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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뉴스와 사람들> 이번 시간은 선진규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와 함께합니다. 
선진규 대표는 조계종 전국중앙신도회장과 포교사단장 등을 지내며 활발한 표교 활동에 힘써왔으며, 경남 김해 봉화산 정토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더불어민주당 전국노인위원장으로 당선돼 집권여당과 불교계의 가교 역할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특히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기념해 만해 스님의 독립정신을 알리는 사업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 출연 : 선진규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
□ 진행 : 강동훈 방송본부장

[인터뷰 내용]

△강동훈 : BBS 뉴스와 사람들 시작과 함께 이 노래를 틀었습니다. 이 노래와 관계있는 가장 근접한 선진규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진규 : 안녕하십니까?

△강동훈 : 3.1절 100주년 기념되는 올해 선진규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신 것 굉장히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애청자,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진규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한달 전에 여러분들을 뵌 적이 있습니다만 아주 의미 있는 날 초청해줘서 감사합니다.

△강동훈 : 조금 전에 제가 노래로 한 번 제작진이 준비해서 들려드렸는데, 3.1절이 100년이 됐지 않습니까? 행사가 계속 전국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올해는 또 100주년이니까 여러 의미 있는 행사가 많습니다. 이런 행사를 보면서 만해사상실천운동을 펼치고 있는 선진규 회장님으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텐데. 그 감회부터 한 번 듣고 시작하시죠.

▲선진규 : 뭐 아시겠습니다만 3.1절하면 전 국민이 나라 뺏긴 원한을 나라를 찾기 위해서 앞장섰던 것인데 그것을 독립선언으로 되찾자는 운동 아니었습니까? 이 독립선언운동이 뒤에 알고 보니까 3.1절 독립운동이 만해에서 시작되어서 만해에서 일으켰고 만해에서 끝을 보는 그런 것이 있다는 칼럼을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니까 그 이야기가 맞더라고요. 실은 그 당시에 우리가 속국이 되어 있으니까 독립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히 그 당시의 왜정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것을 독립이라고 하는 대전제 하에 하다 보니까 도저히 그것은 숨어서 해야 되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많이 뭉쳤는데 계획이 탄로 남으로 인해서 전부 못하게 됐더라고요. 그 못하게 됐던 것을 끝까지 이끌어나간 분이 만해였답니다.

△강동훈 : 만해 하면 흔히 말하는 한용운 스님,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불교계에서는 법명 만해스님으로 하는데. 이 만해스님이 소위 말해서 스님이고, 또 시인이면서 여러 가지 독립운동에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고 그랬던 분인데, 이런 분을 사실은 선진규 회장님께서 지금까지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로 자임하시면서 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설명은 해주셨지만 만해스님이 우리 불교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많이 있던데. 대한불교청년회 회장을 하셨죠? 이 분과 청년운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선진규 : 처음에 조선불교청년회라고 하는 것이 왜정 때 만들어졌는데 그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그때는 회장이 아니고 총재라고 했답니다. 초대 총재로 추대를 했던 건가 봐요. 그런 인연으로 제가 10대, 11대 청년회 회장을 하면서 이 분의 뿌리를 청년회 뿌리를 찾아야 된다고 하는데 만해스님이 우리의 뿌리였더라고요. 그래서 저하고 가까워지는 것은 그러니까 시공간을 떠나서 가까워졌죠.

△강동훈 : 지금 선진규 회장님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동대 총학생회장도 하셨잖아요? 만해스님도 동국대하고 인연이 크죠?

▲선진규 : 그때는 명진학교라고 했다는데, 3회랍니다. 그러면서 지금 현재 동창회 초대회장까지 했대요. 동창회 사무실 가보면 동국대학교 초대 동창회장, 만해 한용운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강동훈 : 이것이 바로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그러면서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많은 시를 발표하셨고 그것이 어떤 저항의 시였고 민족의 시였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시였다고 후대들이 평가하지 않습니까? 회장님도 사실은 시를 쓰고 있잖아요?

▲선진규 :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띄엄띄엄 하더라도, 만해가 우리가 알려진 것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제가 여기서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것은 정말 알려져 있는 것이 있다, 이겁니다. 좀 어폐가 있는 이야기인가 모르겠습니다만 33인 독립운동가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초지일관하지를 못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할 도리가 없는 거니까. 그런데 국외에서 지킨다고 하는 것은 쉽지만 국내에서 

△강동훈 : 모든 가족들이 있고, 일제의 서슬 퍼런 눈이.

▲선진규 : 먹는 것 자체가 그 사람들에 의해서 먹는 것인데, 변절하지 않고 그 현장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해방된 것이 45년인데 44년, 1년 전까지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은 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위대하지만 불교인의 입장에서 너무나 위대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만해가 변절했다고 하면 국내라고 하는 특수한 조건에 여기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변절을 해버렸다 하면 우리는 중간에 끊기는 거예요. 정기가 끊기는 거예요. 그 정기를 이어줬다 하는 이것은 너무나도 위대하다.

△강동훈 : 그 만해스님이 기미년 100주년도 되지만 만해스님 탄생 140주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진규 : 그것은 우리가 지금부터 그러니까 140주년은 100주년 때 내가 대한불교청년회 회장을 했거든요? 지금 140주년이죠. 그리고 이제 3.1절 100주년 이렇게 되네요.

△강동훈 : 선진규 회장님 하면 저희 BBS 불교방송에 많이 출연도 해주시고 사실 불교운동을 하면서 상당한 많은 불교 관련 일을 했습니다. 그 중에 만해스님과 하는 기념사업회를 계속하고 있는데, 만해스님에 대해서 아까 서두에 쭉 말씀은 했지만 만해스님을 우리가 왜 존경해야 되느냐, 우리 후학들이 바라볼 때, 그런 부분을 쭉 정리해 오신 부분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진규 : 나라 잃은 민족에 거기에 부처님의 불변의 사상을 갖고 부처님의 뜻에 의해서 이 중생을 계도하겠다고 하는 위대한 보살심을 발휘했는데, 실질적으로 나라 찾는 운동에 결부시켰다고 하는 여기에 불교인으로서의 위대성을 갖고 있고요. 또 하나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도저히 견뎌 나올 수 없는 그런 지경까지 왔는데도 끝까지 지켜준 민족혼이다, 이렇게 봐야죠. 혼을 지켜주었다.

△강동훈 : 사실은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의 선각자들도 그것을 지키기 힘들어서 마지막에는 자천타천으로 했는데, 유일한 분이 만해스님이라는 말씀이네요?

▲선진규 : 그러니까 불교인으로서 자랑일 뿐만 아니라 불교인으로서 자랑하다 보니까 민족의 자랑이다. 이야기 들으니까 이북에서도 굉장히 존경한대요.

△강동훈 : 지금 현재 북한에서도?

▲선진규 : 남북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어떤 면에서는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강동훈 : 이런 만해선양회를 하면서 올해 많은 사업을 준비하고 있고 또 펼쳐지고 있는 중인 행사도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어떤 사업들이 진행 중인가요?

▲선진규 : 지금까지는 40년 전에 내가 할 때는 청년회 뿌리찾기운동 해서 실은 그 당시는 만해의 묘소도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만해 하면 님의 침묵, 그 다음에 만해를 추모하는 데는 선학원에서 1년에 제사 한 번 모시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강동훈 : 그 동안에 회장님이 이 운동을 펼치기 전까지는 제사 한 번 모시고 님의 침묵 그 구절만?

▲선진규 :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만해 묘소를 그때 찾았어요. 

△강동훈 : 왕십리 쪽에 있는?

▲선진규 :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런데 그것을 찾는 것은 가족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일반인들은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가 마침 만해 탄신 100주년, 3.1운동 60주년이라 그것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금년이 40년 후니까 140년, 100주년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 다행스러운 것이 그때는 만해스님을 아는 분들이 많더라고. 그렇잖아요? 만해스님을 아는 분들이 많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만해운동이 일어나니까 묘소도 찾는다고 하니까 일간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그것이 터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보훈처의 전신인 원호처가 난리가 났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어떻게 이렇게 방치했느냐, 이렇게 난리가 나버려서, 그 덕으로 우리가 일하기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만해 정신을 찾는데 세미나를 하고 기념 토론회를 하고 했는데요. 그 당시에 만해스님 영정이 없었습니다. 선학원에 가면 있습니다만 곳곳에서 신문지상에서 만해 얼굴을 내야 하니까 사진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우리가 인화를 해서 곳곳에 보내주고. 그 당시에 일간신문 내지는 보도진에서 만해를 보도하지 않으면 격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경쟁이 붙었어요. 그때의 보도는 상상할 수 없이 보도가 됐습니다.

△강동훈 : 지금에야 우리가 3.1절 관련하고 만해스님 하면 교과서에서도 쉽게 볼 수 있고 네이버에 인물검색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인데, 당시에는 굉장히.

▲선진규 : 그런 것이 하나의 사업이 되었고. 그 후에는 만해, 만해 하니까 만해 이름만 팔더라도 사업들이 많이 되니까 많은 사업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는데 심우장을 잊고 있었습니다. 만해 하면 심우장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심우장을 중심으로 해서 제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이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만해의 뜻이 이 시대에 통일을 가장 열망할, 그러니까 만해는 그 당시에 독립을 원했지만 지금 만해가 있었다면 통일을 제일 바랄 것이다, 평화적인 통일.

△강동훈 : 심우장이라는 것이 일반인들도 아시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소위 말하는 저희가 알고 있는 심우장은 만해스님께서 총독부를 향해서 얼굴도 보기 싫다고 해서 보통 남향으로 짓는데 그것을 등을 돌리고 북향으로 지었다.

▲선진규 : 지금은 그곳이 도회지입니다만 그 당시는 서울시내로서는 외지죠. 그리고 성북동 거리에서 보면 저 위에 올라가는 것이거든요? 조그마한 골목에? 거기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가지고 조금 전에 강 부장님 말씀하셨다시피 내가 총독부를 보지 않겠다, 하면서 북쪽을 보고 지었는데, 그것이 내가 5년 전에 손을 대고 난 뒤부터, 방치되어 있다가, 방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시에서 구입을 해가지고 시 문화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형태는 방치야, 그 일대는 재개발 지역이라 손을 못 대. 가보니까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면 기념관이 있고 공원이 있고 이러잖아요? 여기도 가면 공원이 있고 저기 가면 도산공원이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만해만은 기념관도 없어. 그래서 어떡하든지 심우장을 좀 크게 했으면 싶어 했는데 손을 대보니까 재개발 지역이니까 손을 못 대는 것이라. 그런데 다행스럽게 그것이 무엇이 되어 있느냐면 서울시 문화재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만해가 이 시대에 왔다면 만해는 통일을 원할 것이다, 그래가지고 문학하는 분이었으니까 설득력이 있겠더라고 만해통일문학축제를 만들었잖아요.

△강동훈 : 그것이 우리가 엊그제 보도를 통해서 봤던 바로 만해통일문화축제이군요?

▲선진규 : 그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첫해 우연히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현재 대통령께서 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강동훈 :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로 계실 때?

▲선진규 : 첫 제 1회 만해문학축제를 하는데 그 분이 다른 데 가기로 했는데 어쩌다 그날 방향을 틀어 이리 왔어요. 그래가지고 처음 축사를 하고 갔다고. 그런 것도 보면 우연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이 기회에, 할 일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했는데 다른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전부 빛을 보는데 만해만은 왜 이렇게 하느냐, 그래서 내가 무슨 표현을 썼는줄 압니까? 죽어도 백이 있어야 된다. 우리 불교가 지지리 못나니까, 후세가 백이 없으니까 이 모양, 이 꼴이다, 참 눈물겨운 이야기야. 

△강동훈 : 사실 3.1운동 100주년 기념 관련해서 저희 BBS 불교방송 보도국 기자들이 전국에 현재 기획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취재하고 있는데, 하다 보니까 이런 것이 나오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했고 많은 돈과 또는 노력을 기울였던 불교계 인사들이 당시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기록에 남기지 않다 보니까 불교계 인사들은 별로 기록이 없고 오히려 기독교계 인사들이 많이 기록에 남겨놔서.

▲선진규 : 그 사람들은 아주 빠른 사람들이에요. 그것이 왜정 때도 기독교도 숨겼을 겁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 알리는 데는 우리는 알릴 때 싸우고 하다 보니까 알리지 못했고.

△강동훈 : 우리가 그 동안의 역사 흔적들, 그리고 그것이 매몰되어가지고 다 사라져버렸는데.

▲선진규 : 또 하나는 불교계가 약하니까 그런 겁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래서 백이 없고 자손이 없는 거라.

△강동훈 :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 3.1절 특집 형식으로 만해사상운동을 하고 계시는 만해사상실천연합 선진규 대표님을 모시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진규 : 강 본부장님 지금 이야기 중에 아까 강 본부장께서 우리들이 한 일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시청자 여러분, 3.1운동 이후에 실질적으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운동한 것은 사찰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사찰마다 전부 숨어서 다 했어. 그러니까 이것은 알리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사찰에서는 그때 여유도 있고 숨을 수도 있고 또 경제적으로도 괜찮았고, 어느 종교보다 경제적으로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숨어서 한 거야. 앞으로는 친일을, 뒤로는 독립운동을.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강동훈 :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안봉려관, 제주도에 있는 스님을 취재하다 보니까 그런 흔적이 약간 나왔다고 그것을 친일 행적으로 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선진규 : 여기에 나는 굉장히 많이 가져왔는데 지금 시간의 제약을 받아서 그러는데, 아무튼 이것을 내가 좀 밝혀야 될 때가 올 겁니다. 가는 곳마다 우리 운동을 했어, 불교인들이.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을 뒷바라지하는데 우리 31본사가 전부 그 당시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때의 경제단위가 쌀이었습니다. 범어사 같은 데는 수천 석을 해, 수천이 아니라 수만 석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경제단위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강동훈 : 그것을 몰래 독립운동에 다 지원해주시고.

▲선진규 : 통도사, 법화사, 월정사, 갑작스럽게 본사들이 안 나옵니다만, 전부 다 갖다 준 거야. 그래서 김구 선생님이 오셔가지고 제일 먼저 이종욱 박사, 이종욱 스님은 월정사 주지거든요? 밖으로는 그 분이 친일을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구 선생이 오셔서 제일 먼저 찾았다는 것 아니에요. 

△강동훈 :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귀국을 해서 서울에 있는 종로 대각사를 오면서 도착하자마자 이종욱 스님 어디계시냐, 그러니까 왜 그런 사람을 찾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 덕분에 우리 임시정부가 먹고 살았다, 그래서 밝혀진 것 아닙니까?

▲선진규 : 그러니까 이종욱 스님이 밖으로는 31본사를 운영해나가기 위해서는 친일이고, 안으로는 그렇게 했다 이거에요.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찾았다고.

△강동훈 : 그런 사실이 정말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그전까지는 완전히 친일로 알고. 진짜 친일한 사람들은 다 숨어서, 오히려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참 100년 동안 역사의 아이러니한 아픔입니다. 

▲선진규 : 그러니까 시민 운동하는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친일 세력들은 뿌리를 뽑아야 된다 하잖아요.

△강동훈 : 이런 가운데 만해스님이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집필 초고본이 10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고 하는데, 혹시 그런 것 보셨습니까?

▲선진규 : 그것을 왜 그렇게 썼느냐 하면, 시간이 좀 쫓깁니다만, 검사가 왜 독립운동 하느냐, 이러니까 내가 지금 말로서는 못하겠고 글을 써야 되겠다, 그 원본이 지금 나왔대요. 제일 앞에 것만 제가 여기서, 이것이 참 철학적이고 지금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앞에 3줄만 읽어볼게요. 조선독립의 서,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럼으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에는 무덤으로 바꾸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이다. 

△강동훈 : 자유와 평화로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를.

▲선진규 : 너희도 여기에 준한다, 이것이죠. 그러니까 얼마 안 있다가 손들었잖아요?

△강동훈 : 잠깐 소개를 했습니다만 그 당시에 만해스님의 기개, 검사 앞에서도 하나 기죽지 않고 당당함을 보여줬던,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는 33명의.

▲선진규 : 33인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거기에 그 당시는 소변기를 방 안에 뒀대요. 그런데 33인 중에 아, 나는 이제 큰일 났다, 여기 있으면 죽게 됐다, 이러니까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똥통을 집어던졌다고. 이 따위로 독립 운동해? 그런 일화가 있죠.

△강동훈 : 선진규 회장님하면 만해스님, 대한불교청년회, 여러 가지 각종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사찰을 하나 모시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해에 있죠? 소위 말하는 노무현 대통령하고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찰인데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하고 인연을 맺으셨죠?

▲선진규 : 봉하 부락에 내가 있으니까, 12년 후배니까.

△강동훈 : 선진규 회장님의 12년 후배가, 고향 후배겠네요?

▲선진규 : 그리고 자기 형하고 나하고 1년, 2년 차이지만 형이 나를 늘 찾아왔으니까. 그 형이 참 똑똑한 분이었어요. 집에서 제일 똑똑했어. 그런데 그 분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은 그 기운이 형한테 갈 정도로 그 집안의 인물이었는데. 떠나고 났는데 그 형이 나를 좋아하니까 자기들도 나보고 형님, 큰형님이라고.

△강동훈 : 그때 다닐때 선진규 회장님이 대학생이었나요? 그때 형님이 살아계실 때?

▲선진규 : 같은 동네에 있으니까. 그런데 나하고 깊이, 젊은이들 후배들인데,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교 졸업을 하고. 동국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지 않습니까? 독립을 하고, 또 내 안사람이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거든? 같이 그 당시는 농촌에 가는 것을 농촌 계몽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농촌에 계몽하러 간다면서 둘이 거기로 내려갔거든요? 그러니까 동국대학교 출신, 이화여대 출신, 거기다가 총학생회장들이 농촌 운동하러 왔다니까 그 당시에 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의 하나의 히로인이 됐죠. 그랬는데 4월 5일에 갑작스럽게 호미 든 부처님을 1959년, 그리고 올해가 2019년, 금년 4월 5일이 60주년입니다.

△강동훈 : 김해 봉하산에 가면 호미를 들고 있는, 호미라는 것은 밭을 가는 호미죠?

▲선진규 : 우리 민족의 생존권의 도구.

△강동훈 : 호미를 든 관세음보살님이 계신 곳이 바로 호미 든 부처님이다?

▲선진규 : 그 당시에 내가 그 호미 든 부처님을 모실 때 노무현 대통령이 중학교 1학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잘 아냐면 4월 5일은 식목일이거든요? 온 전국에 있는 산이 나무를 땔 때이기 때문에 민둥산이었습니다. 거기에 식목일날 나무를 많이 구하고 제막식을 한다고 하니까 한 3,000명이 몰려왔어요. 그런데 진영중학생들도 거기에 나무심는 날이 되어버렸는데. 거기에 제막식 하면서 나무를 심으니까 같이 올라왔는데 그 뒤에 뭐라고 했냐면 형님, 내가 호미 든 부처님 모실 때는 우리 동네 부처님이라고 그 부처님 주변에 많이 심었습니다, 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호미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당시에 뜻이 심신계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이라는 뜻이었거든요? 그런데 개발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인들에게는 아주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나무를 심었는데 노무현이 호미 든 부처님 주변에 나무를 심었는데 이 호미 든 부처님은 방 안에 있던 부처님이 밖으로 나와 허허벌판 위에 거기다가 황무지에 호미를 들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나무를 심었다면 메시지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러니까 노무현의 개발정신과 노무현의 독특한 정신은 나는 봉하산에 있었다고 봅니다.

△강동훈 : 그 노무현 대통령이 어쨌든 그런 일로 인해서 서거를 하셨고 마지막 눈을 감은 그 분의 시신이랄까, 그것이 또 그 절에서 마지막이 있었잖아요?

▲선진규 :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면 마지막에 사자바위에서 갔다가 내려오면서 경호원을 떼기 위해서 원장님 계시나 가봐라, 그 원장이 나거든요? 또 그 다음에 원장님 계시나 가 봐라, 모시고 올까요? 아니다, 경상도 하지 말란 소리가 아니다, 그러면서 경호원은 나 만나러 오고 자기는 저리 내려오면서 마지막 독백이 참 좋은 분인데, 했다는 거예요. 그때 나를 만났으면. 참 좋은 분이라 했다니까. 그게 마지막 알이라. 그래서 거기에 가면 사자바위가 있고 부엉이바위가 있는데 부엉이바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면서 곳곳에서 절을 하고 싶었어요. 불교인이고 하니까. 그런데 장례위원회에서 암만 절도 작고 하지만 우리가 큰 절보다도 인연이 있는 정토원에서 49재를 지내자, 이래서 그 49재를 내가 만들어놓은 정토원에서 모신. 그러면서 그 49재를 모시고 나서 100일 뒤에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거든?

△강동훈 : 그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 행사에 참석하고 충격도 입었고, 장례식장의 뜨거운 햇볕에서 건강을 해쳐서, 속상해서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선진규 : 100일 만에 돌아가셨는데, 그 분은 기독교인 아닙니까? 나는 기독교인이건 뭐가 됐건 노 대통령과 어떤 면에서는 정치 선배이고 노 대통령을 그렇게 내가 잘 49재를 드렸는데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도 내가 49재 해드려야 되겠다 싶어서. 그때 가족들을 만났더니 7일 동안 마치고 나서 연락하겠다, 이러는데 연락이 오기는 뭐라고 오냐니까 우리는 기독교인이니까 49재를 안 지낸다 하더라고. 그것은 여러분들 사정이고, 나는 속으로, 49재 참 잘해드렸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돈을 재비라고 하면서 보냈는데 내가 그 일행들 보고 무슨 소리를 했냐면 김대중 대통령이 내가 죽고 난 뒤에 저세상에서 나를 만나면 틀림없이 내 어깨를 탁 치면서 내가 죽고 난 뒤에 많은 추모행사가 있었는데 제일 덕본 것은 봉하산 정토원에서 49재한 것을 덕봤다고 할 거다, 왜? 내가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라고 했습니다. 저쪽 세상에 가면 기독교가 있고 불교가 있고 천주교가 있고 유교가 있겠느냐, 내가 그랬다고. 거기에는 오직 진실만 있을 따름이야,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강동훈 : 영화 신과 함께를 보면 거기 나온 것처럼, 혹시 선진규 회장님 가시면 그 분을 만났을 때의 이미지가 그려지네요. 이제 그런 인연, 저런 인연으로 선진규 회장님이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다 마무리가 됐습니다. 뉴스와 사람들 출연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만해사상실천하는 여러 가지 운동들이 좀 더 모든 국민에게 잘 펼쳐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끝으로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진규 : 나는 만해니 3.1절을 떠나서 하는 이야기가, 지금 북미회담, 그 다음에 북의 핵이 없어진다, 그랬을 때 남북 간의 교류가 트인다, 그랬을 때 세계인의 이목은 한반도로 올 것입니다. 역사의 새로운 빛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물질적인 전 세계적인 물질적인 문화가 이제는 정신문화의 세계로 도져올 것이다. 그 정신문화의 세계의 어떤 면에서는 중심이 어디가 될 것이냐, 이겁니다. 이것은 오랜 시련을 받은 국민에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그 사람들의 국민들은 시련이 없습니다. 위대한 국민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국민의 정신은 어디서 왔느냐, 나는 불교정신에서 왔다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불교가 전 세계 인류의 새로운 정신문화로서 이제는 세계인이 새롭게 탄생하는 길은 정신문화거든요? 그 정신문화의 중심은 이 한국이 될 것이다. 불교인들 정말 이제 할일이 많은데 기죽지 맙시다. 그리고 전부 새롭게 재발심들 하자고 하는 이야기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강동훈 : 지금까지 선진규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와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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