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9월 9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이 시대의 부르나 존자로 불리셨던 무진장 스님.

특히 일곱 가지를 소유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고수해서 ‘칠무(七無) 스님’이라 불린 무진장 스님.

스님은 생활의 편안함에서 오는 나태함을 경계하고 청빈하고 가난한 수행자로서의 품위를 지키셨는데요.

무진장 스님 입적 6주기를 추모 다례재가 지난 3일 조계사에서 열렸습니다.

오늘은 제주출신인 무진장 스님의 청빈한 삶을 이병철 기자가 전한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영진] 우선 무진장 스님이 고향이 제주라면서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본적이 제주시 건입동이고 출생지가 교래리라고 합니다.

스님은 지난 1932년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 때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옆구리에 늘 소설책을 짊어진 문학도를 꿈꾸던 학생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 왔지만 허무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천정벽력 같은 소식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스님은 불교에 귀의하게 된 듯합니다.

[고영진]그럼, 한국전쟁 후 아버지의 별세 소식에 인생 무상을 느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되셨나요?

[이병철] 출가라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 맺어질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당시 스님은 범어사 동산 스님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범어사에서 공양주와 갖은 궂은일의 행자생활을 3년 여 동안 한 스님은 지난 1956년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받는 자’라는 뜻의 ‘혜명(慧命)’이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1959년 1년 여 동안 스님은 당시 제주시 칠성로에 있는 정광사에서 생활을 할 무렵이었는데요. 도내 불가에서는 ‘괴짜 스님’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지근에서 지켜봤던 현 천룡사 주지 향운 스님은 “무진장 스님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자신이 집이 아닌 곳이 없다하여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한편 매일 같이 새벽에 사라봉에 올라 뭐라 알 수 없이 경전을 독송하는 등 삼매에 심취한 모습이 일반인들이 보기엔 미친 듯이 보였다”고 그래서 ‘괴짜 스님’이라 불렀다고 회상했습니다.

[고영진] 스님의 법호가 무진장인데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면서요?

[이병철] 스님은 손재주가 뛰어나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뭐든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였는데 범어사 주련의 글을 동산 스님이 쓰시고 무진장 스님이 서각을 했다고 합니다.

동산 스님이 이를 보고 스님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칭찬하여 ‘무진장(無盡藏,)이란 법호를 내린겁니다.

그러니까. 불교용어로 아무리 꺼내어 써도 다함이 없는 지혜의 창고라는 의미입니다.

이후 스님은 1960년 3월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습니다.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이수한 이후 서울 동국대 불교대학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를 시작하면서도 6년 여 동안 탑골공원에서 거지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매일 같이 법문을 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 당시 거지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몸소 느끼며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중 속에 포교 밖에 없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효대사도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백성과 천민의 벗이었죠.

가난한 사람,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고 하는데요.

원효대사가 백성들에게 다가가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 교화를 시도한 것처럼 무진장 스님도 그런 분이셨던 겁니다.

무진장 스님은 태국으로 건너가 1968년 방콕 왓 벤타마보핏 사원에서 남방불교를 연구한데 이어 일본 경도대학 대학원에서 천태교학을 공부했습니다.

귀국한 스님은 본격적으로 포교를 대중화하고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이를 기초부터 다지기 시작한 밑거름으로 조계종 총무원에 포교원 설립을 적극 요청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님의 끈질긴 노력 끝에 1980년 포교원이 설립되고 초대 원장에 석주 스님이 주석한 후 무진장 스님이 2, 4대를 역임하며 현재의 포교사 제도 및 교육 체계를 이루는 등 포교의 근간을 이뤄나간다.

이어 스님은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된데 이어 2008년에 종단으로부터 대종사 품계를 받았습니다.

2010년에 서울 조계사 회주로 추대되는 등 무진장 스님은 40여 년을 조계사에 주석하며 불교 발전과 대중포교에 평생을 헌신했다.

[고영진] 무진장 스님은 스님들이 많이 입는 회색이 아닌 괴색을 입기를 고집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뭔가요?

[이병철] 네 저도 그게 아주 궁금했는데요. 무진장 스님의 상좌인 현파 스님에게 여쭤봤는데요.

현파 스님에 따르면 “무진장 스님은 태국에서 공부 할 당시 남방불교가 부처님 재세시와 가장 근접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며 “가는 마지막 수의도 회색이 아닌 ‘밤색’을 입혀 드리고 불국토로 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스님은 또, 평생 상좌를 두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현재 상좌로는 사회운동에 앞장선 학승이자 승려시인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장이신 진관 스님, 그리고 애월읍 신엄 반야사 주지 현파 스님, 고향이 제주이자 대불련 출신인 전 범어사 연수국장이신 오산 스님 등입니다.

처음에는 상좌를 안 두기로 유명했던 무진장 스님입니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청하며 눈 속에 선 채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굳은 결의를 보인 혜가(慧可)대사처럼 말입니다.

한번은 한 수좌가 상좌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지만 무진장 스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굳은 결의를 보이고자 귀를 잘랐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진장 스님이 법자리에 오르면 신도들에게 “귀가 없는 수행자를 보면 꼭 삼배를 하라”고 당부한다고 합니다.

[고영진] 무진장 스님은 한국불교의 본사라는 조계사에서 40년을 주석했다면서요?

[이병철] 한국불교에서 조계사란 어떤 곳입니까.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이자 한국 근대 불교운동의 중심지입니다.

그렇기에 불교 정치의 1번로 바람 잘 날 없는 곳에서 평생 청빈한 삶으로 ‘일곱 가지 그러니까. 사찰, 여기서 사찰은 주지입니다. 그리고 돈, 솜옷, 모자, 목도리, 내복, 장갑이 없는 스님’으로 주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일념으로 포교에 진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근본도량인 조계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듯 합니다.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 당시 타인에게 자신의 방에서 끌려 나오시더라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불교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포교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염원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강직한 성품으로 일체의 주지직을 사양하고 대부분의 삶을 포교에만 전념했습니다.

평소 “시줏돈을 함부로 쓰면 큰 죄”라며 수행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근검절약을 강조했습니다. 비슷한 일화로 스님은 모자를 평생 쓰지 않으셨는데 “모자를 쓸 거면 머리를 깎지 말지”라며 삭발한 그 자체가 수행자의 여법한 모습이라고 늘 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으로 일체의 주지직, 평생 봄․가을 춘추복으로 겨울과 여름을 나셨고, 춥다고 솜옷과 목도리, 내복, 장갑 등을 일체 걸치지 않으시는 등 한 평생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고영진] 마지막으로 스님의 출가의 삶을 정리해 주신다면?

[이병철] 무진장 스님은 출가의 삶 58년 동안 ‘마음이 어리석으면 그것이 범부이고 한 생각 깨달으면 그게 곧 부처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깨달음)을 닦는 종교다’라고 정법만이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무진장 스님의 생일인 음력 9월 2일 애월읍 신엄리 반야사는 오는 10월 6일 추모법회를 마련합니다.

이날 추모법회에는 권기종 동국대 명예교수를 초청한다고 하니, 무진장 스님을 추억하고 다시 불교의 참된 진리를 듣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고영진] 마지막으로 제17회 무연분묘 위령천도재가 봉행된다면서요?

[이병철] 사회복지법인 춘강이 마련한 제 17회 무연분묘 무주고혼 위령 천도재가 9월21일 오전 10시 충혼묘지 주차장에서 여법하게 봉행됩니다.

춘강정사 주지 수상 스님을 비롯해 성천 스님과 여러 스님들이 전통불교의식으로 호국영령과 무연분묘 무주고혼 위령들을 위한 봉행합니다.

그리고 옥불사 주지 성천 스님이 법문을 하고 광명사 연화합창단의 음성공양도 마련됩니다.

한라산 해발 600m에 자리한 아흔아홉골에 후손 없이 쓸쓸히 방치된 6만여 분묘의 무주고혼의 넋을 달래는 천도재는 매련 거행되고 있습니다.

[고영진] 지금까지 한주간 불교계 소식이었습니다. 이병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이병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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