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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축총림 통도사 용화전. BBS

[앵커]전국네트워크시간입니다. 오늘은 울산으로 가보겠습니다. 울산BBS 김형열 기자?

[기자]네 울산입니다.

[앵커]오늘은 어떤 소식 준비했나요?

[기자]네 얼마전 국군의 날이었고 올해가 한국전쟁 발발 69주년이 되는 해 인데요, 한국전쟁 당시 영축총림 통도사가 육군병원으로 운영됐다는 자료가 처음 발견돼 그 소식 준비했습니다.

[앵커]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다 이번에 처음 자료가 발견됐다고요?

[기자]네, 통도사 용화전에는 흙으로 빚은 흰색의 미륵불소조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복장유물을 조사하던 중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9월에 작성된 용화전 불상 조성을 위한 연기문이 발견됐습니다.

연기문에는 불기2977년 경인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부상병 3천여명이 입사해, 불기 2979년 임진년 4월 12일 퇴거했다는 내용입니다.

경인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임진년은 1952년을 말하는데 전쟁 발발과 함께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설치돼 2년간 운영됐음을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앵커]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육군병원이 설립됐는데 정식 부대이름도 알 수 있다고요?

용화전에서 나온 통도사 육군병원 기록을 설명하는 현문스님.BBS

[기자]네, 통도사 육군병원의 정식명칭은 제31육군병원 통도사분원으로, 이는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부상병을 위해 양말을 보냈다는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앵커]육군병원으로 운영되면서 부상병 3천여명이 머물렀다고 했는데... 사찰 피해가 심각했을 것 같은데요?

[기자]네 발견된 연기문에는 육군병원이 옮겨진 후 사찰과 각 법당, 암자 등이 전부 무너지고 깨져서 불가형언중,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고 처참한 상황을 기록했는데요.

처음 육군병원을 설립할때 절을 비우고 떠나라는 국군의 말에 스님들은 부처님을 모신 도량을 떠날 수 없다며 통도사에 남아 부상병 치료를 도왔는데, 그 수가 5백명에 이릅니다.

또 전각과 산내 암자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로 가득했고, 치료를 받다 숨진 병사가 매일 10여명이 넘었으며, 심지어 통도사 명부전은 군교회로 사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의 말입니다.

[인서트]현문스님/ 통도사 주지-“"미륵불 부처님 탁자위에 재떨이를 갖다 놓고 군인들이 구둣발로 올라가서 담배피고 재를 털고 경첩 등 성보를 가지고 이런 걸 뜯어서 휴지하고 불쏘시개 한거야. 그때 유실된게 엄청나게 많아 설법전 자리가 옛날 텃밭이었거든 설법전 짓기전까지는 텃밭이었어. 이 텃밭에 소를 잡아먹었다고..."

[앵커]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국방부 등 정부 기관에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요?

용화전 미륵불에서 나온 연기문

[기자]네, 안타깝게도 정부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참전하고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통도사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고 박규원 소위는 70년만에 전사자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현문스님 말 이어서 들어보시죠

[인서트]현문스님/통도사 주지-“그 시대 어렵게 살던 스님들이 정말 국가를 위해서 우리 국민을 위해서 이렇게 살았는데 하나도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정말 국가가 우리를 우습게 봤고 그래서 안타깝다. 종단 차원에서 밝혀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기자]통도사는 내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육군병원 뿐 아니라 모든 전사자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한편, 호국불교의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려 나갈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울산에서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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