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야 밥 먹어”, “보금아 퍼뜩 드온나”, “영주야,,,”

초등학교 시절. 해가 뉘엿뉘엿 뒷산으로 넘어가면 초가집 굴뚝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제 보금자리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경고음이 골목길에 울려 퍼진다.

세상 떠들썩한 속에서 아주머니들의 부름 소리만 들리지 않는 듯 아이들은 여전히 귀를 닫고 사방치기, 고무줄놀이, 숨바꼭질까지 섭렵할 즈음, 갑자기 동네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그러면 마치 주문에라도 홀린 듯 아이들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세워 태극기가 강하하는 모습을 경건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국기 강하식. 얼마가지 않아 전제적 의식이라며 폐지됐지만 저녁 6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렇게 태극기 강하식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 태극전사들을 응원할 때 태극기로 옷까지 해 입는 요즘 시대에 무슨 케케묵은 태극기 사랑 얘기를 꺼내는 것이냐? 라는 핀잔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의 활용성을 높이는 것과 태극기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분명 정 반대의 개념임에도 이를 혼돈 하는 공무원들이 있는 듯 해 애써 소환해 낸 저녁 무렵의 한 추억이다.

꼰대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이쯤해서 한번 강조하고 넘어가자. 태극기는 ‘국가 상징’인 만큼 관리 규정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돼 있다. 태극기는 구겨지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세탁하고 다려도 된다. 공공장소에 훼손된 태극기가 달려있거나 깃대가 부러진 채 방치돼 있다면 해당 국가기관이나 자치단체 장의 잘못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국기게양대 등 상태를 월 1회 점검하고 문제점이 보이면 즉시 교체해야 한다.

구겨진 태극기를 손으로 펴보려는 외교부 공무원들

국내에서도 이런 까다로운 규정이 있을진대 하물며 의전이 생명이 외교부 공무원들이 서울 도렴동 외교 청사 외교회의장에 ‘구겨진 태극기’를 그대로 걸어놓고 스페인 차관을 맞이했다. 제1차 한-스페인 전략 대화를 취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은 양국 차관의 악수를 비껴, 구겨진 태극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어이없고 낯이 뜨거워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의전을 준비하는 측에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겨진 태극기를 불과 몇 걸음이면 도달할 인근의 다른 회의실에 세워져 있는 태극기로 교체하자는 의견만 냈어도, 막을 수 있었던 낮 뜨거움 이었다.

국가대 국가 행사가 빈번히 열리는 외교회의장에 걸린 ‘구겨진 태극기’... 이 장면이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를 기자단은 우려스럽고도 안타깝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구겨진 태극기’ 사건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프로페셔널리즘을 더 가져야 한다’며 강한 질책을 한지 불과 몇시간여 만에 재발된 외교 결례였다. 실제로 외교부가 '내부 기강 해이'로 구설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말레이시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를 해 외교 결례 문제가 불거졌고, 지난달 19일 외교부가 낸 영문 보도자료에는 유럽 북부 '발틱 3국'을 유럽 남부 '발칸 3국'으로 표기해 주한 라트비아 대사관 측으로부터 항의를 받는 일이 있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외교부가 공식 SNS 계정에 '체코슬로바키아'로 표기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너무나도 초보적인 수준의 외교실수여서 어디에서부터 문제점을 짚어야 할 지 난감하지만, 외교부에 이런 부분들을 세심하게 짚어주고 크로스 체킹해야 할 유능한 인사들이 부재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이전 정부에서 잘 나갔다는 이유로 유능한 외교관들이 줄줄이 밀려나 있고, 주요 공관에는 무자격 낙하산 인사들이 즐비하다.

'외교부가 무능하다', '청와대 지침만 바라보며 복지부동한다', '외교부 강아지론’, ‘청와대 심부름센터론’처럼 개탄스런 비유가 나오는 것과 결부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외교부의 유능한 인사들을 ‘적폐’로 몰아 힘을 빼놓으니 조직은 무능해져가고, 조직이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되니 구성원들은 일하고 싶은 열정과 열의마저 사그라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외교회의장에 '구겨진 태극기'를 세워놔 물의를 빚은 외교부 담당자는 결국 보직해임 됐다. 그동안 외교 결례 사안에 대해서 구두 경고 정도의 문책이 관례였기 때문에 외교부 내부에서는 다소 이례적인 수위의 징계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디 이번 외교부의 조치가 일벌백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위치상으로 외교에 사활이 걸린 나라이다. ‘총칼 없는 전쟁터’에 얼빠진 정신과 무성의한 자세로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해줄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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