> 계통을 제외한다면 이 밖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러니까 <순정리론>에는 당시 불교학의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학의 제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정리론>을 공부해야 하는데, 그 양이 <구사론>의 거의 세 배나 됩니다. 굉장히 방대합니다. <순정리론>과 <구사론>으로 대변되는 카슈미르 불교와 간다라 불교의 차이를 아주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불교신자들은 삼보에 귀의하고 5계를 수지하는데, 5계를 전부다 수지해야 할지 혹은 부분적으로 수지해도 괜찮은지, 뭐 이런 겁니다. 예컨대 불음주계를 범하면 앞에 네 가지 계도 함께 깨어져 불교신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카슈미르불교의 입장이라면 네 가지 계만으로도 불교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간다라불교의 입장입니다. 불음주계를 어김으로써 불교신자가 될 수 없다면, 불교신자 될 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간다라는 현실적 입장을 강조합니다.

 

김봉래 : 없겠지요.

 

권오민 : 카슈미르가 원론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면, 간다라 불교에서는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봉래 : 간다라에서는 그럼 분수설(分受說)을 지지하는 거군요.

 

권오민 : 예. 간다라 논사가 5계분수설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김봉래 : 그런데 동서양 불교교류, 문화교류를 이야기할 때 불교 쪽에서 가장 눈에 띄는 책이 사실 <밀린다팡하>거든요. 이 논서는 인도-그리스 왕 밀린다왕과 불교의 장로 나가세나 사이의 대론을 담은 책입니다. <밀린다팡하>의 무대였다고 하는 시알코트에 대해서 조금 소개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권오민 : 제가 시알코트를 굳이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요. 카슈미르에서 바로 간다라로 갈 수 있으면 좋았겠는데, 현실상 그렇게 할 수 없고 펀잡을 거쳐야 했습니다. 펀잡의 중심 도시는 시알코트입니다. 그런데 시알코트의 옛 이름이 샤카라였고, 이 곳은 바로 박트리아,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수도였습니다. 밀린다는 인도 이름으로, 희랍 이름은 메난도로스였습니다. 그는 그의 제국의 수도였던 샤카라에 카슈미르 출신인 불교장로 나가세나를 불러 서로 대론한 것이 <밀린다팡하>입니다. 한문으로는 <미린다왕문경>,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어 있습니다. 그 무대가 샤카라, 시알코트였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게 해서 사실은 좀 합리적인 불교, 토론을 하는 불교의 모습을 저희 공부할 때, 불교 처음 공부할 때 이 <미린다왕문경>을 많이 참조했던 그런 일이 있고, 수레의 비유라든가 무아(無我)를 설명하면서.

 

권오민 : 그렇죠. 그런데 사실은 <밀린다팡하>는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에서는 장외(藏外)성전, 삼장 밖의 성전이라 할 만큼 중요시되는 문헌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밀린다팡하>는 아비달마의 일반적인 유형의 문헌입니다. 아까 사회자께서 묻고 답하고 하는 것이 특이한 방식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불교의 논서들은 거의 다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비바사론>도 그러합니다. 사실 제가 시알코트를 찾은 이유는 세친논사가 <구사론>을 저술하고, 바로 이 샤카라, 시알코트에 머물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현논사가 <순정리론>을 저술하고 세친과 대론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가다가 세친논사가 그와는 대론하지 않겠다며 피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력이 쇠진한 나머지 목숨을 마쳤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후세에 지어진 것이겠죠. 아무튼 그래서 샤카라를 한 번 가봐야겠다 했는데, 지금 시알코트에서는 불교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마침 제가 갈 때가 라마단 종료 축제인 ‘이둘 피트리’가 막 시작될 때라서 시내에서는 사람도 찾을 수 없었고, 사람도 한적했고 뭐 찾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적막하였습니다. 그런데 <밀린다팡하>의 한역인, 한문으로 번역된 <나선비구경>에 의하면 나선비구는 카슈미르 출신이지만, 밀린다 왕, 메난도로스의 고향은 해변이라고 해요. 펀잡 대평원 지대에서 비치beach, 해변이라는 것이 매우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샤카라’라는 말이 원래 대양, 큰 바다라는 뜻입니다. 펀잡 대평원 지대에 대양이 웬 말인가. 그런데 시알코트에는 대해가 있었어요. 물어물어 시알코트에서 한 20km 떨어진 헤드말라라(Head Marala)라는 곳에 갔는데, 그곳에 히말라야에서 내려온 체납강이 대해처럼 펼쳐져 흘러가더라고요. 제방이 없던 그 옛날에는 정말 대해로 생각할 수도 생각이 들었어요. 아! 시알코트가 그래서 옛날에 ‘샤카라’, 대해로 불려졌구나. 저는 그 대해에서 밀미린다 왕과 나가세나, 혹은 세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김봉래 : 그렇게 해서 간다라 지역으로 들어가셨는데, 간다라는 힌두 문화와 외래의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해서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던, 그리고 간다라 미술에 두드러진 모습이 불상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데, 실제로 간다라 지역들을 보시면서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권오민 : 저는 뭐 미술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불상의 양식에 대해서는 거의 잘 모릅니다.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 신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부처님의 경호원 격인 바즈라파니, 금강역사라고 하죠, 바즈라파니는 헤라클레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아주 유력합니다. 당시의 간다라에는 기원전 4세기 무렵 (327년) 알렉산더가 내려왔고, 이후에도 계속하여 박트리아, 스키타이, 파르티아, 쿠샨 등이 내려왔는데, 이들은 다 서방 민족들입니다. 특히 쿠샨시대 때 대거 불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서방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보다도 인도의 대형박물관에도 많지만 라호르 박물관, 탁실라 혹은 페샤와르 박물관에는 널린 게 간다라 불상이더라고요. 그 많은 불상들이, 그야말로 수백 수천의 불상들이 어디서 왔을까? 신라시대에도, 삼국유사에 신라의 불교를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그러니까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이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간다라도 이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겁니다. 구법승들의 여행기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수의, 그것도 매우 큰 규모의 스투파(탑원)와 비하라(승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치나북티(오늘날 암리차르 근방)의 타마사바나라(闇林)는 절은 산이 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현장법사에 의하면 스와트 지역은 크기가 경상도보다 작은데, 1,400 가람과 18,000명의 승도가 있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수많은 승가람과 스투파(塔院)에는, 뭐 지금이야 돌무더기밖에 없지만 그 당시에는 스투파의 기단에, 요도(탑돌이하기 위한 길)에, 혹은 법당에 감실에 그야말로 부처님으로 꽉 차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느 시기 모두 파괴되고.... 박물관에 전시된 간다라불상은 그 중의 일부, 만분의 일이나 될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김봉래 : 교수님께서는 이 간다라의 중심도시인 탁실라를 비원과 비화의 도시다 이렇게 표현을 하셨는데, 그렇게 표현한 까닭이 무엇인지요.

 

권오민 : 저는 불상전문가는 아니지만 불상은 필시 불전문학, ‘이야기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이후 불교도들은 어느 때 부처님의 전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금생에 태어나서부터가 아니고 그 전생, 전생, 나아가 3아승지 백겁 이전부터 자리이타의 붓다가 되기를 서원하고 영웅적인 이타의 자기희생을 한 바로 그 분, 바로 보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보통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지혜와 복덕을 갖춘 분께 귀의한다고 할 때, 복덕은 바로 이 같은 보살행의 결과이지요. 고대 간다라의 중심도시인 탁실라의 원래 이름은 탁샤실라였습니다. 이는 절두(截頭), 잘린 머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북쪽에 악왕(惡王)이 와서 찬드라프라바 즉 월광(月光)왕의 머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천생(千生)에 걸쳐서 머리를 보시하기를 서원한 월광왕은 서원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보시합니다. 그래 이 도시의 이름이 탁샤실라였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은 <현우경>, <육도집경>, <월광보살경> 등 굉장히 많은 불교 경전에 실려있습니다.

 

김봉래 : 선생님은 탁실라를 또한 쿠마라라타의 비유문학과도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유문학은 어떤 것인지요.

 

권오민 : 문학은 요즘 말이고요. 원래 비유(譬喩)라고 하는 불교 용어는, 본생담, 자타카(Jataka)가 부처님 전생에 관한 이야기라면 비유는 부처님과 관련 있는 불제자들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아쇼카 왕이라든지 아쇼카 왕의 태자 쿠날라는 불법을 홍포하기 위해서 굉장히 좋은 소재였습니다. 아쇼카 왕은 천하를 통일한 제왕이었지만 말년에는 아말라카라는 과일 반쪽, 말하자면 사과 반쪽밖에 갖지 못하는 아주 비참한 생으로 여생을 마칩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상(無常)을 표현하기에 굉장히 좋은 소재이지요. 그의 아들 쿠날라는 특히 눈이 아름다웠는데, 아쇼카 왕의 계비 티사가 그 아들을 연모했지만 연모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태자의 눈을 뽑아버립니다. 태자는 이를 인욕행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불법을 홍보하기 위한, 인욕행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좋은 소재였습니다. 불제자들과 관련된 이러한 이야기를 비유문학, 아바다나(Avadana)라고 합니다. 아바다나, 비유문학, 이런 이야기 모음집이 우리가 잘 아는 <출요경> <백유경> <현우경>, 뭐 이런 경전들입니다. 이런 경전에서는 논리보다는 이론보다는 중생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간다라에서는 ‘이야기의 불교’라는 새로운 불교성전의 양식이 탄생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불교’의 비조가 쿠마라라타였습니다. 현장에 의하면 그는 탁실라 출신입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제가 책을 보니까 부처님 발우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게 실려 있더라고요. 그 발우가 카니시카 왕이 중천축을 정벌하고 전쟁 배상금 대신 받아왔던 것이다, 뭐 이렇게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권오민 : 이 이야기는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에 나옵니다. 마명보살은 부처님의 전기를 이야기로 꾸며낸 <불소행찬(佛所行讚)>의 저자입니다. 카니시카 왕이 중인도를 정벌하고서 전쟁 배상금 대신에 요구한 것이 바로 부처님이 정각 후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발우와 변재(辯才) 비구, 말하자면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마명보살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흘 굶은 말조차 울게 하였기에 마명(馬鳴)이라 이름하였답니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다는 성배 이야기가 있다면, 불교에는 불발(佛鉢), 부처님의 발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에 정각, 깨달으시고 박트리아에서 온 트라푸사와 발리카라는 상인 형제로부터 공양을 받았거든요. 그 때 공양을 받았던 발우, 그 발우는 사천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발우는 어떻게 됐을까요.

 

김봉래 :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 거 아닌가요.

 

권오민 : 아닙니다. 이 발우는 사바세계를 떠돌며 불법을 흥성시키다 미륵불이 출현할 무렵에는 다시 생겨났던 원래 사천왕천으로 되돌아온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실제 이 발우는 여러 곳으로 유전합니다. 카니시카 왕은 중인도로부터 얻어온 발우를 수도인 푸루샤푸르에 가람을 세워 모셨는데, 법현스님도 이를 보았답니다. 그런데 현장스님이 갔을 때는 발우를 봉안하였던 대(臺)만 남아있고, 발우는 페르시아에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5세기 무렵에 에프탈리트, 흉노족이 침입하여 이 발우를 파쇄합니다. 흉노족의 왕의 이름이 미히라굴라로, 한문 이름은 연화면(蓮華面)이에요. 이 이야기가 <연화면경(蓮華面經)>에 실려져 있습니다. 그의 파불(破佛)이 얼마나 잔혹하였든지 이를 계기로 말법(末法) 신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페샤와르의 관광안내서에 따르면 카니시카 왕이 부처님의 발우를 봉안하였던 곳이 고르카트리입니다. 불발을 봉안하였던 승가람은 그후 힌두교사원으로, 관청으로, 카라반 사라이 즉 대상(隊商)들의 숙소로 바뀌었고,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제언하자면, 기독교의 성배와 관련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생산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인 불발(佛鉢)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불교계에서도 이런 발우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뭔가 불교의 이념을 전하는 애니메이션, 희곡 이런 것들이 이제 좀 생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혹 이런 데 관심이 있으신 만화가라든지 극작가가 계시면 관련 자료를 알려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김봉래 : 네. 이렇게 말씀을 나누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역시 이렇게 흥성했던 불교가 인도의 불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만, 다녀오시면서 드신 생각이 궁급합니다.

 

권오민 : 말하자면 불법의 멸진은 외적요인과 내적요인이 있습니다. 북방 이민족의 파괴가 외적요인이라면, 수행자와 교학자 사이의 항쟁이 내적 요인이라고 경론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법멸진(正法滅盡)은 불교도들의 한결같은 관심사여서 다수의 경론에서 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잡아함경> 제640경인 <법멸진상경(法滅盡相經)>에서도 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사론>에서도 정법 멸진에 관한 설명으로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의 정법(正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교법(敎法: 말씀)과 증법(證法: 깨달음)이 바로 그것으로 이를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가 존속할 때까지 정법은 지속한다.” 혹 다른 문헌에서는 반대로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가 사라질 때 교법과 증법도 사라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행하는 자는 수행자, 설하는 자는 교학자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선종과 교종이 서로 대립했듯이, 당시 인도불교에서도 교학자와 수행자가 대립하였던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이념적 갈등을 정법멸진의 한 요인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불교내부에도 이념갈등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봉래 : 자.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끝으로 과거 천 년에 걸쳐서 불교학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의 고향이기도 했던 카슈미르와 간다라 순례를 하고서 느낀 소감을 간단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권오민 : 사실 카슈미르에서 불교의 흔적을 찾기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간다라의 경우 박물관에 굉장히 많은 불상이 있고 불탑 또한 여러 곳에 존재했지만 현장에서는 돌무더기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교 인식 또한 상당히 위태로웠습니다. 최근 자행되었을 불적 훼손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진 불교의 자취가 그렇게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서역의 제1탑으로 알려진, 법현을 비롯한 모든 구법승들이 참배하였던 높이 7백 척의 카니시카 대탑과 세친보살이 <구사론>을 지었다는 카니시카 승가람의 발굴지는 악취가 풍기고 쓰레기가 날리는 공동묘지로 바뀌었고, 안내판조차 없었습니다. 설혹 그러할지라도 그 곳이 과거 천년에 걸친 불교학의 고향, 나아가 우리 동아시아불교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유대관계를 모색해서 그들이 위대한 땅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줬으면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보다는 종단이라든지 국가 차원의 사업일 것입니다. 현지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를 가급적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김봉래 : 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권오민 : 네. 고맙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경상대 철학과 권오민 교수님과 함께 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카슈미르와 간다라가 불교학의 고향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 되새깁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하셨지만 듣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이해했고 그것이 다양한 불교 철학과 문화를 낳았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은 일미(一味)라고 해서 한 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소중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해서 성인들이 말씀하신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런 불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가져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봉래 기자  kbrbu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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