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파격적인 발상으로 조성된 김해 봉화산의 '호미 든 관음상'이 봉안 60주년을 맞았습니다.

불성 회복을 발원하고 농민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호미든 관음상을 세웠던 청년 불교학도들의 정신이 이 시대에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류기완 기자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고통은 보릿고개란 이름의 극도의 배고픔이었습니다.

정치는 부패했고, 사회는 질서를 잃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많은 청년들은 좌절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신적 의지처가 돼야 할 우리 불교계는 비구-대처 논란 속에서 국민의 삶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인서트 1 김상규 / 한국공무원불자연합회장] : "관음상이 만들어질 당시를 생각해보면, 59년도가 우리나라가 굉장히 가난한 그런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되고, 사실은 우리 생산활동이나 시스템이 남북으로 갈라져 무너져 있는 그런 상황에서, 또 정치는 그 당시에 큰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이때, 동국대 불교학과 청년불자 31명은 힘을 모아 큰 원력을 세웁니다.

새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 속에서 이들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관음보살상을 김해 봉화산 정상에 봉안합니다.

높이 7.3m 크기에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정병을, 오른손에는 농기구인 호미를 든 파격적인 성상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인서트 2 선진규 / 봉화산 정토원 원장] : "부처님 방 안에서 보시물만 챙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중생을 살려야지요. 부처님이 앞장서 주십시오해서 호미를 들게 했는데, 이 호미는 우리 민족 수천 년 내려오는 생명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의 도구를 부처님 손에 쥐었고..."

'호미 든 관음상' 봉안 60주년을 기념해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가 마련한 학술대회에서는 호미 든 관음상에 담긴 수행적, 사회적 의미가 집중 논의됐습니다.

호미 든 관음상 조성은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를 넘어 불교를 바로 세우고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자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토론자들은 평가했습니다.

노동 생산 또한 수행의 하나로 여겼으며, 생산 활동의 목표가 불성 회복에 있음을 환기시키는 대중결사였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인서트 3 고영섭 / 세계불교학연구소장·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 "농민, 농부들의 자식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런 희망을 갖고 대학에 올라왔던 젊은 학도 47명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아무도 발상하지 못하는 창발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호미든 불상을 세우고 여름방학이면 함께 내려가서 농촌 봉사활동이나 지역 계몽운동을 펼쳤다는 것..."

불상 조성 당시, 동국대 청년불자들은 심신, 사회, 경제, 사상 개발 등 4대 강령을 정하고, 이를 실천하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았습니다.

'노동하는 부처님', '일하는 보살님'이라고 불리며 당시 불교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호미 든 관음상의 의미는 달라진 세상에도 달라지지 않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는 5일 봉화산 김해 정토원에서는 호미 든 관음상 60주년 봉축 법회가 봉행됩니다.

[스탠딩]

가난을 이겨내겠다는 원력의 상징 호미든 관음상은 시대가 흘러도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동체대비의  가르침을 전하며 늘 중생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BBS 뉴스 류기완입니다.

영상취재: 남창오 기자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