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영화 '나랏말싸미' 논란을 계기로, 당시 상황에 관한 사료 분석과 추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불교계가 앞장서 신미 스님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정영석 기자가 전합니다.

 

한국불복장연구소 소장 경원 스님이 한 불상에서 나온 다라니 영인본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입니다.

복장유물인 다라니에 적힌 글귀 중 일부입니다.

깨알 같은 글자의 친필 주인공은 자신을 '신미'라고 소개합니다.

경원 스님이 30년간 연구해 펴낸 '불복장의 비밀' 책 속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시 신미 스님이 왜 주역이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갑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이 모두 사실상 '불교 국가'였다는 점부터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경원 스님/한국불복장연구소장(금산 극락사 주지): 그 당시에 중국(명나라),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전부 불교 국가였어요. 찬란한 불교 국가, 그 불교문화가 전부 중원이고 어디고 다 찬란하게 꽃폈고, 또 그 당시는 사대주의가 있었는데 상국인 명나라가 대단한 불교 국가였죠. 숭불 황제였죠. 그러니까 그러한 영향도 있었다고 봅니다.]

여러 문헌이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훈민정음 창제의 모델이 영화 나랏말싸미가 말해주듯 '범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유교 중심의 사회인 당시 조선왕조에서 범어에 능통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바로 불교 학승들이 범어에 능통했고, 그중에서도 신미 스님이 가장 탁월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경원 스님/한국불복장연구소장(금산 극락사 주지): 범어를 모방하고 범어를 본떴을 적에 그런 범어 기원설에 대해서 과연 이것에 전부 능통한 사람이 누구인가 했을 때 신미 대사라는 것입니다. 신미 대사와 10학승과 그 당시에 보통 범어를 하는 스님들이죠. 그리고 또 이 복천암 사적기를 보면 신미 대사도 집현전 학사로서 집현전에서 같은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했거든요. 세종의 청에 의해서요.]

세종이 죽기 전 임금 문종을 통해 신미 스님에게 내린 존호인 '우국이세 혜각존자'의 의미도 곱씹어 봐야 할 부분입니다.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의 우국이세는 바로 한글 창제의 공을 기린 것으로, 훈민정음이 세종과 신미 스님의 합작품이란 결정적 증거란 것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후 가장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 '월인석보'는 신미 스님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며 그 의미를 되묻고 있습니다.

[경원 스님/한국불복장연구소장(금산 극락사 주지): 그 당시에 학승이나 스님들은 불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불교 왕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그러한 세계적 조류에 맞춰서 불교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으로 정말 목숨을 걸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글을 창제하지 않으면 불교를 더 이상 존속하고, 전파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방대한 사료를 통해 신미 스님에 대한 시각을 넓혀온 경원 스님은 역사적 사실과 각종 추론을 따라가다 보면 신미 스님의 진정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조선 500년 격랑의 역사에 가려져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신미 스님의 뒤안길을 이제라도 불교계가 제대로 살필 때라는 지적입니다.

BBS NEWS 정영석입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