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이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정략적으로 활용하고자 범인 김현희를 대선 전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던 정황이 외교문서를 통해 재확인됐습니다.

외교부는 오늘 30년 경과 외교문서 1,620권을 원문해제와 함께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KAL기 폭파사건과 관련, 당시 김현희가 붙잡혀있던 바레인에 특사로 파견된 박수길 당시 외교부 차관보는 바레인 측과의 면담 뒤 "늦어도 1987년 12월 15일까지 김현희가 한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12일까지는 바레인 측으로부터 인도 통보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늦어도 15일까지 도착'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16일 대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주로 1988년과 그 전해에 작성된 것으로, KAL기 폭파사건과 88서울올림픽 등과 관련한 사항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 방한해 한국 고위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개최안에 대해 부정적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국은 '안된다'고 하지 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의 예측대로 북한은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서울올림픽은 160개 국가의 참여로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습니다.

88서울패럴림픽이 우리 당국의 몰이해로 인해 자칫 호주에서 개최됨으로써 국제적 망신을 당할 뻔했던 일도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1983년 초 호주는 우리 정부에 1988년 장애인올림픽을 자국에서 개최할 의사가 있다고 타진했고, 처음에 우리 관계 당국은 시설 부족 등을 들어 개최권을 호주에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장애인 보호 등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재검토가 이뤄졌고, 1년이 지난 1984년 초에야 우리가 패럴림픽도 치르기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또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중국 외교관의 증언이 담긴 문서도 이번에 공개됐습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