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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전법후원국장

출연 : 윤청광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방송 : 2020년 1월 5일(일요일) 저녁 6시(BBS 라디오)

 

 

김봉래 : 네.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2020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는데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하는 다짐 다시 한 번 해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인연 가운데서도 사람 인연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옛 어른들, 큰 스님들의 생애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참 많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뉴스와사람들 오늘 이 시간에는요 방송 역사상 최초로 스님들의 생애를 드라마로 꾸민 불교방송 고승열전의 작가이신 윤청광 작가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김봉래 : 예. 말씀드린 대로 윤청광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윤청광 : 안녕하십니까.

 

김봉래 : 불교방송 고승열전의 작가로서 또 많은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조계종이 수여하는 포교대상 수상하셨는데,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윤청광 : 감사합니다.

 

김봉래 : 자. 먼저 우리가 2020년 새로운 한 해를 맞았는데요. 먼저 한 해를 맞이하는 소감부터 말씀해주실까요.

 

윤청광 : 매일매일 참 좋은 날이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변함이 있겠습니까. 똑같은 건데 마음을 새롭게 갖추고 또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일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희망도 갖고 그러면서 인생 구상인데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하고, 오늘하고 내일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해가 되었으면 또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지요.

 

김봉래 : 네. 새로운 출발,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출발, 새로운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하시고, 또 문화방송 보도국의 전속 작가로도 계시고, 불교신문, 법보신문 논설위원으로도 계셨고, 또 일찍이 동국출판사 설립해서 지금까지 대표로 또 활동을 하시고,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 부회장 역임하시고 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을 또 역임하시고, 지금은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의 이사장으로서 현역으로서 뛰고 계십니다. 정말 왕성한 체력, 원력을 발휘하고 계신 건데, 그런 것들이 포교대상 수상하시는 거 하고 다 연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윤청광 : 저는 그 동안에 세 군데에서 활동을 해왔는데요. 처음에는 방송, MBC 문화방송에서 65년부터 방송작가로서 활동을 해왔고, 그리고 이제 아시다시피 군사독재가 아주 심할 때 도저히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런 시대에 강제로 방송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쓰고 있던 프로그램을 다 없애버렸으니까요. 제가 담당했던 프로들,이 사회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부조리 고발 프로그램이었는데 듣기 싫다고 해서 군사독재시절에 강제로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출판계로 쫓겨났죠. 올 데 갈 데가 없으니까. 그래서 출판계에 몸담은 게 1980년에 출판계에 몸담아놨고, 이제 60년대부터 불교 운동을 해왔으니까요. 세 군데에서 활동을 했는데, 어느 한 분야에서도 소홀히 한 적은 없습니다.

 

김봉래 : 방송, 출판, 또 불교계 오늘은 주로 불교계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포교대상 수상하신 것이 고승열전의 작가로서 많이 조명되었던 것 같은데, 고승열전은 불교방송이 개국 초기부터 이렇게 해서 모두 38분의 스님들의 일생을 드라마로 해서 아주 많은 사랑을 받게 된 프로그램인데, 먼저 고승열전을 어떻게 집필하게 되셨는지 그 인연이 궁금해요.

 

윤청광 : 네. 제가 1970년대부터 불교신도회에서 내던 <법륜>이라는 불교잡지가 있었습니다. 월간 잡지. 그 잡지에 사실 고승들 이야기를 연재를 했었어요. 이제 방송에서 나간 고승열전처럼 자세히는 못썼지만 잡지 한 번 나올 때마다 한 스님의 이야기, 그것을 해서 바로 약전, 약식으로 해서 고승열전을 연재를 했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이 이 훌륭한 스님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어려운 한문으로만 전달이 되는가. 이것을 더 재미있게 알기 쉽게 풀어서 우리 국민들에게 좀 중생들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1990년에 드디어 불교방송이 생겼단 말이죠. 그러니까 바로 이거구나. 그래서 제가 강력하게 이야기를 했죠. 고승열전을 좀 방송을 했으면 좋겠다. 연속극으로. 근데 이 고승열전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우리 라디오 연속극의 마지막 연속극입니다. 그 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은 불가능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선 성우들이 없어요. 그 당시 기라성 같은 신구 선생, 뭐 유명한 성우들 탤런트들을 다 동원해서 연속극을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그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또 병석에 누워 계시고 라디오 프로그램이 다 없어져 버리니까 성우들이 없어요. 연속극을 하고 싶어도. 그런데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불교방송 개국과 더불어서 몇 년 한 4년 동안을 방송을 한 겁니다. 그것이 라디오 연속극으로서의 마지막 대단원이 아닌가. 대미를 장식한 게 고승열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불교방송에 소개된 분들 서른 여덟 분인데, 그 중에 스물 네 분을 소개를 하셨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윤청광 : 처음부터 하다가, 이게 이제 자료가 거의 없어요. 자료 수집 하는 데 거의 매달렸고, 원고 쓰는 것은 거의 밤새우다시피 했어요. 밤을 새워가지고 방송국에 월요일에 아침 던져주면, 도착시켜야 일주일 분을 녹음을 하니까. 그것이 어긋나면 그 많은 성우들 여러분이 모일 시간이 안돼요. 그래서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마감 시간에는 원고를 도착시켜야 하기 때문에 밤새는 게 거의 다반사였어요. 그래서 건강을 좀 해쳤죠. 그래서 중간에 병원에 입원하느라고 제가 몇 달 동안을 못 썼어요. 그래서 다른 분이 핀치히터로, 말하자면 펑크 지경이었는데 다른 분들이 도와주셔서 몇 달을 써주셨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를 못하고 중간에 제가 좀 쉬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받느라고.

 

김봉래 : 그런 아픈 사연이 있으셨는데. 어찌 보면 아까 자료 수집부터가 사실은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신문에 나온 한 면을 스님 소개하는 것과 드라마로 해서 이거 뭐 수십 회분 나가지 않았습니까.

 

윤청광 : 보통 한 스님 이야기가 두 달에서 삼 개월. 짧게는 두 달, 보통 삼 개월 씩 했죠. 그래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그동안에 불교는 한문투성이라 너무 어렵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일반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교가 어렵지 않고 불교가 감동적이다 이런 것을 목표로 해서 제가 썼던 게 고승열전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이 방송 들으면 재밌다, 쉽다, 정말 눈물 난다 할 정도로 쉽고 재미있고 알기 쉽게 드라마를 한 번 써보자. 목표를 거기에 두고 했기 때문에 그게 아마 지금 시청자, 청취자분들께 먹혀들어갔고 또 공감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봉래 : 제일 첫 번으로 나간 스님이

 

윤청광 : 경허스님.

 

김봉래 : 경허스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허스님은 뭐 지금도 한국불교, 이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떠받들어지는 분인데.

 

윤청광 : 현대 불교의 정말 중흥조죠.

 

김봉래 :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당시.

 

윤청광 : 그 전에는 경허스님을 잘 몰랐어요. 모두들 다. 그런데 불교방송을 통해서 경허스님의 일대기가 연속극으로 석 달 동안 나가고 나니까 아 이런 큰 스님이 계셨구나 해서 충남에 있는 경허스님의 출가 사찰이 관광지가 되었고, 지금은 굉장히 많이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또 만공스님이나 한암스님이 경허스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다들 몰랐죠. 그래서 그 때부터 아 만공스님의 스승이 바로 경허선사구나. 그리고 혜월스님, 수월스님 기라성 같은 큰 스님들을 배출한 게 바로 경허선사거든요. 경허선사가 없었더라면 현대불교로 넘어오는 그 기간이 너무 적막강산이었을 텐데, 경허스님이 계셔서 많은 제자를 걸러냄으로써 사그라지던 불교가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불교방송이 1995년 5월 1일 개국을 하면서 1600년 한국불교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거든요. 방송포교를 통해서 부처님의 정법을 알린다는 취지였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면 사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이렇게 불교방송을 통해서 알려졌군요.

 

윤청광 : 그리고 한 가지 불교방송이 크게 기여한 것은 한국불교의 부처님 가르침이나 우리 큰 스님들의 가르침이 박물관 안에 갇혀있었어요, 불교박물관 안에,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단 말이죠. 알아먹을 수도 없었고. 그런데 불교방송이 생기면서 이게 우리 가정마다 집집마다 배달해주는 겁니다. 불교의 가르침,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집집마다 사람마다 직접 배달해줬다는 거죠.

 

김봉래 : 무료로.

 

윤청광 : 무료로. 그것도 알기 쉽게 우리말로. 그전에는 한문이라고 하는 게 진서(眞書)라고 했는데 정말 한문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은 불교를 접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잖아요. 그래서 불교방송이 생기면서 일대 한국 불교는 일대 혁명을 맞이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김봉래 : 정말 고승열전의 작가로서 정말 한국불교의 어떤 새로운 혁명의 씨앗을 그 때 심으셨고 키우셨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아까 고승열전 하시면서 사실 굉장히 힘드셨다 이런 말씀하셨는데. 자료수집이나 스토리 구성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요.

 

윤청광 : 네. 그 때 참 어려웠던 것이 자료수집입니다. 더구나 옛날 스님들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금석문, 비석 있잖아요. 부도탑에 새겨놓은 한문으로 된 간단한 이력서죠. 언제 태어나서 언제 출가해서 언제 돌아가셨다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밖에 기록이 없고. 나머지는 중국에서 나온 고승전, 일본에서 나온 고승전, 또 우리나라에서 해놓은 동서 열전 이런 옛날 책에서 한 줄 두 줄씩 밖에 안 나와 있습니다.

 

김봉래 : 짧게 짧게 소개가 되어 있죠.

 

윤청광 : 그래서 이 들이 잘못하면 호랑이 등 타고 다니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아주 산신령 비슷하게 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이게 역사적 인물이었는데, 그래서 그 역사를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이런 책들을 전부 뒤져서 한 줄 씩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음력으로 몇 월 며칠에 스님이 어디로 갔다 그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고, 삼국유사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 시대에 백제, 신라 시대 삼국 시대의 기록이 삼국사기인데, 음력 10월 며칠 날 평양에 붉은 눈이 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10월 평양 적설(赤雪), 적설인데, 쌓일 적자가 아니라 붉을 적자 적설이에요. 아니 이게 잘못 기록된 것 아닌가, 이게 무슨 붉은 눈?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황사가 와서 눈에 묻혀 가지고 빨간 눈이 왔다 이거죠. 그래서 밑에 보니까 인심 흉흉, 붉은 눈이 오니 인심이 흉흉해졌죠. 옛날에는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피눈물 흘렸다. 비가 빨갛게 오면 적우(赤雨), 피눈물이 왔다. 인심이 흉흉하면 스님한테 왕이 오죠. 이 변고를. 이런 기록들을 찾아가지고 역사적 사실로. 우리 있었던 일도 이야기로 말로만 전해지면 몇 백 년 지나면 전설이 되어버립니다. 기록으로 남겨야 역사가 되는 거죠. 그래서 말로 전해지면 전설이 되고 기록으로 전해지면 역사가 된다는 기본 철학을 가지고 제가 발굴해서 이야기들을. 그렇게 해서 옛날 조선시대까지는 그렇게 해서 엮었고. 근세 스님들은 스님들을 모셨던 제자들 있잖아요. 그 제자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토막토막 이야기들을 들어서 연대순으로 꿰어서 그래서 고승열전이 나온 겁니다.

 

김봉래 : 그야말로 발로 뛰어서 나온 고승열전인데, 그러면서 새롭게 배우시고 느끼시고 한 것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윤청광 : 그렇죠. 제가 고승열전 쓰면서 진짜 많이 배웠고, 인생에 눈을 떴고 불교 가르침이란 게 진짜 이런 거구나 실감을 했고. 또 살기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데 고승열전 취재 다니면서 오히려 제가 아주 훈훈한 그런 힘을 얻었어요. 예를 들어서 만공스님이나 경허스님의 가르침. 그 당시에 같은 경허스님의 제자인 혜월스님 같은 경우는 저 앞에 문전옥답을 팔아가지고 그 돈으로 산꼭대기 올라가서 다랑치논(다랑논의 북한어, 이하 바로 잡음)을 만듭니다. 인부들 시켜가지고 나무를 베여내고 돌 빼내고 그러다보니까 문전옥답 논 다섯 마지기 판 게 다 없어졌어요. 결국 보니까 세 마지기도 안 되는 거예요. 문전옥답을 팔아가지고 산에다 만든 다랑논이 세 마지기가 안 돼요. 그러니까 제자들 쓸데없는 짓해서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 날아가고, 천수답, 비 안 오면 농사도 못 짓는 다랑논을 세 마지기 만들었는데. 스님은 아침마다 올라가셔서 아이고 좋다 아이고 좋다 그러시거든. 스님 이게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닌데 뭐를 좋아하십니까. 뭐가 손해냐 하시니까. 아니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가 날아가고 농사도 잘 안 되는 서 마지기 다랑논이 생겼는데, 그게 손해가 아닙니까. 야 이 녀석아 중 계산이 왜 그 모양이냐, 문전옥답은 그 자리에 있어서 농사가 잘 되고 있고, 없던 논이 산 속에 세 마지기가 새로 생겼다. 그리고 논 판 돈 그 돈으로는 우리 조선 농민들 굶어 죽게 생긴 농민들 품삯 줘가지고 위기를 잘 넘겼고. 이익을 봐도 크게 이익을 봤는데 뭐가 손해냐 하는 정도로 스케일이 그 가난한 시절에도 우리 큰스님들의 스케일이 엄청 컸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어요. 정말 지혜란 게 뭐라는 걸 고승열전 취재하면서 제가 많이 배웠죠.

 

김봉래 : 참 불교야말로 큰 지혜를 깨닫는 것이 목표인데요. 여러 스님들과의 인연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법정 스님과의 인연이 또 깊지 않으셨습니까.

 

윤청광 : 네. 법정 스님은 제가 동국대학교 신문사 편집장을 할 때 계엄사령관이 학교를 방문해가지고 무지막지한 망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것을 제가 동대 신문에다가 계엄사령관 일행 공갈협박차 내교, 신문에 내버렸어요. 그것 그대로. 그 망언 내용을. 학생들 보고 ‘이 개돼지 같은 놈들 데모만 하면 총살시켜 버린다. 또 똑똑한 교수는 국회의원 해먹고 학생들이 말을 듣겠냐.’ 이런 망언을 막 퍼부었어요. 차마 지금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언을 더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그냥 동대 신문에 그냥 보도했어요. 그리고 제목을 달기를 계엄사령관 일행 공갈협박차 내교라고 신문에 냈습니다. 신문에 나오자마자 누가 밀고를 해가지고 신문이 전부 압수당하고. 그래가지고 제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사건을 혜화전문학교 선배이신 조지훈 시인이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였습니다. 조지훈 선생이 동아일보 서사여화에 내 이야기를 칼럼으로 쓰셨고, 동국대학교 불교과에 서경수 교수가 털보교수로 유명한 서경수 교수께서 그것을 수필로 써서 사상지에 발표했어요. 그래서 사상계에 가서 나오자마자 정보부에 끌려가서 정말 곤욕을 치르셨죠. 서경수 교수가. 그래서 그것을 서경수 교수하고 법정 스님이 아주 친했어요. 그래서 법정 스님이 자연히 그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동대 그 윤 아무개라는 그 친구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경수 교수가 법정 스님과 저를 처음 소개한 게 1972년인가 그래요. 근데 그 때 제가 학교 쫓겨나가지고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을 때인데 그 때 스님 책 한 권 내십시다 해서 오랫동안 걸려가지고 72년 말에 법정스님의 첫 책, <영혼의 몸>이라는 에세이집을 제가 냈어요. 그래가지고 발행 날짜는 1973년 1월 1일자로 발행을 찍었지만 책이 나오기는 연말에 나왔어요. 그 전에 72년 12월에 나왔거든요. 그 때 <영혼의 몸>이라는 제목을 붙여 책을 냈는데, 그 때는 제목이 너무 어려웠던 탓인지 많이 안 팔렸어요. 그리고 몇 년 있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그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낸 겁니다. 거의 몇 편 빼고 새로 바꿨는데, 책 제목을 바꾼 게 <무소유>로 바꾼 거예요.

 

김봉래 : 그 유명한

 

윤청광 : 그래서 무소유가 된 거예요. 내용은 똑같아요. 제목만 바꾸고 책을 조그맣게 냈는데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무소유 하면 법정 스님이 되었는데, 그 때 그 인연이 맺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3년에 제가 책의 해 조직위원회 홍보책임자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출판문화협회가 법련사 바로 옆집입니다. 사간동. 옆집인데 책의 해 행사를 한 창 하고 있을 때 인데, 법련사에 청학스님이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법정 스님이 찾는다 이거예요. 오늘 오후에 꼭 좀 법련사로 와라. 갔더니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라는 글자 여섯 자를 들고 나오셨어요. 내가 밥값을 하고 가고 싶은데, 제가 이것을 하고 싶다. ‘맑고 향기롭게’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구체적인 것은 전혀 백지 상태다. 한 번 연구해봐라. 그래서 화두를 주신 거예요. 맑고 향기롭게라는 것을 가지고 들어가셨죠. 저는 일주일 내지 10일을 끙끙대고 만든 게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세 단계로 나누어가지고 9가지 실천 덕목을 제가 만들었어요.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며 삽시다, 그런 식으로. 나누어주며 삽시다. 칭찬하며 삽시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가꾸며 삽시다. 덜 쓰고 덜 버립시다. 이런 9가지를 만들었는데, 만들어가지고 스님한테 제출했는데. 글자 토시하나 고칠 게 없다, 이대로 하면 되겠다 그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실천 덕목으로 지금도 실천되고 있습니다. 그 때 스님이 본부장을 맡으라 이래가지고 저는 맑고 향기롭게 살지 못한 사람이라 본부장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자격이 없으니 맡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맡으라고. 지금부터라도 맑고 향기롭게 살라는 뜻이죠. 그래서 꼼짝 못하고 본부장을 맡아가지고 17년간 스님을 옆에서 모셨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참 90년대 보면 저희 불교방송의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어떻게 보면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을 표현한 말이 굉장히 중요하게 주목이 되었었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맑고 향기롭게’라는 스티커가 전국 방방곡곡에 안 붙여진 데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유행을 했었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 같아요. 그 맑고 향기롭게라는 표어 자체가 말이죠.

 

윤청광 : 네. 그것도 법정 스님이 제창하셨고 법정 스님이 직접 참여하셨으니 가능했던 것 같고. 제가 17년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느꼈던 게 우리 사람이 흔히 언행일치하기가 힘듭니다. 말과 행동이 같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세 가지가 일치했어요. 말과 글과 행동이. 세 가지가 똑같아요. 그래서 정말 이런 스님이 다 계셨구나 감동을 받았었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지금 서로 많이 가지려고 다투지 않습니까. 나 달라. 못 준다. 그러는데 지금 길상사 자리 그 유명한 당시의 1000억 자리인데 그 길상사 보살이 시주합니다. 못 받겠다. 시주 할 테니 받아주세요. 못 받겠다. 받으세요. 못 받겠다. 이것을 10년을 실랑이를 했습니다. 가지세요. 못 받아요. 우리하고 거꾸로 된 거죠. 그래서 10년 간 실랑이 하시다가 결국 스님이 이기셨어요. 내 이름으로는 그 큰 재산을 등기 못한다. 그래서 소유권은 송광사, 조계종에다 줬고, 다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관리만 내가 하마,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시고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은 그 재산을 못 가져서 안달이고 싸우고, 재판하고, 형제간에 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의 많은 재벌들 많은 형제들이 그래서 원수가 되고 소송하고 오늘날도 신문에 나오잖아요. 남매간에 싸우는 데 받아라. 못 받겠다. 이것을 10년 간 했다는 게 그 보살도 훌륭하시지만 법정 스님이야 몸으로 행동으로 말로 다 보여주셨는데, 정말 참다운 수행자의 모습, 제가 정말 처음 봤습니다. 그런 분은.

 

김봉래 : 세 가지가 일치했다. 법정 스님. 당신의 말과, 당신의 글, 그리고 당신의 행동 그런데 정작 스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유언에 더 이상 말빚을 짓지 않게 해 달라 이렇게 해서 그 동안에 나왔던 책들 더 이상 팔지 않도록 했습니다만 그래도 큰스님의 뜻을 이어가야 하는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책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이 지금도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의 이사장으로서 활약하고 계시고 출판계와 떼 놀 수 없는 분이신데, 지금 우리 한국에 어떤 출판의 현황, 그리고 불교계 출판의 현황 이런 거 보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고, 이런 것이 어떻게 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그런 말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윤청광 : 우리나라가 원래가 직지심체요절을 비롯해서 서양보다 훨씬 책을 먼저 전 세계에서 먼저 책을 먼저 냈던 나라입니다. 인쇄술도 가장 발전한 발달했고. 그러니까 금속활자를 서양보다 먼저 구텐베르크보다 80년 먼저 발명해서 했던 게 우리 불교책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인데. 모든 분야가 책 없이 발전할 수 없잖아요. 책 하면 소설책, 시만 생각하는데, 기술 책, 건축, 의학, 뭐 과학, 우주학 다 모든 게 책 없이는 공부를 못하잖아요. 책이 발달한 나라, 출판이 발달한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참 선진국이었는데, 그동안 너무 가난하게 살았고 전란에 시달리다보니 책을 아주 귀히 여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출판 후진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런데 더구나 불교가 우리나라 출판의 효시이고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효시인데, 불교도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핍박 받다보니까 책을 펴내지 못했잖아요. 언문으로 책을 펴냈어야 했는데 못 펴내고 한문의 감옥 속에 갇혀있었단 말이죠. 불교출판은 지금 어떤 위치에 와 있냐면 기독교 출판사는 약 190개 200개가 됩니다. 출판사가. 그런데 불교출판이라고 해봐야 20개가 안 돼요. 10분의 1수준입니다. 숫자도. 그런데 책 발행 종수는 그 10분의 1정도가 아니고 100분의 1정도 밖에 안 돼요. 불교 책이 그렇게 안 나와요 지금. 기독교 책은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보시다시피 기독교 서점은요 700평짜리 1000평짜리 서점이 전국에 한 50개 됩니다. 50개 그런데 불교 서적 100평짜리 서점이 하나도 없어요.

 

김봉래 : 어떻게 활로를 모색해야 할지요.

 

윤청광 : 왜냐하면 그동안에 불교가 제사로 먹고 살았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법회로 먹고 살아야 하고, 법회로 불교 포교를 해야 하는데, 그동안 제사지내는 거 위주로 했단 말이죠. 그러다보니 더구나 참선이 중시되면서 불립문자 잘 못 강조해서 기록하고 보는 것 쓸 데 없는 짓이다 천시해서 이 출판문화가 거의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불교가 말하자면 교리 상으로 신도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무장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냥 기도만 하고 절만 많이 하고, 보시만 많이 해라 이것을 강조했단 말이죠. 방생이나 잘 해라, 천도재나 지내라 뭐 이런 식이고. 지금은 이제 많이 바뀌었죠. 많이 바뀌어서 지금은 법회도 많이 열고 교양대학도 많이 졸업하고, 지금은 상당히 옛날에 비하면 천지개벽을 해서 많은 신도들이 공부를 합니다만 그동안 그렇게 천대받았기 때문에 책이, 지금 불교출판이 기독교에 비하면 100분의 1정도밖에 안됩니다. 양으로 봐서. 그래서 또 한 가지는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은 예배가 끝나고 나면 기독교 서점을 순례하면서 다음 일요일은 무슨 설교를 해야 되나 책 사러 구하러 다니는 게 일입니다. 설교를 잘 못하면 손님이 다 떨어져요. 신도가. 그래서 정말 스님들이 먼저 불교책을 많이 읽으시고 그 다음에 신도들에게도 많이 권하시고, 그래서 교리로 완전히 무장된 그런 진짜 알짜배기 불자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 출판이 포교가 중요한데, 미디어 포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방송 포교. 지금 뉴미디어 포교, 책을 통한 포교. 그런데 책을 통한 포교는 진짜로 효과도 방대하지만 깊이가 있단 말이죠. 책을 읽어서 감동 받아서 불교를 믿게 된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통한 포교에 스님들께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지원도 많이 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예. 저희 불교방송도 이제 방송 포교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30년 동안 전해왔고요 또 매일 아침 부처님 말씀을 휴대폰 문자로 전해드리는 부처님말씀 문자서비스를 통해서도 부처님 말씀을 많이 전하고 있는데, 더욱 더 우리가 부처님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 이런 말씀으로 제가 이렇게 이해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이 다 마무리 될 시간인데요. 끝으로 불교방송, 종단, 사부대중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오늘 순서 마무리하면서 마무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청광 :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부자가 되는 법, 위대한 사람이 되는 법, 훌륭한 사람이 되는 법,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실천만 하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지혜가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한 분 한 분이 알았으면 옆 사람한테 반드시 권하고 전달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불자를 늘려가는 그런 그 포교에 앞장서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불교방송, 이 참 법음을 전하는데 불교방송을 더 아껴주시고 또 불교방송 하는 일에 동참하시는 일이 곧 이웃, 가족에게 포교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셔서 하루하루 실천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봉래 : 네. 오늘 출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고승열전의 작가이신 윤청광 작가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윤청광 작가님과 함께한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말씀 중에 큰 스님에 대한 드라마를 쓰면서 큰 힘을 얻었다고 하는 대목에 저는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성, 가르침을 널리 펴내는 법보시, 포교의 중요성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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