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구룡폭포

 1999년 3월의 첫주말, 장전항에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금강호 객실에서 뿌연 창문을 통해 내다본 북녘땅은 날씨때문인지 을씨년스러웠다. 배에서 내려 검문소를 통과해 현대 버스에 오르기까지 다들 말을 아꼈다. 관광의 기분을 내기 시작한 것은 목란관을 지나 외금강에 오르며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천선대에서 바라본 비경이 구룡폭포에 다달아서는 함박눈과 함께 또다른 절경을 보여줬다. 지금도 꽤나 많은 아날로그 사진이 남아있는데, 무엇보다 내 기억에 오롯이 남아있다.

 금강산을 만난 것은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을 보며 마의태자를 생각했던게 어제같다. 그 다음은 아마 ‘그리운 금강산’인 듯한데,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가곡의 웅장함 이상으로 분단의 서글픔이 가슴으로 전해졌었다. 가보고싶다는 헛된 상상이 현실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6월이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 5백마리를 몰고 방북하면서부터다. 당시 소를 실은 트럭 50여대가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자유로를 달리던 장관을 잊을 수 없다. 연로한 탓에 승용차에서 혼자 내리기도 쉽지않았지만 정 회장의 눈매에 담긴 의지는 취재기자인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결국 정 회장이 한번 더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뒤인 11월18일,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은 닻을 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먼 바닷길을 밤새 돌아서 갔지만, 나중에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가까운 육로를 통해 오갈 수 있었다. 가기 편해지면서 이산가족들도 거기서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고 강한옥 할머니가 북한의 막내 동생을 만난 데도 그 곳이었다. 2백만명 가까이가 오갔다. 2008년 7월, 민간인 피격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조선시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를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실경산수화는 실물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는 것인데, 역시 조선의 화가들 시선은 금강산에 맞춰져있었다. 겸재 정선을 시작으로 강세황, 김윤겸 그리고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 김응환에 이르기까지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의 수려함이 이어졌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장안사(長安寺), 유점사(楡岾寺)의 옛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넓지않은 전시관을 갤러리들과 부대끼며 두 번이나 돌았다. 박물관을 나서며 내금강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옛 선인들의 화폭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발로, 내 눈으로 말이다. 금강산의 추억을 더하고 싶은게 비단 나만은 아닐텐데...

 

금강산 목란관앞(1999.3. 왼쪽에서 다섯번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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