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입니다’ - 불교계 소식

●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8월 26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지난주 제주불교계의 대 화주이신 대원각 보살 수행이야기에 이어 쌍두마차인 임덕희 보살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끝마쳤는데요.

오늘은 남편의 짧은 명을 길게 잇고자 부처님의 공덕에 의지해 가사불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지난주 다 못 들은 임덕희 보살님의 이야기를 이병철 기자가 준비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영진] 지금의 제석사에서 가사불사를 하며 남편의 건강을 발원했는데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원당봉 정상과 불탑사 5층 석탑에서 기도를 해서 자신을 낳았다는 원당봉과 불탑사를 찾아가 볼 것을 권했습니다.

당시 불탑사는 1948년 발발한 4․3으로 인해 소실돼 스님과 신도들은 삼양마을로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5층석탑 주변으로는 관리가 허술했습니다. 말들과 소들의 배설물 등으로 지저분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임 보살은 “돈이 없었지만 5층석탑 주변만큼은 깨끗이 하고 싶었다”고 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불탑사 주지 덕성화 스님과 논의한 끝에 화주가 된 임 보살은 스님 다섯분을 모시고 일주일 동안 기도를 봉행하게 됩니다.

그 시줏돈으로 불탑사 주변에 말과 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산담을 쌓은 후부터 불탑사는 본격적인 불사에 돌입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고영진] 제석사 신도가 불탑사에 가서 불사를 했으니 제석사가 조금은 섭섭했겠네요.

[이병철] 네 당시 임덕희 보살의 다녔던 재적사찰인 제석사 창건주 고자선화 보살이 “자기 절은 놔두고 남의 절에 가서 불사를 한다”고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이에 임덕희 보살은 당시 초가집 법당이었던 제석사 법당을 헐고 화주로 나서 신도마다 1인당 300원 씩 시주를 받아 새롭게 법당을 짓고, 요사채 등을 조성하게 됩니다.

[고영진] 한 사찰의 불사를 진행하기도 힘이든데 두 곳 사찰의 불사까지 하셨다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한국불교 역사에 아픈 상처인 조계종과 태고종단이 분규가 일어나죠?

[이병철] 네 맞습니다. 임덕희 보살님이 불탑사와 제석사의 불사를 마친 후 1950년 중반 조계종․태고종단 간의 분규가 일어납니다.

조계종에서는 이를 ‘정화’라고 하고, 태고종에서는 ‘법난’이라고 하는데 각기 입장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죠.

당시 전남 장성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한국불교 청정성 회복에 힘쓰셨던 송만암 스님은 분규가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그 무렵 조계종단이 종조를 태고보우에서 보조지눌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고 태고종 전신인 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합니다.

송만암 스님은 1957년 1월 열반에 드셨는데 사리 8과가 나왔습니다.

제주불자들이 스님의 사리 1과를 제주에 모시겠다는 의견이 모이면서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에 보림사 창건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고영진] 그럼 보림사 창건에도 임덕희 보살님이 큰 역할을 하신 거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당시 조계과 태고종 스님 간 반목이 심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임덕희 보살은 불자들을 정광사, 그러니까 지금은 사라졌지만 제주시 칠성통 인근에 있던 사찰입니다. 이 사찰에서 ‘불교친목회’를 조직해 한달에 정기법회를 봉행하고 기도비를 적립해 나갔습니다.

당시 불교친목회에 100만원이 조성됐는데 당시로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이에 임 보살이 보림사의 터를 시주한 후 친목회비로 요사채를 짓고 3년 동안 송만암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봉안하게 됩니다. 이어 당시만 해도 여법한 대웅전을 짓고, 그 옆으로 시왕전을 임덕희 보살과 고정삼 보살의 시주로 불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고영진] 보림사를 장엄하게 낙성하고 임덕희 보살이 남편이 있는 일본으로 밀항을 하셨다면서요?

[이병철] 네 이에 앞서 임덕희 보살은 제석사와 불탑사 중창불사를 마치고 일본으로 밀항하는 쪽배를 타게 됩니다. 32살에 처음 일본으로 밀항한 겁니다.

당시 70여명이 쪽배 밑에 숨어 그야말로 숨 쉴 틈만 남겨놓은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파를 만나 쪽배에서 “빠지직”하는 소리에 밀항자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덕희 보살은 ‘부처님이 우리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관세음보살”만 죽기 살기로 염했다고 합니다.

임덕희 보살의 갸륵한 정성이 부처님에게 전해졌는지 그 쪽배는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닿자마자 파산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밀항으로 걸려, 일본 수용소에서 1년 동안 생활하는 등 모진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역민들에게 ‘큰 어머니’ 같은 역할 한 덕분에 이러한 희생과 봉사가 후에 제주불교 대중화에 큰 밑거름이 됐고, 각종 불사에 큰 주춧돌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임덕희 보살은 수용소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절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밀항으로 수용소에 함께했던 제주도민들에게도 임덕희 보살의 불심에 감화되어 많은 이들이 불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고영진] 그럼에도 또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셨다면서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39살에 그때도 밀항하다 대마도에서 걸리닌 등 몇 차례의 실패에도 임 보살은 밀항에 성공해 안정적으로 정착합니다.

임 보살은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돈을 아꼈지만 불사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관음사는 1948년 4․3으로 부처님의 무릎이 다 타버린 상흔이 오롯이 남아, 언젠가는 불사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1955년 신관음사(현 보현사) 불사에도 동참을 했지만 임 보살이 일본에 있을 무렵에는 관음사 중창불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일본에서 관음사 대웅전의 탱화 등을 희사했고, 그 다음에는 제주에서 당시 관음사 주지 향운 스님이 임 보살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즉, 종각 불사에 화주가 되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범종 불사의 반값인 250관에 달하는 불사금을 고이 담아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영진]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면서요?

[이병철] 네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49재까지 마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임 보살은 남편의 유골만큼은 제주도에 모시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보림사에 모시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임 보살은 남편을 위한 도량을 창건해야겠다는 일념 하에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현 제주시 아라동 덕흥사 부지를 선택합니다.

현 덕흥사 주지 상허 스님은 사라봉 소재의 보림사로 출가하여 수행하면서 도화주였던 임덕희 보살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임 보살은 영실 오백장군의 기운을 끌어오는 불사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덕암 스님의 뜻을 받들어 오백나한 도량을 조성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1977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1981년 9월에 오백나한 조성 불사까지 완료되어 많은 불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덕암 스님의 증명으로 산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임 보살은 덕흥사에 오래 주석하지 못했고, 더욱이 그린벨트가 풀리지 않아 불사가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고영진] 그 무렵 임덕희 보살님은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역임하셨던 묵담 스님을 친견하게 됐다면서요.

[이병철] 네, 하루는 스님이 “제주도에 미륵부처님을 모셔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으니 임 보살이 맡아주게”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때마침 관음사를 나온 비구니 스님들이 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된 상황에 도움을 요청 하던 터였습니다.

처음에는 용화정사를 창건보다는 묵담 스님의 말씀처럼 ‘미륵부처님’을 제주에 조성하고자 하는 원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임 보살은 1988년 옛 제주상고, 현 제주중앙고와 제주대 학생들이 오가며 미륵부처님을 볼 수 있도록 제주시 월평마을 초입에 조성하게 됩니다.

[고영진] 제주지역 불사에 임덕희 보살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데요. 군포교와 새싹포교에도 일익을 담당하셨다면서요?

[이병철] 해군 제주방어사령부에 군법사가 처음 부임한 것은 지난 1989년입니다.

제1대 진상 법사가 부임해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이후 장병들에게 호국불교를 전승한다는 기치를 세웠지만 포교할 법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상법사가 임 보살의 소문을 듣고, 뵙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임 보살도 용화정사 불사를 하다보니 불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 보살은 “내가 죽기 전에 불교유치원을 마련, 어린 불자 새싹들을 위해 불사를 하고 눈을 감더라도 감고 싶다”라는 원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언니 임덕향 보살을 비롯해 온 가족들에게 불교유치원 건립 원력을 기원해 지난 1991년 해봉사 부지를 매입, 법당을 건립한 후 그 안에 부처님과 탱화 등을 조성했다. 그 옆에는 연면적 1462㎡규모의 해봉교육관을 건립했고, 1992년 1월 해봉유치원 설립을 인가 받게 된다.

임 보살은 임종하는 그날까지 해봉유치원 명예원장으로 있으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영진] 임덕희 보살님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제주시 월평동 삼광사도 마지막 불사하며 삶을 회향하셨다면서요?

임 보살은 일본으로 밀항시 관세음보살을 불러, 새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었듯 관세음보살의 은덕을 기리고자 했습니다. 1970년 후반 관음사에서 재무 소임을 맡았던 현명 스님 지금의 현 삼광사 주지과 인연으로 말년에 부처님과의 약속인 천 관세음보살 조성 원력을 세우게 됩니다.

지난 1992년 12월 삼광사는 천막법당 개원을 갖고, 천 관세음보살 조성하면서 1998년 2월 삼광사 삼존불 점안 및 개원법회를 봉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임 보살은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 삼광사 창건불사에 특별한 애정을 쏟아내며 대웅보전을 비롯한 천 관음보살을 봉안하며 삼광사의 사격을 높이고, 수행도량으로 일신하게 만드는 등 임덕희 보살의 이름은 두고두고 제주불교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고영진] 임 보살님은 그럼 언제 임종을 맞게 되시나요?

[이병철] 임 보살은 그렇게 제주불교에 마지막까지 힘을 쏟다가 지난 2004년 1월 22일 아미타부처님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향년 82세였습니다. 임 보살은 해방 이후 지난 50여 년 간 도내의 크고 작은 불사에 동참하여 제주불교의 화합과 중흥에 헌신한 대표적인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제주불교의 대모의 빈자리를 느낀 제주불자들이 그해 4월 22일 ‘덕희봉사회’를 조직한 이래 10여 년이 흐른 지금, 덕희봉사회의 명성은 불교계 뿐 아니라 전도에 걸쳐 소문이 자자하게 됩니다.

평생 제주불교를 헌신했던 임덕희 보살의 원력이 현 덕희봉사회원들에게 전해져, 봉사단원마다 불자의 길을 실천하고 봉사로 자비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영진] 지금까지 한주간 불교계 소식이었습니다. 이병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이병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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