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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세종대왕이 우리의 글,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573주년이 되는 한글날인데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당시 불교계의 역할을 조명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면서 한글 창제 과정의 역사적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BBS 뉴스가 마련한 한글날 기획 보도 3부작 '한글 창제의 진실을 찾아서',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세종을 도운 학승 신미대사의 발자취를 류기완 기자가 소개합니다.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이후 유훈으로 조선의 학승 신미대사에게 내린 법호입니다.

이는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라는 뜻으로 당대의 고승 신미대사가 세종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은 것은 물론, 세종이 진심으로 스님을 존경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영섭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 "한글 창제와 이런 과정 속에 깊이 관여했다는 일부 연구와 단편적 자료를 통해서 그리고 실록에 나와 있는 세종의 집무실까지 들어가서 법회도 보고, 심지어 나중에 세조에 의해서 '존자'로 추존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한글 창제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신미대사에 대한 평가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사대부들에게 '간사한 스님'으로 내몰렸고, 스님이 왕에게 직접 받은 법호가 부당하다는 상소가 꾸준히 올라왔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 초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범종 스님 / 조계종 호법국장] : "새로운 왕조를 위해서, 새롭게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고려의 그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한 방식입니다. 조선 때까지만 해도 성리학을 주도했던 신하들이 신미 스님에 대한 엄청난 어떤 모략 내지는 이런 일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신미대사는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외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해 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20살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해 20여 년간 수행과 학문에 매달렸고, 경·율·론 삼학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특히, 신미대사는 세계 각국의 경전을 읽고 번역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뛰어난 데다 한자뿐 아니라 부처님 당시 언어인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어와 몽골제국의 파스파 문자 등 5개 국어에 능통해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고영섭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 "신미대사가 상당히 범어에 조예가 있었다는 법주사 복천암에 남아 있는 일부 자료 등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표의문자 중심의 기록에서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계 고승들 특히, 신미대사를 비롯한 불교 팀(Team)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집현전 학자인 김수온의 문집 '식우집'에 실린 복천사기를 보면, 세종이 신미대사를 만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문집에는 모든 백성들이 쓰고 읽기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이 신미대사의 높은 학식에 감명받아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태달라고 청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훈민정음 반포 이후 부처님 일대기를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불서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불교 경전의 언해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범종 스님 / 조계종 호법국장] :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을 창제하겠다고 해서 세종이 뚝딱 만들고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바로 그 이전부터 산스크리트어를 통해서 한글을 어떻게 하면 불교적으로 쉽게 일반인에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훈민정음입니다."

최근 학계에서 훈민정음의 범어 기원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등 불교계 한글 창제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불교계 차원의 많은 체계적인 연구와 논의가 시급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BBS 뉴스 류기완입니다.

영상취재: 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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