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사 가는 길 부도밭 옆에 세워진 사명대사 동상

농수추기조(壟樹秋期早) 성지야우한(城池夜雨寒)

갑병향로격(甲兵鄕路隔) 기사루성난(羇思漏聲闌)

안도강호외(鴈度江湖外) 형비랑우간(螢飛廊宇間)

불면향로냉(不眠香爐冷) 침효우최안(侵曉又催鞍)

 

언덕 위 나무 벌써 가을 깃들고

성 연못에 내리는 밤비 차디차네

병사들 고향 돌아갈 길 막막하고

나그네 그리움 가로 막는 물시계 소리

기러기 저 멀리 날아가고

반딧불이 회랑 사이 어지럽게 넘나든다

잠 못 드는 사이 향로는 차게 식었고

벌써 새벽, 안장에 올라 말을 재촉하네

- 숙수양성(宿首陽城; 황해도 장수산에 있는 성) 사명대사(四溟大師)

건봉사는 우리 역사 고비마다 백성과 국가를 지켜 온 호국의 성지이다.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환란과 고통은 전쟁이다. 특히 국토 전체가 짓밟히고, 임금마저 궁궐을 비우고 도피해야 했던 임진왜란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을 희생시켰다. 건봉사는 그 참혹한 비극의 한 가운데서 많은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지켜 낸 사명대사께서 스님들을 규합해 승병을 일으킨 호국 도량이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적들이 부산을 통해 조선을 침략했다. 왜적들은 강토를 휩쓸고 백성들을 살육했다. 임진년 여름 영동(嶺東) 지역에 이른 왜적들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침입해 스님들을 묶고 성보(聖寶)를 약탈하려한다. 당시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사명대사는 단신으로 적장을 만나 스님들을 구하고 중생(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참전할 것을 선언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은 중생을 제도하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번 왜적들이 매우 강하여 백성들을 함부로 해칠까 두렵다. 내 마땅히 저 미친 왜적들을 타일러 저 흉측한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살상을 막는 것이 부처님께서 베푸신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유명조선국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병서(有明朝鮮國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幷序)-허균(許筠)〉

정조 24년 1800년에 건립된 〈유명조선국팔도도총섭의병대장홍제존자사명대사기적비명병서(有明朝鮮國八道都摠攝義兵大將弘濟尊者四溟大師紀蹟碑銘幷序)〉, 1943년 일제가 파괴했다. 현재 경내에 세워진 기적비는 2017년 복원된 것이다.

사명대사의 참전 선언은 자비(慈悲)에 기반을 둔 중생구제와 호국, 삿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세우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선언이기도 했다. 살생(殺生)은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범계(犯戒)의 업(業)이다. 사명대사는 수행자로서 그 치명적인 업을 스스로 감내하면서까지 백성을 구하고, 진리를 지켜내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사명대사께서 석장(錫杖)을 휘날리며 고성(高城)으로 들어가니 왜군의 장수 세 사람이 모두 예로써 스님을 대했다. 대사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글을 써 왜군을 설득하고 격퇴하였다. 왜군의 장수들은 대사께 합장으로 예를 표했고, 계를 받았으며, 사흘 동안 스님께 공양을 올렸다. 그들은 성 밖까지 나와 스님을 전송했다. 영동 지역 9개 군(郡) 백성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모두 스님의 공이었다.”〈유명조선국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병서〉

사명대사가 고성에서 맞닥뜨린 왜적은 흉악하기로 이를 데 없어 ‘악귀’라는 별명으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부대였다. 사명대사는 참전을 선언 한 후에도 왜적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기 보다는 수행자로서의 기개와 위엄으로 왜적의 살생을 막는 방편을 써서 백성들을 구해냈으니 그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건봉사는 사명대사의 임진왜란 참전 이후 충의를 상징하는 호국도량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대사는 고성에서 백성들을 구한 후 “건봉사에서 의승군(義僧軍) 수백 여 명을 모아 훈련시켰다.” 당시 건봉사에서 수행하던 대중 스님들과 각지에서 모여 든 스님들은 사명대사를 따라 기꺼이 호국의 기치아래 결의했다. 사명대사는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檄文)에 따라 순안(順安;평안도 순안군)으로 달려가니 의승군 수천 여 명이 합세했다. 대사는 서애 유성룡, 명나라 지원군 등과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고 왜적을 물리쳤다.

사명대사는 전쟁 내내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단호한 결의를 실천했다. 살생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비 실천, 생명 제도라는 가르침의 실천이었다. 적진에 홀로 들어가 기요마사를 마주하면서도 수행자로서의 위의(威儀)를 지켰으며, 불의를 참지 않는 파사현정의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살상을 막아냈다.

“옳은 일이 아니어든 이로움을 찾지 말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 (모든 것을 아나니), 참으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정기의이 불모기리 명유일월 암유귀신 구미오비소유 유일호이막취;正其誼(而) 不謀其利 明有日月 暗有鬼神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사명대사 진영(眞影). 원본은 밀양 표충사에 모셔져 있고 건봉사 사명당의승병기념관에도 모사본이 있다.

사명대사가 당시 서생포(지금의 울산 울주군)에 자리한 왜군의 성에 단독으로 들어가, 글씨를 청하는 ‘악귀 기요마사’에게 써준 글이다. 유가(儒家)의 글귀를 인용했지만 수행자로서 포악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연민을 담아 훈계한 것이다. 대사는 임진왜란 한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전투로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구했다. 왜란 후에는 선조의 간청으로 왜국으로 건너가 전쟁 후 회담 대표로 난리 통에 끌려갔던 백성 수 천 명을 구해오고, 조선을 굳건하게 지켜냈다.

임진왜란 후 건봉사는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진신치아사리(眞身齒牙舍利)를 모신 ‘적멸보궁’이 된다. 사명대사는 왜란 당시 왜적이 약탈해 간 통도사 진신사리를 선조 38년, 1605년에 되찾아 와 치아사리를 건봉사에 모신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종묘사직을 지키는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하고 혁혁한 공을 온 조선이 칭송하였다. (전후 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사리를 찾아 모셔와 영취산 통도사 금강계단의 탑(壇塔)에 다시 봉안하고, 그 가운데 치아사리 17매는 은탑(銀塔)에 나누어 모셔 낙서암(樂西庵;현재 복원 불사 중인 극락보전 위쪽에 자리했다.) 으로 모셨으니 낙서암이 대사의 본사인 인연이었다. 그 후 음력 11월 사찰 서쪽에 돌을 다듬어 탑을 세우고 치아사리를 모셨다.” 〈금강산건봉사사적급중창광장총보(金剛山乾鳳寺事蹟及重刱曠章總譜), 1884년 도원장(都院長) 보운긍섭(寶雲亘葉)〉

사명대사가 건봉사에 사리를 모신 까닭은 "건봉사가 사명대사의 본사(낙서암자사지본사;樂西庵者師之本寺-위의 총보 기록)"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어려서 득도한 사찰은 직지사일 것이나, 금강산에서 스승 서산대사와 맺은 ‘법인연(法因緣)’과 건봉사에서 주석한 인연으로 미루어보면 건봉사가 대사의 본사라는 기록은 틀림없을 것이다.

건봉사 적멸보궁의 계단

사명대사의 진신 치아사리 봉안 후 100여년이 흐른 1724년 건봉사는 사리탑을 다시 세워 사리를 모셨고, 영조 2년, 1726년에는 사리를 모시게 된 인연을 기록한 〈석가여래치상탑비(釋迦如來齒相塔碑)〉를 세운다.

“우리 대각(大覺)이시며 사람과 하늘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열반하시니 탑을 세워 받들어 모셨던 사리가 팔만 국가 가운데 우리 해동에 인연이 있어 보배로운 진신 치아사리를 받들어 모시니 생각해보면 기린의 뿔과 같이 희유한 일이로다.(탑비 원문에는 상상속의 동물인 인;獜의 뿔이라 돼 있다.) 사리탑을 모시니 산문(山門)이 밝게 빛나도다. 사리탑이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으니 모든 이가 공경하고 용과 천신이 지키리라. 만세에 빛날 빼어남이여, 만고에 다함이 없으리로다.”

이 탑비는 1878년 대화재로 훼손되어 1906년 다시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가 세워진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건봉사 치아사리탑. 경종 4년 1724년 건립됐다. 현재는 적멸보궁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건봉사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 건봉사를 가로막던 1986년 도난당한다. 도굴범들은 꿈에서 사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부처님의 꾸짖음을 며칠 동안 계속 듣고 사리를 돌려주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리 4매가 소실되고 8매만 돌아온다. 비록 4매는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나. 회수 후 3매는 다시 봉안하고, 5매는 현재 건봉사를 참배하는 이는 누구나 친견할 수 있게 모셔 놓았다. 돌이켜보면 이 일은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세간에 보여 건봉사가 적멸보궁임을 새삼 일깨워주고, 옅어져가는 신심(信心)을 굳게 다져주기 위한, 그리고 더 큰 불사(佛事)를 이루라는 기연(奇緣)이 아니겠는가.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현재 사찰 일을 보는 종무소를 겸하고 있는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 안쪽 법당 사리함에 모셔져 있으니 건봉사에 이르면 가장 먼저 사리를 친견하고 예를 올리며, 서원을 세워 기도해도 좋을 일이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일본에 가서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현재 종무소와 함께 쓰고 있는 만일염불원 안쪽 법당에 모셔져있다.

설악산 봉정암과 오대산 상원사 중대, 태백산 정암사, 영월 법흥사, 양산 통도사를 오대 적멸보궁으로 꼽는다. 이 가운데 봉정암은 석가모니 부처님 정골(頂骨) 사리를 모셨고, 다른 4곳의 적멸보궁에는 진신사리를 모셨다. 그러나 건봉사 역시 사리 봉안 역사와 기록이 분명한 적멸보궁이다. 특히 우리나라 유일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특별한 적멸보궁이다.

천 년이 훌쩍 넘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오늘날 그 장엄하고 신비한 위엄을 내보이고 계시는 진신 치아사리가 남과 북, 가장 예리하게 맞닿은 곳 금강산 건봉사에 자리하고 있는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세세생생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제도하시는 법신(法身) 부처님께서, 금강산 건봉사에 화신(化身) 부처님으로 나투신 것이리라.

평화의 서광(瑞光)이 비추는 이 시대, 건봉사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주고 계신가. 탐욕과 어리석음, 분노에서 비롯된 갈등과 분쟁을 모두 털어내고, 민족의 평화를 이루어 마침내는 모든 생명의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경책(警策)을 주고 계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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