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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구국 3화상'이라 불린 처영대사의 활약이 최근들어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임진왜란의 호남지역의 승전보 웅치대첩, 이치대첩에 대한 조명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호남불교를 조명하는 기획 리포트 두 번째 순서입니다. 홍진호 기자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해상침투가 봉쇄당한 왜군은 전주 침략을 감행합니다.

해상으로의 병력과 물자가 차단된 일본이 우리 군의 젖줄과도 같은 호남에 승부를 걸었던 것입니다.

호남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었던 절체 절명의 시기 전주 주변 진안 방향 ‘웅치’와 금산 방향 ‘이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왜군을 막아냈습니다.

웅치.이치대첩으로 왜군을 물리친 날, 충무공은 해상에서 한산도대첩을 이뤄내며 이른바 “무호남이면 무조선”을 완성했습니다.

[원행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해군으로서는 도저히 이순신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깐 배후에서 쳐서 근거지를 없애버리자 해서 육군이 전주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진안에서 들어오는 곰피재라고 웅치가 있고 금산에서 들어오는 이치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두 전투를 이겨낸 것입니다. 지금도 이치 정상에 이치대첩비가 있습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함께 정조가 구국 3화상으로 추존한 처영 대사는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해,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처영 대사는 전라도 순찰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금강산에서 시작 된 의승 봉기가 충청도를 거쳐 호남에서 만개한 셈입니다.

[김상영 교수/ 중앙승가대학교]

“금강산 지역은 의승의 뜻을 처음 내세우는 봉기의 의미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곳이고요. 실질적으로 의승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던 지역적 특성은 호남하고 충청지역을 들수 있을 것입니다...호남 의승을 대표하는 스님은 뇌묵 처영스님입니다. 여러 가지 실록 자료나 기타자료를 보면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이 뚜렷하게 명기가 돼 있습니다.”

중앙승가대 김상영 교수는 의승장으로서 처영대사의 업적은 분명하지만 행장 등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역사적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김 교수는 처영대사는 전란중 이순신 장군하고도 교류했고, 전란 후에는 산성 수축 등을 통해 지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김상영 교수/ 중앙승가대학교]

“(전북 남원의) 교령산성 수축 이후 한 문인이 쓴 기문 내용을 보면 이 남원의 교령산성의 수축과 거기에 끼친 처영대사의 영향이 당시 호남지역민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주 절절한 표현들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또 이순신 장군하고도 처영대사는 교류를 하고요. 고생하시는 이순신장군에게 부채 등을 선물하고 전황에 대해서 상의를 하는 기록들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충남 금산의 700 의총이 국가차원에서 성역화 된 반면에, 웅치. 이치대첩은 그 중요성에 비해 역사적 조명과 성역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호남 의승을 대표하는 처영대사 또한 당대에 추존된 구국 3화상임에도 불구하고, 금산사가 처영대사 기념관을 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정부와 민간 차원의 현창 사업은 미미합니다.

[스탠딩] 웅치이치대첩과 처영대사의 활약상은 서산-사명-영규대사 등에 비해 세간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습니다.

역사에 각인된 사실부터라도 제대로 평가해서 선양하는 것은 후대의 의무입니다.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에서 BBS NEWS 홍진호입니다.

(영상취재=장준호/ 남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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