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국제고 노성태 교사, 3·1운동 100주년 세미나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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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전국네트워크 오늘은 광주로 가봅니다. 광주 BBS 정종신 기자? 3·1절을 앞두고 광주 3·1 운동사의 오류 '바로잡기'위한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면서요?

비밀 결사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의 모습/사진제공=전남대학생독립운동연구소

 

3·1운동 100주년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는 광주 3·1 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이 저평가되거나 또 잘못 알려져 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이런 주장은 ‘광주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세미나에서 제기됐는데요.

세미나는 오늘 오후 2시부터 잠시전인 5시까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광주·전남 3·1혁명의 재평가'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주최한 ‘광주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의 말 들어보겠습니다.

◀INT▶김순흥 /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100주년을 맞은 3.1혁명이 앞으로 100년 동안에는 우리역사에서 특히 우리 지역사회에서 어떤 방향으로 해석이 되고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지표를 삼아야 할 것인가를 재조명하기 위한 세미나입니다”

 

지역에서 의미 있는 세미나가 열렸군요, 그런데 이런 주장을 제기한 데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을텐데요?

 

이번 세미나에서 광주 국제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노성태 교사는 당시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광주 3·1운동을 재구성한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광주 3·1운동 당시 체포돼 재판을 받았던 103명의 재판기록을 중심으로 연구한 논문을 통해서입니다.

노 교사는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과 판결문을 통해 확인한 사실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노 교사는 “광주 3·1운동사에 관한 기록이 1965년 ‘신동아’라는 잡지에 최한영 선생의 회고담이 실리게 됐는데, 그 회고담은 광주 3·1운동이 일어난 지 무려 46년이 지난 뒤 쓰여 졌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연구과정 없이, 또 가감 없이 이후 각종 3·1운동 관련 서적 등에 실리게 되면서 많은 오류가 생겨났다”고 지적했습니다.

노 교사는 그러면서 “회고록이 기억에만 의지하다 보니 당시 상황과 큰 흐름은 맞지만 이름이나 날짜, 형량, 3·1운동 최초 시위지나 시위방향 등이 판결문과 차이가 있었다”면서 “광주 3·1운동사를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광주 국제고등학교 노성태 선임교사의 말 들어보겠습니다.

◀INT▶ 노성태 / 광주국제고등학교 선임교사 (역사)
"저는 이번 3.1운동 100주년 때 해야될 일이 여러 가지 있지만 광주 3.1운동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 교사가 주장한 오류에는 어떤 것 들이 있나요?

 

노 교사는 "광주 3·1운동의 최초 시위 장소는 작은 장터가 아니라 큰장터 아래 모래사장이었고, 그로부터 500미터 쯤 떨어진 작은 장터쪽으로 이동하면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시위 경로 역시 잘못됐다고 주장했는데요.

“기존에는 시위대가 서문-충장로-충장로파출소-금남로-구법원 앞-광주경찰서를 행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서문을 통해 충장로로 행진했고, 현 충장로 4가까지 나갔다가 다시 충장로로 돌아왔고, 충장로 우체국까지 행진한 시위대는 일본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자 바로 옆에 있는 광주경찰서 앞마당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 교사는 또 광주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신문잡지종람소’의 역할이 저평가돼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 교사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광주 3·1만세운동 2년 전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원들이 만세운동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신문잡지종람소’란 신문이나 책 등을 열람하는 곳인데요,

그러나 광주의 ‘신문잡지종람소’는 단순히 신문과 잡지를 함께 보기 위해 생긴 곳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 ‘신문잡지 종람소’에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비밀독서모임이 있었는데요, 이들 대부분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20대 청년들로 당대의 지식인 집단이었습니다.

광주 3·1만세운동은 이들이 준비하고 주도했고, 거기에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대규모 독립만세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광주 3·1만세운동은 20대의 젊은층이 주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광주 만세운동은 3월 10일 시작돼 4월 8일까지 광주 인근 지역에서 횃불 시위로 지속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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