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BBS ‘아침저널 제주입니다’ - 불교계 소식

● 출 연 : 이병철 기자

● 진 행 : 고영진 기자

● 2019년 5월 27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 코너명 : 한 주간 제주지역 불교계 소식

[앵커]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자 제주 관음사 창건주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여성항일운동가로 재조명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그제 열렸습니다.

심포지엄에서는 봉려관 스님의 왜곡된 행적을 바로잡고,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 등에 대해서도 논의 됐다고 합니다.

매주 월요일 교계 소식을 전하는 이병철 기자가 심포지엄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이병철 기자?

[이병철] 네, 봉려관선양회가 주최하고, 두옥문도회가 주관한 봉려관 스님의 항일항쟁을 재조명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제주시 벤처마루 10층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국제적인 석학들이 봉려관 스님들의 연구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는데요.

우선 독일 말부르그 필립스대학 아델라이드 헤르만 판트 교수가 인도불교의 봉려관 스님이라 불리는 인도 카시미르의 락시미 비구니 스님의 관음금식 수행을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이 불교계의 여성구국운동과 봉려관의 활약을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또 토론자로는 전혜송 일본 코난대학 교수와 국립대만사범대학 박사인 혜달 스님이 나섰습니다.

[고영진] 우선 독일의 판트 교수의 주제발표 내용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병철] 락시미 스님은 10세기 인도의 카시미르 즉, 인도의 북부 히말라야 지역에 살았던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곳은 티베트 불교 영향을 받은 곳입니다. 판트 교수는 락시미 비구니 스님에 대해 연구했고 봉려관 스님을 알게 되면서 너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락시미 스님은 어린시절 불교에 푹 빠져서 출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여성이 불법을 배우면 무슨 좋은 점이 있냐”며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이나 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히말라야 티베트 불교를 연구한 학자에 의하면 여성들이 수행하는 것을 이 지역에서는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성이 출가해 아무리 많이 배워 교학으로 우등하다고 하지만 남자 스님인 비구나, 라마와 같이 존경심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고영진] 성 불평등이 불교계도 만연했던 시절이네요. 락시미 스님에 대한 일화도 발표 됐나요?

[이병철] 네, 락시미 스님은 출가 후 절의 주지를 맡게 되는데 교학과 수행을 겸비해 그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찰은 번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이 나병일 걸리면서 주변에서는 ‘전생의 업보로 나병에 걸렸다. 여성이라서 그렇다’ 등 불자로서는 입에 담지 못하는 저주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은 안되겠다 싶어 절에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자 숲속에 가서 수행을 합니다.

하루는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수정으로 된 물그릇을 들고 와서 입을 씻겨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관음정진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 후로부터는 썩어가던 팔이 정상적으로 나으면서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뱀이 껍질을 벗듯이 스님은 다시 아름다운 몸으로 태어나 선정에 들게 됐습니다.

이 관음금식 수행은 티베트 불교계에 아주 널리 퍼진 수행법이 됐고 이 뜻을 받들어 금식 수행하는 관음전을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영진] 그럼 봉려관 스님과 락시미 스님의 같은 점이라면?

[이병철] 두 스님의 유사한 점은 가족의 반대에도 출가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락시미 스님은 본인이 얻은 병을 치유했다면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에서 병든 스님을 치료해 주십니다.

또 두 스님은 관음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관음보살의 화현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분은 성 불평등 속에 어렵고 힘든 수행의 길을 걷지만 추후에는 그 업적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판트 교수는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은면 먼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움직여야하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 주지 않는다며 능동적인 여성이 되길 바랐습니다.

발표를 마치며 판트 교수는 봉려관 스님의 업적을 다시 재조명하고자 오늘의 심포지엄을 개최한데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제주불교사에 봉려관 스님의 업적이 널리 알리게 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고영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불교계의 여성구국운동과 봉려관 스님의 활약을 주제로 발표했다면서요?

[이병철] 네, 심 소장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 종남산 미타사 비구니 스님 40명이 의연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비구니 스님들이 국체보상운동을 했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고 분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심 소장은 봉려관 스님이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의병과 스님들의 독립운동을 목격하며 그 잔상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영진] 토론에서는 봉려관 스님이 법정사 항일운동을 펼친데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도 논의됐다면서요?

[이병철] 네 맞습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봉려관 스님이 법정사 항일운동을 펼친데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봉려관 스님의 독립운동 행적은 구체적으로 기술된 문서가 없다는 점에서 자료 확보 등에 불교계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봉려관 스님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다면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으로서는 최초가 될 전망입니다.

만약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한다면 봉려관 스님의 활동지역이 사적지로 지정되는 것도 한 방법으로 ‘봉려관 스님의 거리’ 등 그렇게 된다면 스님의 명예가 조금은 회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고영진] 일본 코난대학 전혜송 교수는 봉려관 스님 시대상황에 대해 설명했다면서요?

[이병철] 봉려관 스님이 출가를 결심할 무렵인 1898년에는 방성칠이라는 민란이 일어납니다.

방성칠은 동학의 아류인 남학을 신봉하던 자였습니다. 남학이 선도교와 보천교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방성칠은 화전을 일구며 사는데 조세제도가 바뀌면서 화전세를 내라고 하자 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01년 이재수의 난도 천주교 사건으로 보이지만 근본 원인은 조세문제와 깊습니다.

전혜송 교수는 봉려관 스님이 이 같은 민란을 겪으면서 보천교와 천주교에 대한 잔상이 남아 결국, 불교를 선택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했습니다.

특히 보천교를 연구하는 분은 봉려관 스님이 보천교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신데요. 법정사의 정자가 우물 정자인데 이 정자가 보천교의 심벌마크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동학의 최시형의 호가 해월입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의 법명도 해월입니다. 그래서 보천교와 연관짓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추측은 추측일 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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