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백담사 만해마을에 세워진 만해 한용운 선사의 흉상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할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설리도화편편홍(雪裏桃花片片紅)

대장부 이르는 곳 어디든 고향이거늘

오래도록 나그네로 지내는 이 그 얼마나 많은가

한 소리 사자후로 삼천 세계 깨트리니

눈 속에 핀 복사꽃 잎 송이송이 붉도다

                                     - 오도송(悟道頌),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금강산 건봉사는 창건 당시부터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도량이었다. 신라 사찰 건봉사는 고구려 땅에 창건됐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강한 상징성을 갖는다. 전쟁의 한 가운데서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 평화를 기원하는 사찰이 창건 당시의 건봉사였던 것이다. 발징 화상이 주도한 제 1차 만일염불 결사 역시 불, 보살님의 가피로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의 발로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한 의승군 참전 역시 백성의 희생을 막기 위한 생명 제도와 구국의 결의였다.

건봉사의 천년 역사 저변에 흐르는 중생 제도와 구국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저력을 발휘한다. 일제 강점기 건봉사는 민족정기를 굳건하게 지켜내고 항일 독립 전쟁을 이끌기 위한 인재 육성, 국채보상운동, 실질적인 독립 전쟁으로 발현한다. 그 중심에 만해 한용운 선사와 선사의 사제 금암(錦巖)이 있다. 만해 선사는 은사 만화 관준(萬化 寬俊) 대선사로부터 선맥(禪脈)을 잇고, 선사(禪師)로서 조선 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수행자로서 구도의 삶을 살았다. 동시에 만해 선사는 사제(師弟)인 금암 의훈(錦巖 宜勳)과 함께 저물어가는 조선 국운(國運)을 되살리고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해 치열한 독립 전쟁의 길을 걸은 지사(志士)로서의 삶을 살았다.

은사 만화 대선사는 1881년 제 4차 건봉사 만일염불회를 결사한 스님으로, 대 화재 후 건봉사 중건에 전념했고, 문하에 용상(龍象) 같은 제자 1,000여명을 거두었다. 만화 대선사는 “만해 선사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한다.” 만해 선사는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 선방에서 한 철을 지내고 금강산 건봉사 만일선원에서 세 철을 눕지 않고 용맹정진 팔만사천 번뇌마군과 찢기면서도 싸워 이기셨습니다.” - 《만해학보》 제 2호 〈만해 한용운 회고〉 - 박설산(朴雪山), 1995. (일반적으로는 ‘만해 선사는 1917년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이뤘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만해 선사는 추상같은 기개로 일제와 맞섰다. 만해가 독립 항쟁을 펼쳐 가며 대중을 위한 방편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고 전해진 것은 시(詩)였다. 물론 비밀결사체 만당(卍黨), 3.1 만세 항쟁 등 실질적인 항쟁도 빼 놓을 수 없지만, 만해의 시는 오늘날에도 그 기상(氣像)을 전하고 있다.

건봉사 천년 역사에 깃들어 있던 구국 애민 정신은 구한말 의병 활동으로 이어진다. 건봉사 스님들은 이미 구한말부터 일제에 맞선 항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건봉사 스님 창기가 여주 의병장 민용호의 비밀 편지를 가지고 운현궁으로 오다가 체포돼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편지 내용은 원산항에 있던 일본인과 각처의 일본 병사들을 쫓아내자는 편지였다.”〈독립신문, 1896년 8월 18일〉

구한말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건봉사 '창기 스님'의 이야기를 실은 독립신문 기사.1896년 8월 18일자.

건봉사는 일제 강점기 만해와 금암으로 이어지며 항일 독립 전쟁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뒷날의 얘기지만 1930년 5월 항일 투쟁과 불교 개혁 운동을 목적으로 불교계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이 조직된다. “불조직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조선 독립을 투쟁 목표로 한 만당은 만해스님이 저술하신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를 근본 강령으로 삼고 만해 선생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19명이 결속한 비밀결사체이다. 금암은 19명 조직 간부의 한 분으로 참여해 활동자금을 책임지고 계셨다.” “건봉사도 이십 명 정도의 청년들이 모여 조직(전국 불교전문 강원)을 결성하고 한용운 선생을 주축으로 조직된 만당에 적극 참여하였다.” 《뚜껑 없는 조선역사책》, 박설산(朴雪山),1994.

봉명학교 설립취지문. 황성신문. 1907년 1월 26일

건봉사는 1906년, 일제를 물리치고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해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설립한다. “‘봉명(鳳鳴)’은 소소(韶簫;중국 순임금이 요임금을 찬탄하기 위해 지은 음악)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날아오도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뜻을 같이하여 같은 소리로 찾아서 불교의 큰 방법도 연구하고 신학문 교육에 참여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 “비유하자면 보약을 달여서 우리 백성들을 치료하여 여윈 몸이 다시 건강해진다면 대장부들이 이 세상에 뽐내어 이 시대의 인재가 되리라. 그리하여 독립운동도 잘해내고 자유도 잘 누리게 되리니 어떤 적인들 굴복하지 않겠으며, 어떤 일인들 못 이루겠는가.”〈봉명학교 설립취지문, 황성신문(皇城新聞), 1907년 1월 26일〉

봉명학교는 신학문을 통해 독립 항쟁을 위한 인재들을 길러내고 불교 교육을 통해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된 신식학교다. 설립취지문은 진학순(秦學純), 김보운(金寶雲) 두 분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진학순은 교장 직책을 맡았다. 김보운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진신치아사리 탑비를 지은 ‘보운’ 스님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군(軍) 출신으로 이인영 대장 휘하에서 의병 투쟁을 하다 건봉사로 출가해 건봉사 독립 항쟁을 이끈 금암 의훈

봉명학교는 당시 금암 의훈을 회계원(會計員)으로 임명하고, 학교 재정을 맡겼다. 금암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의병투쟁에 헌신하다 건봉사로 출가했다. 5차 만일염불회 화주를 맡았고, 당시 건봉사 재정을 봉명학교에 투입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다. 이로 미루어 봉명학교는 만해 선사의 민족정신을 토대로 해서 설립됐고 운영은 금암 의훈이 주도했으리라.

봉명학교는 설립되자마자 독립항쟁사(獨立抗爭史)에 큰 자취를 남겼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3월 불교계의 참여가 확정되면서 서울, 경기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은 4월 건봉사 봉명학교와 만일염불회를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봉명학교 교장 진학순, 임원, 교사 등과 학생 40명, 스님과 사환 등 175명이 참여해 147원을 모금했다. 여기에 당시 건봉사 말사였던 유점사에서도 스님 59명이 참여해 53원을 모금했다. 이후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은 경남과 충남, 경기, 전남 등 전국으로 전개됐다.

건봉사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 불교계 국채보상운동 성과는 참여인원과 모금액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계 전체 참여 인원 1,277명 가운데 강원도는 234명으로 경남의 357명에 이어 두 번째, 모금액도 전체 797.97원 가운데 200.41원으로 경남의 268.54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사찰 수나 스님 인원을 고려하면 건봉사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은 놀라운 성과라고 하겠다.

건봉사와 봉명학교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은 건봉사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원효대사, 보조국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호국 정신이 발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대와 국운(國運)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며 그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자 했던 건봉사 스님들의 기상이 만들어낸 결과였으리라. “우리 동방예의지국이 하루아침에 외국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외국인들로부터 핍박 받는 것을 부녀자나 어린아이들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데, 갓을 쓴 선비나 머리를 깎은 스님들이 어찌 이 나라를 회복시킬 방책을 찾지 않겠는가.”〈봉명학교 설립취지문〉

1933년 4월 관동축구대회에 참가해 우승한 봉명학교 선수들 기념사진.

봉명학교 학생들은 만해 선사의 강연 등으로 민족정기를 가다듬었고, 오늘날의 유아, 초등, 중등학제를 통해 영어, 지리, 역사, 수학 등 신학문을 배웠다. 봉명학교는 연극, 가장행렬, 민속놀이, 축구 등 다채로운 교육 과정을 통해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노력은 실질적인 독립항쟁으로 이어졌다. 봉명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축구단은 1933년 4월 관동축구대회에서 우승한다. 관동축구대회는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축구를 매개로 지역 공동체와 백성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대회로, 1942년 일제가 강제로 폐지했다.

1934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봉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가장 행렬을 펼치고, 기습적인 만세 항쟁을 벌였다. 봉명학교는 이후 조선어 수업을 이유로 강제로 문을 닫았다.

봉명학교 교사와 학생들, 스님들은 1934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행사로 연극과 가장 행렬을 준비했다. 연극 제목은 ‘국경의 밤’이었고, 당시 봉명학교 교무를 맡았던 박종운 스님의 기지로 일제의 사전 검열을 피하고 공연됐다. 가장 행렬은 기습적인 만세 항쟁으로 이어졌다. 봉명학교는 1936년 조선어 수업을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았다. “조선어 시간에 토론이 있었는데, 결론은 돈으로 살지 말고 나라와 민족에 공헌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어 시간이 끝나자 교무주임과 형사가 교실로 들어와 조선어 책을 다 거둬갔다. 이것이 마지막 조선어 시간이었다. 그 후로 학교가 폐교되었기 때문이다...건봉사와 봉명학교를 강제로 떠나게 된 금암은 이후 고향 간성과 고성, 양양, 인제 지역을 돌며 설날에 모여 조상에게 떡국 한 그릇 올리자는 취지로 사람들을 만나 ‘기묘갑계(己卯甲契)’를 조직하고, 삼년 만에 수천 명을 모았다.” 《뚜껑 없는 조선역사책》

금암 의훈은 건봉사 살림을 맡아 하며 봉명학교를 설립해 민족의 미래와 한국 불교를 밝혀줄 인재를 길러냈다. 만해와 금암은 건봉사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항일 독립 투쟁을 펼쳤다. 건봉사와 봉명학교에서 자란 인재들은 훗날 독립과 민족의 근대화,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건봉사와 봉명학교에서 배출된 수많은 민족 동량들은 우리 독립항쟁사와 근현대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에서 건봉사는 외롭게 빠져 있다. 금암 의훈이 보여 준 기개와 독립 항쟁의 역사만 해도 사손(師孫) 설산스님의 증언과 회고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묻혀 있으리라. 일제 강점기 금강산 건봉사는 만해 선사의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에 기반을 둔 독립 항쟁의 산실(産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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