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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뉴스와 사람들> 이번 시간은 정희성 시인과 함께 합니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정희성 시인은 서울대 국어국문학을 졸업한 뒤 숭문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제자인 고운기 시인을 등단시키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변신>으로 등단한 뒤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등단 후 50여 년동안 일곱권의 시집만 내 '과작 시인'이기도 합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한 정희성 시인은, <김수영문학상>과 <육사시문학상>, <만해 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출연 : 정희성 시인
□ 진행 : 강동훈 방송본부장

[인터뷰 내용]

△강동훈 : 정희성 시인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정희성 : 안녕하십니까?

△강동훈 : 조금 전에 소개해드린 멘트에 보니까 우리 BBS 불교방송과 여러 가지 인연이 있는데, 전국에 있는 애청자 그리고 유튜브로 시청하고 계시는 시청자 분께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희성 :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강동훈 : 아주 짧으시네요. 최근 6년 만에 신작 시집, <흰 밤에 꿈꾸다>를 출간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시집을 많이 내셨을 텐데, 바로 이 책입니다. 흰 밤에 꿈꾸다, 정희성 시집. 창비에서 431번 째 내는 창비 시선집으로 된 것 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정희성 : 제가 1970년에 등단을 했으니까 내년이면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50주년을 누가 기념해주지도 않을 거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또 자신을 한 번 돌아볼 때도 됐다 싶어서 시집 한 권을 묶게 됐습니다.

△강동훈 : <흰 밤에 꿈꾸다> 이 제목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정희성 : 지난 번 시집을 원고를 정리해서 출판사로 보내놓고 시베리아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사흘 밤 사흘 낮을 벌판을 달린 적이 있었는데.

△강동훈 :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라는 그 길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정희성 : 예, 그때 백야를 실감하게 됐습니다. 창밖으로. 밤이 되면 어두워져야 되는데 어두워지지 않고 그런 상태에서 벌판을 내다보면서 꿈꾸듯이 며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강동훈 : 그 뜻이 흰 밤에 꿈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서 여러 가지 보는 것을 글로 옮기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야기하니까 정희성 시인은 시도 쓰지만 통일에 대한 갈망, 여러 가지 역사에 대한 흔적과 앞으로 미래 지향적인 그런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시인 중에 한 분이다, 이렇게 제가 알고 있는데. 늘 갖고 다니는 것이 보면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그 티켓을 이미 만드셨더라고요? 어떤 연유입니까?

▲정희성 : 그건 제가 만든 것은 아니고요. 희망레일이라고 하는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에서, 이를테면 시베리아를 여행도 거기서 시켜줘서 같이 따라갔다 왔었던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여행을 가면서 제가 느낀 것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이루크츠크까지 갔던 것이거든요. 우리가 분단이 돼서 섬나라처럼 돼서 그 대륙적인 기질이랄까 대륙성 같은 대륙적인 정서 이런 것들이 30년대 시에만 해도 많이 나오는데 우리가 분단이 된 지 너무 오래된 까닭에 남쪽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대륙성 또는 대륙적인 정서 이런 것을 상실한 채 너무 왜소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을 받아왔거든요. 그래서 철도가 연결이 돼서 지금 동해북부선을 연결하기가 제일 쉽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 남북 관계가 좋아지고는 있습니다만 아직도 제재 국면에 있기 때문에 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이 지금 진행이 되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좀 제가 힘을 보탤 수 있으면 보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강동훈 : 희망레일이 제가 알기로는 이철 전 철도청장이 주도를 하시면서 여러 가지 남북 철도 교류를 완성하는데 그나마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로 알고 있는데. 보니까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가려면 지금 현재 코레일 KTX 비용으로 하면 한 64만 5천 원 그 정도 가격이면 아마 갈 수 있는, 그리고 한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남북 철도가 연결되면 바로 시베리아 벌판을 달려서 베를린까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정희성 :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강동훈 : 시베리아 철도 3박 4일 타신 거라고 했잖아요?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여러 지역을 지나면서 많은 민족들도 내리고 타고 할 텐데, 그걸 보면서 느낀 소감이 어떠셨는지?

▲정희성 : 사람들과의 접촉은 그렇게 많이 못했습니다. 한 칸이 전부 우리 일행으로만 되어 있어가지고 만남은 제대로, 언어도 그렇고 소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차를 타고 우리가 이미 유럽을 횡단해갔던 이준 열사라든가 이런 분들,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필경 그 차를 타고 움직였을 텐데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며칠을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강동훈 : <흰 밤에 꿈꾸다> 그 시집을 만든 하나의 역사적 배경인데. 저희들이 볼 때는 역사적으로 문학과 펜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많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꿈들이 <흰 밤에 꿈꾸다> 시집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초석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시를 쓰셨겠지만 그 중에 애착이 가는 시가 있을 것 같아요. 또 시인이시니까 BBS 뉴스와 사람들 애청자 그리고 유튜브로 시청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한 번 선생님 시를 하나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희성 : 네, ‘민지의 꽃’이라고 하는 시 한 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그것에 물을 주는 거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한다
그건 잡초야, 하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강동훈 : ‘민지의 꽃.’ 제가 어떻게 선생님께서 낭송하신 시에 대해서 평은 못하겠고. 이게 어떤 의미와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정희성 : 글자 그대로 제 제자가 강원도에 들어가서 살면서 한 번 놀러 오라고 해서 갔다 왔는데, 그때 거기서 어린 제자의 딸 민지를 만나게 된 거죠. 그런데 그 민지가 물뿌리개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가 못 드니까 나에게 들려서 마당에 있는 풀에 물을 주게 만들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해서 짓게 된 시인데. 결국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 세상을 보는 맑은 눈 그것이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죠.

△강동훈 : 선생님께서 시인으로도 등단하시고 또 시를 쓰시면서 학교에 이른바 교편을 잡으셨어요. 그 학교 있을 때 제자 한 분입니까?

▲정희성 : 그렇죠. 며칠 전에 바로 이 민지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민지 아빠 이름은 내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데 몰랐어요. 민지 아빠라고 이야기를 했으면 금방 알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민지가 벌써 25살이 됐답니다.

△강동훈 : 한 다섯 살이니까 20년 전에 지었던 시를 오늘 BBS 뉴스와 사람들 애청자를 위해서 또 유튜브로 시청하고 계시는 시청자를 위해서 “민지의 꽃”이라는 시를 낭송해주셨습니다. 정희성 시인의 지나온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1970년대에 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 정도 되셨겠네요?

▲정희성 : 그럴겁니다.

△강동훈 : 소위 말해서 시를 쓰기에는 조금 빠르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드는데 어떻게 등단을 하시게 됐는지?

▲정희성 : 그때는 빠른 것도 아니었어요. 요즘에 오히려 늦은 나이에 등단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강동훈 : 스물다섯이면 그때 군대는 어떻게?

▲정희성 : 군대 가서 제대할 무렵이었어요. 사실 그 작품이 68년에 동아일보에 출품을 했던 것인데 이게 거기서 떨어졌죠. 떨어져서 그 원고를 가방에 넣고 군대를 가게 됐던 것인데. 그래서 제대할 무렵 즈음 돼서 그 원고를 다시 보니까 역시 옥석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손질을 해서 다시 출품을 한 것이 당선이 된 겁니다.

△강동훈 : 그리고 여러 많은 작품 활동을 하셨고 또 저희가 찾아보니까 2001년에 만해문학상이죠?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셨던데. 그때 불교계의 유명한 큰 스님이 한 분, 오현 스님이라고 있는데, 만해 마을이 있고. 이 만해문학상은 도서출판 창비에서 주는 상입니까? 그때 이런 상을 받는 배경이라든지 어떤 내용으로 받으셨습니까?

▲정희성 : 그때 그게 <시를 찾아서>라고 하는 시집을 2001년에 내게 됐죠. 그래서 그 작품이 평가를 받게 된 거죠.

△강동훈 : 그래서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게 됐고. 선생님께서는 보면 시를 쓰시지만 여러 가지 후학들을 위해서 강연회도 많이 하시는 것 같고 또 이게 작가들 모임, 민족문학작가회, 옛날에 고은 선생도 거기 이사장 하셨죠? 그런 후학들과의 연계도 참 많이 하시는데, 보통 시인 하면 혼자만의 생활을 많이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후배들과의 연관 관계, 소위 말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어떤 이유가 있으십니까?

▲정희성 : 특별히 계획된 일은 아니었고요. 제가 관계하던 문학단체가 70년대의 유신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운동으로부터 시작이 되서 지금까지. 그 당시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됐다가 지금은 현재 한국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도 회장직을 맡아서 한 2년 간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동훈 : 조금 전에 저희 BBS 뉴스와 사람들 시작하면서 전하는 말씀을 들으셨는데, 거기에 보면 아침저널을 진행했던 고은기 선생, 그 분을 배출했다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고은기 씨, 지금 한양대학교 교수를 하고 계시는데.

▲정희성 : 제가 직접 문단에 등단시킨 것은 아니고요. 재주 있는 친구라서 고등학교 때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자기가 고3때였을 거예요. 무슨 프린트판 시집을 한 권 만들어서 들고 와서 읽어볼 것을 권유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시가 좋아요. 좋은데 그 당시에 고3에서 그런 것을 하다가는 대학 시험에 떨어질 것 같아서 칭찬을 안 했죠. 우선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그리고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죠.

△강동훈 : 68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냈을 때 1차 떨어진 것하고 또 제대 말쯤에 등단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공부 열심히 해라.

▲정희성 : 그런 것은 아니고요.

△강동훈 : 그 분 말고 말이죠, 저희 BBS 불교방송에 시인이 또 한 분 계십니다. 문태준 시인이라고. 그 문태준 시인도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같고 또 문태준 시인이 굉장히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그런 것 같습니다. 문태준 시인 평가를 한 번 해주시죠.

▲정희성 : 평가는 이미 받은 시인이죠. 얼마 전에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가장 젊은 나이에 받은 시인입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사실 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그런 문법을 사용하는데 문태준 시인은 전통 서정에 근거해서 아주 새로운 감각으로 전통을 되살려내는, 경신하는 그런 좋은 시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동훈 : 그 문태준 시인이 제가 선생님을 모신다고 해서 선생님이 쓰신 시를 제가 문태준 시인에게 낭송을 부탁드렸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죠.

◇문태준 : 정희성 시인께서는 사람에 대한 어떤 존중심, 사람에 대한 연민심 이런 것을 아주 아름다운 서정적인 언어로 시를 통해서 표현해오셨던 그런 분이라고, 어르신이라고 생각하고요. 우리 공동체가, 우리나라가, 이 한반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지 그런 것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말씀 이런 것을 줄곧 제시해 오신 한국 시단, 한국 문단의 어른이시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가까이서 뵈면 늘 한결 같이 인자하신 성품이시고 아랫사람의 말이라도 귀를 기울여서 아주 경청하시는 그런 어른이시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 그리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이런 시도 유명하시고요. 그리고 근년작으로서 ‘민지의 꽃’이라는 시도 정희성 선생님을 사랑하는 분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정희성 선생님께서 최근에 펴내신 시집 가운데 ‘연두’라는 시를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연두> - 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저는 이 시를 각별하게 본 것이 연두는 새로 갓 나온 잎의 빛깔이지 않습니까? 연한 초록의 빛깔 이것을 연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맑은 초록이다,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고 조금은 덜 짙어진 초록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이 시에서 당신의 봄이 연두빛 거기까지만 이르렀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산홍이 아직 피지 않은, 진달래꽃이 겨우 막 피는 그런 봄의 첫머리까지만 닿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희망하시는데.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사랑의 정도, 사랑의 범위 이런 것도 거기까지면 충분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연두의 빛깔 거기까지만 당신의 봄을 펼치시려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이 연두의 빛깔이라는 것은 풋풋하고 설레고 수줍어하고 무언가 부끄러워하고 이런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속되지 않고 마음이 맑고 신선한 상태, 이것을 일컫는 것일 텐데. 우리가 조금은 들떠서 이것이 두근거리는 가슴이 되고 조금 조심스러워하고 남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하는 이런 마음의 자세, 이것이 결국 연두가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 시를 통해서도 선생님의 성품, 인자하신 성품,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깊은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동훈 : 저희 BBS 불교방송의 PD죠, 시인인 문태준 시인의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그런 평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들어보시니까?

▲정희성 : 문태준 시인, 고맙습니다. 

△강동훈 : 저희 BBS 뉴스와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포맷으로 진행하는 것도 거의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금 문태준 시인이 소개했던 시가 <흰 밤에 꿈꾸다> 여기에 나오는 시죠?

▲정희성 : 예, 아마 두 번째 작품일 겁니다.

△강동훈 : 두 번째 작품. ‘연두’ 제 1부에 있네요. ‘당신에게’가 첫 번째고 세 번째가 ‘편지’네요. 정희성 시인께서는 또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철학을 가지면서 시집을, 시를 다른 시인보다도 조금 많이 썼다, 이런 이야기가 있던데. 지난 50여 년 동안 총 시를 쓰신 것이 어떻게 됩니까?

▲정희성 : 오히려 과작인 편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낸 시집이 7권, 이 최신 시집까지 합쳐서 7권이니까. 50년 동안에 7권이면 너무 적다고 할까요?

△강동훈 :  일반 시인의 경우는 저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보통 평균 50년이면 몇 권 정도 쓸까요?

▲정희성 : 제가 처음에 생각할 때는 한 5년에 한 권씩은 내야 게으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즘에 너무 책을 많이 내도 좀 민폐가 되는 것 같아요. 말이 너무 거칠어지고 넘쳐나는 시대가 되어서 말수를 좀 줄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강동훈 : 유튜브로 시청하시는 시청자 분들이 보시면 정희성 시인 참 온화한 그런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막말 그런 것이 너무 많아서 좀 정치라는 것이 협치고 상생의 정치인데, 흐르는 물처럼 가라고 한자에도 보면 물 수자가 들어 있는데. 자꾸 막말이 와서 언어가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희성 : 저도 이 시집을 내면서 뒤에 시인의 말을 쓰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쓸까 하다가 마침 그런 상황에서 이 글을 쓰게 돼서 바로 50년 전에, 1969년에 신동엽 시인이 돌아가셨거든요? 돌아가시면서 유작으로 남겨놓은 작품 가운데 글귀가 뭐냐면 이 세상을 좋은 언어로 채우자고 하는 내용의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시로서. 그 말이 문득 생각나서 저도 그 분의 그 말씀을 인용하고. 제 언어가 7~80년대를 통과해오면서 거친 시대와 맞서다 보니까 시도 많이 거칠어지고 그런 자신의 일을 반성하기도 하면서 이제 좀 고운 언어, 사랑의 언어라고 할지 이런 것으로 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동훈 : 시인의 말을 보니까 이렇게 쓰셨네요. 선생님이 방금 말씀해주신. 2019년 늦봄 쓰신 시인의 말입니다. 그 옆에 조금 전에 문태준 시인도 최근에 시집을 냈는데,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이 책도 받아보셨죠? 제가 두 권의 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우리 정치권이 언어를 순화하는 측면, 작가협회에서 정치인들 좋은 언어를 쓰신 분한테 상을 주거나 평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아무래도 그 분들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말을 사용하는데 함부로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현대불교문학상도 받으셨잖아요? 그때 ‘늙은 릭샤꾼’이라는 받았는데. 저는 이 릭샤꾼이라는 것이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아는데 일반 젊은 시청자 청취자 분들은 릭샤꾼이 뭐지? 물론 네이버에 물어보겠지만. 어떤 의미의 제목입니까?

▲정희성 : 그게 자전거를 개조해서 만든 인력거 같은 거죠. 페달을 밟아서 가는데 차이가 있습니다만.

△강동훈 : 이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요. 불교적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희성 : 아마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를 여행하고 난 뒤에 얻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아마 전혀 불교와 관계 없다고 할 수는 없죠.

△강동훈 : <흰 밤에 꿈꾸다>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면서 시집을 만들었고, 현대불교문학상 거기에 ‘늙은 릭샤꾼’ 이것은 인도에 가서. 여러 가지 교통수단과 연관이 되네요? 여행을 좋아하십니까?

▲정희성 : 좋아는 합니다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베리아나 인도 같은 데를 여행을 하고 나서는 작품을 얻었거든요? 그런데 유럽여행을 하고 나서는 별로 좋은 작품을 못 얻었어요. 왜 그런가를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유럽 같은 데는 너무 꽉 짜여져 있는 사회라서 저 같은 사람의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동양의 나라라든가 시베리아 벌판 같은 광활한 땅을 보고 나면 여백이 많지 않습니까? 그 여백 속에 상상의 날개를 펼 만한 공간이 확보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쪽에서는 좋은 시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강동훈 : 시인이라는 여러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콘크리트보다는 흙냄새, 자연의 바람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최근에 우리나라 여행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희성 : 최근에 엊그제만 해도 여수를 다녀왔죠. 여수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도시입니다.

△강동훈 : 경남 창원 출신이라고 나와 있던데?

▲정희성 : 창원에서 출생은 했죠. 거기서 출생신고를 했는데 어렸을 때 추억이 없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 공무원이신 아버지를 가족들이 따라다니다 보니까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죠.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여수고 여수에서는 1년 반 정도 살았습니다만 거기에 친구들이 있고 추억이 있어서 마치 고향같은 느낌을 줍니다.

△강동훈 : 여수에 365개의 섬과 여러 가지 추억이 있는 곳. 거기 갔다오셔서 거기에 관련된 시집이 나오지 않을까요?

▲정희성 : 글쎄요. 언젠가 한 개 나올 수도 있겠죠.

△강동훈 : 기대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어느덧 시간을 정리해야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아까 처음에 인사를 너무 짧게 해주셨는데 애청자 또 세계 곳곳에서 유튜브로 시청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인사말씀 한 번 시적으로도 해도 좋고 다른 멘트도 좋으니까 인사말씀 맺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희성 : 멀리서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시를 읽고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힘이 납니다. 좋은 시를 몇 년 간 더 써서 시집 한 권쯤 더 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동훈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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