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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모태가 된 서북청년단...4.3당시 제주불교 피해 관계는?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입니다’ - 불교계 소식
이병철 기자 | 승인 2019.11.18 09:19

●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11월 18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지난주 제주불교 4.3피해 사찰을 순례 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다뤘는데요.

지난주 다 못한 이야기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4.3제주불교 순례를 한 후의 뒷이야기 무엇이 있는지... 이병철 기자가 교계뉴스에서 전한다고 합니다.

이병철 기자, 안녕하세요.

[고영진] 지난 주 마지막을 4.3순례 후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는데 꼭 다루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서요?

[이병철] 사실, 기독교와 천주교에 비해 불교계가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짚어 봤는데요.

첫째는 1948년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전개된 중산간마을 초토화 강경진압작전에 의해 이듬해 봄까지 수많은 주민 집단 희생이 있었는데요. 중산간 마을에 많았던 사찰들이 피해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관음사였죠. 무장대의 도당 사령부가 제주읍 삼의악 주변이라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의악과 제주 관음사가 인근에 있지 않습니까?

1949년 2월 12일 유격대 근거지인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면서 이때부터 토벌대의 주둔지로 바뀌게 됩니다.

4.3당시 오라리 방화조작사건이 유명하잖아요. 그 당시 오라리에 있었던 제주시 오라동 정실마을의 월정사에서도 김덕수 스님이 총살되는 등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서귀포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은 1918년 법정사 무장항쟁의 주역인 방동화 스님이 창건했던 원만사의 경우도 사찰이 모두 불태워지고 당시 양홍기 스님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됩니다.

이처럼 토벌대와 무장대의 이해 관계에 얽혀 탄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 둘째는 해방 후 제주불교를 혁신하고자 했던 주역들, 그러니까 이세진, 원문상, 신홍연, 이일선, 이성봉 스님 등이 모두 4.3으로 돌아가시면서 제주불교계가 제2의 무불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세진 스님

특히 이세진 스님은 강원을 세우고 직접 기와공장을 세워 독립적인 강원을 운영하는데 노력하는데요. 그만큼 불교를 바로 알리는데 큰 노력을 하신 것이죠.

그리고 원문상 스님은 중문중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데 온 몸을 헌신합니다.

이런 분들이 4.3으로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주불교가 한 단계 퇴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원정사의 보각 일조 스님이나, 원문상 스님의 제자로 지금은 불교계의 원로인 조명철 선생님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의식있던 스님들은 그야말로 레닌과 막스주의에 물들었던 지금으로 따지면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분들이었던 것이죠.

[고영진] 그럼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이병철] 네 세 번째는 서북청년단과 기독교를 묶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서울에서 조계종단이 4.3영령들을 위한 천도재를 봉행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독교의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참석해 4.3당시 기독교 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많은 4.3영혼들에게 사죄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4.3당시 가장 악랄했던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는데요.

김일성 정권에 밀려 월남한 인사들이 많은데요. 특히 평안도에는 기독교 신앙이 상당히 강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월남하면서 교회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영락교회입니다.

한경직 목사 스스로 서북청년회를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고 밝혔는데요.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내려오면서 제주도에 지금의 영락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1982년 김병희 씨가 펴낸 ‘한경직 목사’ 편에 나온 구술 내용인데요.

“그 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서북청년회가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했습니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라사건을 평정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종교계 간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게 앞으로 우리 불교계의 화두인 것 같습니다.

[고영진] 사실, 서북청년단의 4.3당시 악행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들어도 서북청년단이 어떤 단체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서북청년단이 어떤 단체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병철] 지금까지 많은 4.3당시 살아남은 제주도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치가 떨리고도 남았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서북청년단과 제주도의 악연은 1947년 4월 부임한 유해진 도지사가 서북청년단 출신 7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오면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후 11월 서북청년단제주도단부가 결성됐고, 4.3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북청년단원은 제주읍 300명, 각 면에 40~50명 등 총 760명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1948년 11~12월 사이에는 서북청년단원 1천명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로 투입돼 무장대 진압에 나서게 됩니다.

특히 여순 사건이 일어난 후 1948년 11월 제주경찰에 배속된 서북청년단원 200여명은 이릅니다.

이른바 '200명 부대'로 불리며 제주도에서 각종 만행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경찰보조원' 신분으로 월급과 보급품 등을 전혀 받지 않은 채 관공서를 등치거나 민간인들로부터 식량과 의류 등을 강탈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1948년 11월9일엔 제주도청 총무국장인 김두현 씨가 "배급품을 달라"는 서북청년단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끌려가 폭행과 고문당해 숨지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일개 '경찰보조원' 신분에 불과한 서북청년단원들이 행정 당국의 2인자 격인 김 씨를 끌고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두들겨 팬 후 내다 버렸고, 끝내 숨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폭행과 고문에 가담한 서북청년단원들은 처벌받지도 않은 채 군대에 입대해 신분을 세탁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영진] 이를 보더라도 서북청년단의 위세가 얼마큼 컸는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관공서에 대해 이렇게 행패를 부렸으니 민간인들에 대한 포악은 하늘을 꿰뚫을 지경이었겠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마구잡이로 잡아 들여 고문과 구타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잡혀간 이들을 풀어주겠다며 가족들로부터 금품을 갈취했고, 금품을 목적으로 억울한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과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자비했다는 증언은 4.3피해자 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한 군인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요.

당시 그 군인은 "서북청년들은 고얀 놈들이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 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다. 주민들은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산으로 올라갔다"고 증언했습니다.

[고영진]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경찰 이윤도의 악행이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기록된 이윤도의 행적에 대한 증언이 놀랍다면서요.

[이병철] 네 그 증언에 의하면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로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버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서북청년단은 특히 군과경찰 토벌대의 주축 병력이 돼 국제적으로 금지된 '초토화작전'을 구사하는 등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중산간 부락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이주하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채 이주가 완료되기도 전에 초토화작전을 시작해 100여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영문도 모르고 있던 주민들을 사살했습니다.

명령대로 해안 지대로 이주한 중산간 부락주민들마저 빨갱이로 몰아 집단 학살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심지어는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습니다. 

이병철 기자  taiwan0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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