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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 보살, 4.3으로 불타버린 관음사 재건 ‘진두지휘’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입니다’ - 불교계 소식
이병철 기자 | 승인 2019.08.19 11:57

●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8월 19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지난주 자식을 살려준 부처님의 공덕을 갚는 일이라면 온 몸을 다해 헌신한 대원각 보살님의 신심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대원각 보살님은 4.3으로 불타버린 신 관음사를 재건하면서 진두지휘하셨는데요.

지난주 다 못 들은 대원각 보살님의 이야기를 이병철 기자가 준비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영진] 현 보현사를 짓고 부처님을 봉안하는 봉불식도 여법하게 봉행했다면서요?

[이병철] 네, 그 다음해인 1955년 4월 16일 봉불식을 거행했는데 범어사에서 부처님을 모셔다가 이운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제주시 서부두에서 출발, 도남 보현사까지 이동했는데 불자들은 석가모니불을 정근하며 2줄로 모두가 하얀 한복을 입고 어깨에는 설배를 맸습니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지금의 종합경기장에서 탑동까지 이르는 것으로 어떤 제등행렬보다 더 여법하고 장엄했다고 합니다.

[고영진] 대원각 보살님이 이를 진두지휘 하셨다면 굉장히 여장부 같은 분이셨겠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당시 관음사 총무였던 연종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원각 보살의 세 번째 사위가 부처님 이운을 진두지휘했는데 아주 똘똘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연종 스님, 그리고 전 관음사 주지 향운 스님, 대원각 보살의 장남인 이상진 씨의 증언에 따르면 공통점은 ‘대단한 여걸이자 머리가 대단히 좋은 분’이라고 기억했습니다.

이상진 씨는 “포목점을 할 당시 계산 때문에 아버지가 주판을 튕기시려면 어머니는 금세 암산으로 계산을 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셨던 분”이라며 “할아버지가 5형제이지만 형제간 사이는 썩 좋지 않으셨지만 세 번째 할아버지의 둘째 며느리인 우리 어머니가 친화력으로 친족 간 화목을 이뤄내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상진 씨는 “이웃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늘 지역 주민들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아서 대사를 치르도록 부탁했다”며 “그러면 어머니는 그 집안 형편에 맞게 준비할 물품을 일러주고 그 후의 대소상까지 일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역민들에게 ‘큰 어머니’ 같은 역할 한 덕분에 이러한 희생과 봉사가 후에 제주불교 대중화에 큰 밑거름이 됐고, 각종 불사에 큰 주춧돌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고영진] 한라산 입산령이 해제된 후 관음사가 재건되는데도 대원각 보살님이 큰 일을 하셨겠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이 같은 대원각 보살의 친화력과 대장부 같은 추진력으로 입산금지령이 해제된 후 1964년 관음사 재건에 다시금 대화주의 큰 짐을 짊어지십니다.

[이병철] 관음사는 지난 1964년 본격 대웅전 중창불사를 위한 기공식을 갖지만 결국 뼈대만 남겨놓은 채, 도민들의 시주금으론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그 무렵인 1968년 향운 스님이 관음사 직무대행으로 부임한 불사 타계책으로 재력 있는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당시 68이였던 대원각 보살과 윤해탈인 보살이 함께 현해탄을 건너게 됩니다.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 등으로 가서 관음사의 재건 의미를 설명하자 재일동포들은 대원각 보살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대원각 보살의 원력으로 재일동포의 시주를 받아 관음사가 폐허된지 20년 만에 지난 1969년 낙성법회를 봉행하던 날, 대원각 보살의 눈가에는 환희심의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영진] 수많은 제주불자들의 노력으로 관음사의 재건이 이뤄졌네요. 그럼 관음사도 1970년대부터 본격 불사가 이뤄졌겠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1970년에 대자행 보살과 함께 현 극락전인 선방을 개원했고, 김영희 거사의 힘을 보태 관음사 부지5만평을 시주 받았고, 1971년 오순실 보살의 시주로 현 삼성각인 영산전이 준공됐습니다.

또, 이방훈․강원필․이재은 불자 등의 시주로 1972년 해월각 준공, 1973년 김혜정 보살의 시주로 사천왕문을, 1974년 문대선행보살의 시주로 일주문 그리고 1975년 종각이 낙성되는 등 관음사가 본사로서 여법함을 갖췄습니다.

그 중심에는 늘 대원각 보살이 있었습니다. 한라산이 없는 제주를 상상할 수 없듯이 대원각 보살이 없는 관음사는 생각 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영진] 이렇게 관음사 불사를 대원각 보살이 나서서 하셨기에 당시 관음사 주지 스님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계셨겠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당시 관음사 주지였던 향운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원각 보살은 큰마음을 지닌 나에겐 어머니같은 분이셨다”면서 “대원각 보살은 추진력과 친화력이 남달라 많은 신도들이 따르는 등 말이 화주지 주지 못지않은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향운 스님은 1976년 관음사 주지 소임이 만료됩니다. 이 후에 조계종 총무원 소임을 보다 다시 제주로 내려오셨지만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원각 보살이 향운 스님을 모시기 위한 1980년 ‘영주암 즉 도남 초등학교 인근의 현 천룡사를 불사하게 됩니다. 그 당시 대원각 보살님의 나이가 81세였습니다.

[고영진] 대원각 보살님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보살의 삶이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관음사가 지난 1936년 화재로 인해 소실 후 본격적인 관음사 중창불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 대원각 보살은 1948년 4․3으로 소실된 관음사를 다시금 일으키고자 1954년 ‘신 관음사’ 낙성 그리고 1964년 관음사 대화주가 되어 20여 년 동안 관음사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1974년 완공될 무렵의 관음사 일주문

그리고 마지막 1980년 천룡사의 불사까지 불가 입문 후 70여 평생 동안 제주불교 발전과 관음사 본사의 중흥을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진정한 제주불교계의 대모였습니다.

대원각 보살은 1991년 5월 10일 향년 92세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제주불교 발전의 염원을 안고 눈을 감았다고 하십니다.

[고영진] 대원각 보살님이 제주불교 발전에 큰 공덕을 쌓은 만큼 보살님이 49재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을 했을 것 같은데요.

[이병철] 네, 대원각 보살은 죽어서라도 인연이 닿았던 사찰이나 스님에게 부처님 법문 들으며 극락세계로 가시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49개에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에서 초재와 49재 그리고 당신이 도화주로 창건한 보현사와 천룡사에서 5재를 봉행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인연이 깊은 약천사 회주였던 故 혜인 스님과 지금 관음사 회주이신 우경 스님의 사찰인 김녕 백련사님에서 2~6재를 봉행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부처님의 법에 따라 불자의 삶을 다하며 한 편생을 제주불교 불사에 전념했던 대원각 보살의 49재에는 제주불교의 대모답게 도내 50여 명의 스님과 재가불자 1천여 명이 동참해 대원각 보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고 극락왕생을 기원했습니다.

제주불교의 산증이셨던 故 연종 스님도 대원각 보살님과 법선 스님에 공덕에 대해 잊지 않으셨는데요.

연종 스님은 “대원각 보살과 법선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관음사는 없었을 것”이라면서 “대원각 보살님과 법선 스님의 공적을 크게 사셨습니다.

[고영진] 정말, 대원각 보살님은 제주불교 대모셨네요. 그리고 대원각 보살님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분이 바로 임덕희 보살님이라면서요.

임덕희 보살님이 제주불교계 불사 산파 역할을 하신분이라면서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임덕희 보살은 일본에서의 관음사 시주, 덕흥사, 용화정사, 군법당 해봉사 부설 해봉유치원, 삼광사 창건화주의 역할을 했던 분이십니다.

[고영진] 임덕희 보살님의 아버지는 스님이었다면서요?

[이병철] 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로 참가한 백용성 스님이 임덕희 보살의 아버지의 출가 은사입니다.

임덕희 보살의 어머니 팔자에는 아기의 운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오빠 둘을 낳았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정성껏 기도해 1923년 음력 6월 14일 낳은 딸이 바로 임덕희 보살입니다.

임 보살의 심신이 굳건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머금고 자라난 임 보살은 19세에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편을 본 순간 “단명할 운명”이라며 “칠성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임 보살에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들어맞어 버렸습니다. 임 보살이 결혼을 한 후 남편은 누워만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0년도 못 산다는 의사에 말에 1년에 3번은 정성껏 칠성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남편이 39세면 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자 임 보살이 “그럼 어떻게 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스님들에게 가사불사를 하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으로 남편의 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임 보살이 결혼 후 10년 만인 29세에 당시 재적 사찰이었던 제주시 도남동 제석사에서 스님 25분을 모시고 보름동안 가사불사 법회를 봉행합니다.

임 보살은 당시 법당 소임을 맡으면서 남편이 39세를 넘어 장수하길 기원하며 일념으로 정성껏 부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당시 제석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무렵 광주에서 오신 덕명 스님이 임 보살의 손을 꼭 잡으며 “보살의 남편의 명은 걱정을 하지 말라. 당신이 살게 만들 것이다. 당신이 관세음보살로 화현해 이제부터 소원이 이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임 보살의 지극한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 받았으리라 믿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금강석 같은 신심으로 다음해에도 가사불사를 봉행합니다.

[고영진] 지금까지 한주간 불교계 소식이었습니다. 이병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이병철] 감사합니다. 

이병철 기자  taiwan0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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