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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 보살은 근대 제주불교 일으킨 ‘대모(大母)’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입니다’ - 불교계 소식
이병철 기자 | 승인 2019.08.19 11:17

●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8월 12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고영진]요즘, 무더위를 발심의 장으로 여기는 불자님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한달여 동안 제주불교의 근현대사에 주인공들의 수행이야기, 인생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매주 월요일 교계소식을 전하는 이병철 기자가 그 주인공들의 수행이야기를 갖고 왔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영진] 제주불교의 근현대사라면 그 당시 시대상황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우선 그 이야기부터 설명해 주시죠.

[이병철] 조선시대는 고려에 비해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절오백 당오백’이라는 고려시대 제주를 상징하는 표현이었을 텐데요.

하지만 1702년 이형상 목사의 극심한 불교 탄압에 그 형체가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 같은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불교와 무교는 더욱 습합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교탄압이 표면적으로는 위축됐지만 안으로는 민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가 1909년 안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하며 제주불교는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주 역사의 가장 큰 상처인 1948년 4·3의 광풍에 다시 주저앉고 맙니다.

당시 도내 90여개의 사찰 가운데 40여개 사찰이 직간접적으로 법당은 물론 요사와 객사 등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또한 14개 사찰에서 16명의 스님들이 희생당하는 등 사찰과 스님들의 피해는 제주불교 종교활동이 한동안 중단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고영진] 그럼, 제주불교가 4·3 등에 의한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는데 근현대사에서 제주불교 중창에 힘쓴 주역들이 이번에 소개되는 건가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4·3이후 황무지 같았던 제주에 부처님 법이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스님들이 불법을 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소임을 다했던 ‘화주(化主) 보살’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화주란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法緣)을 맺게 하고, 시주를 받아 절의 불사를 일으키는 이를 말합니다. 제주불교의 불사 산파 역할을 했던 故 대원각 보살 같은 분을 말합니다.

제주 법화사에서 일타스님과 상좌인 혜인스님 그리고 대원각 보살.

[고영진] 벌써부터 대원각 보살님의 삶이 궁금해지는데요. 어릴적 삶과 불교에 귀의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이병철] 청신녀 대원각(大圓覺) 보살은 속명은 정은이(鄭銀伊)로 1900년 제주시 건입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관은 동래이며 부친의 휘는 관오이고, 모친은 강씨입니다.

대원각 보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근면 온순하여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또한 효행심이 깊어 부모를 잘 섬겼으며 15세에 혼기가 차자 이웃이자 동갑내기인 이방훈(李芳薰) 거사와 혼인했습니다.

단란했던 가정에도 불운이 찾아들었는데요. 결혼 한 지 9년 만에 아들을 낳았지만 그만 아들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영아 생존율이 높지 않았던 시대였다고 하지만 딸들은 모두 건강하게 커 주었으나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까지 어린 아들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부모로서 비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요.

그렇게 대원각 보살은 전생의 무슨 업보인가 크게 낙심하여 그 기구한 운명을 끊고자 부처님 법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원각 보살이 34세 되던 해 지인이었던 정토화 보살의 인연으로 제주불교의 중창주 봉려관 스님과 인연이 닿았다고 합니다.

이후 대원각 보살은 1935년 결혼 20년 만에 네 번째 아들을 낳자 당시 관음사에 계신 안도월 스님에게 입양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법으로 아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던 것입니다.

대원각 보살이 불법에 귀의 후 아들의 성장만큼 더욱 불법에 대한 신심이 증장되어 갔습니다.

관음사를 원찰로 삼아 정성으로 부처님을 시봉하고 스님의 말씀에 따라 불사와 불법 홍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주불교를 함께 일으켰던 운명의 법선 스님과 인연이 닿게 됩니다.

[고영진] 그럼, 법선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병철] 법선 스님은 출가 전으로 남편을 잃고 안봉려관 스님을 만나 위로받으며 부처님께 귀의하게 됩니다.

봉려관 스님을 시봉하던 무렵 1909년 안봉려관 스님이 일으켰던 관음사의 전각들이 그만 안도월 스님의 대상(大祥)날인 1936년 화재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고영진] 그럼 관음사가 4.3이전에 이미 한 차례 전소가 됐었군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당시 법해 스님은 안봉려관 스님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제주시 산천단에 초가집을 짓고 부처님을 봉안, 관음사 중창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전남 담양에서 봉려관 스님의 법력을 익히 듣고, 한 보살이 찾아왔는데 그분이 바로 안봉려관 스님의 상좌인 성해 스님입니다.

성해 스님은 전남 담양의 최고 갑부인 국채웅의 외동딸로 이름은 국추였습니다.

하지만 성해 스님은 17살에 시집을 갔지만 5년 뒤에 남편이 세상을 뜨면서 인생무상을 느끼고 전국의 명찰에 큰스님을 친견하면서 그 연이 안봉려관 스님에게 까지 닿게 된 것입니다.

스님에게 감화 받은 성해 스님은 바로 봉려관 스님을 은사로 유발상좌가 되길 청했습니다. 성해 스님이 담양으로 떠날 무렵 안봉려관 스님은 법선 스님이 성해 스님을 따라 갈 것을 권합니다.

봉려관 스님이 법선 스님에게 이르길 “이제부터 성해 스님의 유발 상좌로서 이 집에 시봉과 대소사에 성심을 다하면, 오직 성심의 원력으로 관음사 중흥이 이뤄질 것이다”라고 어떠한 고행도 수행삼아 노력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법선 스님은 국채웅 거사 댁에서 법화경을 읽고 쓰는 등 불교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사찰에서 수행하듯 정진해 오던 중 1938년 봉려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게 됩니다.

국채웅 거사와 함께 봉려관 스님의 다비식에 동참한 후 국 거사로부터 평생 숙원이었던 관음사 중건의 약속을 받아내게 됩니다.

[고영진] 그럼, 1936년 화재소 소실됐던 관음사가 국채웅 거사의 도움으로 재건된 거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1941년 봄 국채웅 거사는 성해 스님과 법선 스님 편에 중건불사금과 도편수 등 목수 32인을 제주에 내려 보내 다시금 관음사를 재건하게 합니다.

이에 불교에 귀의한 10여년 동안 대원각 보살도 자연스럽게 법선 스님과 법연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화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대원각 보살은 1991년 입적하는 그날까지 70여년 동안 제주불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됩니다.

[고영진] 대원각 보살님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법선 스님과의 깊은 인연 이야기 더 해 주시죠.

[이병철]네, 당시 대원각 보살은 포목점을 했는데 넓은 아량으로 장사를 했기 때문에 포목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법선 스님이 전남 담양에서 내려올 무렵이면 관덕정 맞은편에 대원각 보살의 기와집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고 합니다.

TV와 라디오가 없던 시절, 법선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 설화’는 요즘의 국민 드라마 못 지 않은 큰 인기를 누릴 정도로 부처님 법이 생소했던 일반인들에게 불법에 귀의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대원각 보살의 집이 법당이었고, 포교의 장이었던 셈입니다.

[고영진] 이 같은 기쁨도 잠시였을 것 같습니다. 제주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아픔인 4.3이 발발하지 않습니까?

[이병철] 네 맞습니다. 많은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재건됐던 관음사가 1948년 4․3으로 토벌대와 무장대의 격전지가 되면서 토벌대에 소실되는 아픔을 맞게 됩니다.

4․3이 진정된 후 도내 사부대중은 관음사를 다시 재건하고 싶었지만 한라산이 입산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좌절의 다시금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법선 스님과 대원각 보살이 앞장서 1950년 초 관음사 불사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바로 現 도남 보현사로 당시는 ‘新 관음사’, ‘알 관음사’로 불렸습니다.

신 관음사 불사는 대원각 보살의 댁에서 불교 설화에 감화됐던 신도들이 큰 자산이 됐는데요.

당시 대원각 보살이 대화주로써 불사를 진두지휘하게 됩니다.

[고영진] 현 보현사를 짓고 부처님을 봉안하는 봉불식도 여법하게 봉행했다면서요?

[이병철] 네, 그 다음해인 1955년 4월 16일 봉불식을 거행했는데 범어사에서 부처님을 모셔다가 이운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제주시 서부두에서 출발, 도남 보현사까지 이동했는데 불자들은 석가모니불을 정근하며 2줄로 모두가 하얀 한복을 입고 어깨에는 설배를 맸습니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지금의 종합경기장에서 탑동까지 이르는 것으로 어떤 제등행렬보다 더 여법하고 장엄했다고 합니다.

[고영진] 대원각 보살님이 이를 진두지휘 하셨다면 굉장히 여장부 같은 분이셨겠네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당시 관음사 총무였던 연종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원각 보살의 세 번째 사위가 부처님 이운을 진두지휘했는데 아주 똘똘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연종 스님, 그리고 전 관음사 주지 향운 스님, 대원각 보살의 장남인 이상진 씨의 증언에 따르면 공통점은 ‘대단한 여걸이자 머리가 대단히 좋은 분’이라고 기억했습니다.

이상진 씨는 “포목점을 할 당시 계산 때문에 아버지가 주판을 튕기시려면 어머니는 금세 암산으로 계산을 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셨던 분”이라며 “할아버지가 5형제이지만 형제간 사이는 썩 좋지 않으셨지만 세 번째 할아버지의 둘째 며느리인 우리 어머니가 친화력으로 친족 간 화목을 이뤄내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상진 씨는 “이웃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늘 지역 주민들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아서 대사를 치르도록 부탁했다”며 “그러면 어머니는 그 집안 형편에 맞게 준비할 물품을 일러주고 그 후의 대소상까지 일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역민들에게 ‘큰 어머니’ 같은 역할 한 덕분에 이러한 희생과 봉사가 후에 제주불교 대중화에 큰 밑거름이 됐고, 각종 불사에 큰 주춧돌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고영진] 지금까지 한주간 불교계 소식이었습니다. 이병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이병철] 감사합니다. 

이병철 기자  taiwan0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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