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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였던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 49재가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됐습니다.

고통과 분노를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으로 승화시킨 김복동 할머니의 숭고한 삶이 숙연하게 다가왔습니다.

정영석 기자가 전합니다.

 

사진 속 환한 웃음 속에 감춰진 한 많은 생을 뒤로한 채 떠나간 고 김복동 할머니.

지난 1월 28일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김 할머니의 49재가 아미타불이 모셔진 서울 조계사 극락전에서 엄수됐습니다.

상주 역할을 맡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눈물 어린 추모사로 고인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윤미향 대표/정의기억연대: 할머니, 이제 할머니께서 하실 일은 부처님 곁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시고 이 땅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지켜보아 주소서.]

김복동 할머니는 만 14세 때인 1940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해방되고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뒤 김 할머니는 끔찍했던 위안부 피해 경험을 공개하며 본격적인 여성 인권 운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아시아 연대회의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빈 세계인권대회 등 세계 곳곳에서 위안부의 참상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권미경 위원장/연대세브란스병원노조: 할머니 남아 있는 우리가 열심히 투쟁하고 투쟁해서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도 받을 겁니다.]

1926년에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신심 깊은 불자로 자랐습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8년 세월, 친정 어머니는 양산 통도사에서 매일 기도를 올렸고, 이후 김 할머니는 "부처님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습니다.

[혜찬 스님/조계종 사회노동위원장: 김복동 할머니, 아니 김복동 보살님 잘 가세요. 이 사바세계에서 겪었던 아픔과 슬픔, 분노는 모두 놓으시고 행복하고 향기 가득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를 기원 드리겠습니다.]

김 할머니는 어렵게 살며 평생 모은 돈 5천만 원을 전쟁을 겪는 나라 아이들의 장학금으로 선뜻 내놓기도 했습니다.

삶 자체가 아픈 역사였던 김 할머니는 평생소원인 일본의 진정 어린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 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단 22분.

"끝까지 싸워 달라"는 김 할머니의 마지막 말은 남은 22분을 위한 마지막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BBS NEWS 정영석입니다.

(영상취재/허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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