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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에서 찾은 신미대사의 자취
홍진호 기자 | 승인 2019.08.20 16:35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는 내용의 영화 ‘나랏말싸미’가 극장에서 선보인 것을 계기로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불교의 역할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책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가 출간돼 대중적 관심을 낳고 있습니다.

보도에 홍진호 기자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조선 최초의 한글 대장경 ‘월인석보’를 즉위 5년인 1459년에 간행합니다.

세종이 펴낸 ‘월인천강지곡'의 월인과, 자신이 지은 한글경전 ‘석보상절’의 석보를 합편한 월인석보는 아버지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세조가 세종의 뜻을 이어받은 불교 서적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 반포 후 12년 만에 나온 한글 대장경은 훈민정음 창조에는 세종이, 배포에는 세조가 앞장섰으며, 그 배경에는 불교가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냅니다.

[범종 스님/ 안동 광흥사 주지] 

“세조가 아니면 불교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내지는 한글을 이렇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한글을 배포 하는데는 세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한 분 중에 한명이라고 봅니다.”

이와 관련해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의 저자 정진원 교수는 “석보상절 뒤에는 신미대사의 동생인 김수온의 그림자가, 월인석보 뒤에는 신미대사가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말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집중된 한글역경사업의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정 교수는 “세종과 세조 모두 불교학과 언어의 천재이지만 훈민정음 반포 후 불과 10개월 만에 24권의 석보상절이 완성이 되고, 곧바로 ‘월인천강지곡’이 편찬된 것은 당대 집단지성의 힘이며, 이 중 ‘월인석보’는 신미대사가 주도했을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정진원 교수/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훈민정음 반포한 지) 10개월 만에 석보상절 24권이 완성이 된다는 거 지금으로서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석보상절을 보고 아버지 세종이 600수에 가까운 월인천강지곡을 짓습니다. 그러니깐 이거는 정말 이분들이 불교학과 언어학의 천재라고 하더라도 평생의 역작으로 하기에도 이 책 한권 내는데 3~40년 걸렸습니다. 대단한 거죠. 그렇다면 반드시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집단지성의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영화 ‘나랏말싸미’ 제작에 이어 이번 신간 발간에도 큰 도움을 준 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유처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은 최근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두고 빚어진 역사왜곡 논란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 ‘나랏말싸미’의 내용 중 80%이상이 역사적 고증을 거쳤음에도, 대한제국 형성 후 만들어져 굳어진 잘못된 역사관이 논란을 불러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범종 스님/ 안동 광흥사 주지] 

“역사를 공부하면 다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역사를 모르는 지금에 있는 어떻게 보면 대한제국이 형성 된 이래로 한글에 대한 불교적으로 있던 내용들 다 배제를 시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 형성을 했던 기독교 선교사적인 입장에서 오다 보니깐 모든 불교학자들이 서구적인 교육을 받아서 지금에 오다 보니 이런 형상들이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스탠딩] 훈민정음 반포 직후 간행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대를 이어 완성된 ‘월인석보’는 오늘날의 한글이 조선왕조의 전폭적인 지원과 당대 스님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물임을 소리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BBS NEWS 홍진호입니다.

(영상취재=최동경) 

홍진호 기자  jino413@naver.com

<저작권자 © BBS불교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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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와 2019-08-23 18:04:52

    왜정때 식민지 지배권을 정당화 하기위해 조선역사를 조선사편수회가 대륙사에서 쪼개어 산동지역,만주,한반도에 이식시켰으며 옛조선의 글씨를 한글이라는 괴뢰용어를 창작하여 왜왕이 옛일본 문자인 신대문자를 본따 한글을 창제했다 왜곡시키려다 패망으로 무산된것을 조선어학회가 친일행적을 숨기기위해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날조한것입니다.
    훈민정음 동국정운은 조선의 정체성확립을 위해 단군조선 이전부터 존재한 옛 국문인 글씨를 28자 취합해 말씨의 발음을 복원해 천자문 음의 표준발음을 정한것입니다.
    정신들차립시다.   삭제

    • 윤혜영 2019-08-22 18:53:23

      역사는 새로운 사료와 근거에 의해서 끈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진사대부들의 조선건국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고려의 백성들이었기에 불교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 왕이나 왕비에게까지도 불교는 일상의 생활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한 상황을 사대부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숭유억불정책을 폅니다.그래서 조선시대 불교의 업적은 많이 폄하된 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명대사나 승병들의 업적도 인정받지 못한 많다고 들었습니다. 역사와 진실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삭제

      • 역사왜곡의 근거 2019-08-22 18:15:53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왕도 신하도 볼 수 없고 후대의 왕과 신하도 기록을 볼 수 없어 눈치를 보지 않고 기록할 수 있었으므로 객관적인 책이라 볼 수 있다. 고로 한글창제는 세종대왕의 단독업적임   삭제

        • 역사왜곡의 근거 2019-08-22 18:15:09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두 가지 구문 참조. 세종 25년(1443)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라는 구문과 문종 즉위년(1450) '대행왕(세종대왕)께서 병인년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는데'라는 구문이다.
          병인년은 1446년을 뜻하는데, 세종대왕이 1443년 한글 창제 후 3년 만에 해설서와 함께 이를 반포한 해다. 즉, 역사서에는 세종대왕이 '친히' 한글을 창제했다고 적혀 있으며, 세종대왕이 신미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된 시기가 한글을 창제한 후였다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뉴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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