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전영신의 아침저널 - 화제 인터뷰] 전보삼 만해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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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전보삼 만해기념관장

■ 방송 : BBS 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 FM 101.9 (07:00~09:00)

■ 진행 : 전영신 앵커

▷전영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불교계의 3.1운동 정신과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올바른 계승을 다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준비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만해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들도 꾸준히 진행이 되고 있죠. 대표적인 만해스님 연구가이자 한국대학생불자연합회 총동원회장 지낸 불자 지식인이십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장 오늘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보겠습니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전보삼: 예, 수고하십니다.

▷전영신: 만해기념관 만해스님의 사상과 여러 가지 업적을 기념하는 박물관인데 이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서 사제를 모두 털어서 운영해오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전보삼: 예, 성북동의 심우장이 이렇게 전셋집으로 남아 있어서 그 집을 활용을 해서 기념관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80년에 심우장을 기념관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거기가 상당히 좁잖아요. 작은 집이고 그런데 전시 같은 걸 하기 어려웠는데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를 요청해서 한 번 하고 났는데 그때 반응이 상당히 좋았어요. 그래서 상설적인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현재의 남한산성에 만해기념관을 짓고 여기에서 전시기념관을 만들어서 지금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전영신: 그러신군요. 만해스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시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불교개혁에도 앞장선 한국 불교계의 선각자시죠. 만해기념관이 만해스님을 알리기 위해서 마련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사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전보삼: 많이 있죠. 여기에 우선 기념관이 박물관으로 국가등록이 돼 있기 때문에 자료를 우리가 수집하고 보존하고 하는 그런 작업 또 특별전시 그다음에 일반 전시 나눠서 전시 기능을 통해서 일반 탐방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요. 또 체험학습으로 다양한 여러 가지 학습을 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만해학교를 정기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또 심도 있는 한용운 스님에 대한 공부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게끔 준비를 늘 하고 있어요.

▷전영신: 조금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사제를 털어서 기념관을 운영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요. 그렇기 때문에 재정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전보삼: 이 기념관을 재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안 돼요. 이것은 직업이나 오크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그건 하기가 어렵고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면서 하면 그 기대치를 채울 수 없어서 늘 실망하게 돼요. 기념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즐거운 장소이고 행복한 삶의 터전이 돼야 돼요.

▷전영신: 물론 그렇죠.

▶전보삼: 그래서 우리들의 삶의 놀이터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놀이터가 어딘가 그렇게 생각하면 바로 이 기념관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생활의 터전으로써 행복의 여기가 발전소예요. 여기 와서 거쳐가는 사람들이 가슴이 뿌듯해지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운영 자체도 그런 차원에서 이걸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재정적인 문제보다도 늘 여기 와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염원이 더 크기 때문에 있는 것을 가지고 조금씩 나누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전영신: 제가 우문을 드린 것 같습니다. 올해가 3.1절 100주년입니다. 독립운동가 만해스님 연구의 권위자로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어떠십니까?

▶전보삼: 상당히 남다르죠. 저는 100주년을 위해서 10년 전부터 자료를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해 왔어요. 그래서 지금은 전시를 2월 달은 2.8 독립선언도 있고 해서 한용운 선생이 옥중에서 어떻게 투쟁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옥중투쟁을 하신 그 모습들을 생생하게 재현한 전시를 지금 하고 있고 또 옥중에서는 한시가 많아요. 또 우리 한글시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일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그런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전영신: 그러니까 3.1운동 100주년 기념 만해 한용운 옥중시 특별전을 마련하신 거죠?

▶전보삼: 예, 그렇습니다.

▷전영신: 특별전이 언제까지 진행이 됩니까?

▶전보삼: 2월 한 달이에요. 28일까지 하고요. 3월 달은 다시 3.1운동과 한용운으로 이렇게 넘어갑니다. 그다음에 4월 달에는 우리 구국의 시인 3인전해서 육사 윤동주 만해 3인이 구국에 시를 어떻게 남겼는지 그런 것도 한번 조명해 보고요. 또 5월 달이 되면 독립운동가들의 유묵전도 이렇게 해 나갈 생각이에요.

▷전영신: 각 월별로 이렇게 특별전을 계속해서 마련을 하시는군요.

▶전보삼: 그렇습니다.

▷전영신: 만해스님께서 마포형무소에서 지은 시의 주제라든지 작품세계는 어땠습니까?

▶전보삼: 크게 나눠보면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어요. 나라를 사랑하는 구국의 의미를 담아놓은 시들이 있고요.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시들이 있어요. 또 스님이기 때문에 선시의 경향을 띠는 그런 시들이 있어요. 그런데 선시라고 하면 현실의 문제예요. 현실의 고 일제가 우리를 강점했잖아요. 이 고를 어떻게 극복하냐 하는 것을 한용운 스님의 높은 안목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일러주는 그런 한시들이 있어요. 세 가지로 크게 나눠볼 수 있는데요. 그런 것들이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우리에게 절실히 요망되는 그런 정신이 아닌가 생각해요.

▷전영신: 이번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수집을 어떻게 하셨고 그러면 그동안에는 이 유물들이 어떻게 보존되어 왔습니까?

▶전보삼: 저는 학생 때부터 만해스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를 모을 수 있었고요. 어느덧 이렇게 세월을 헤아려보니까 56년이 됐더라고요, 자료를 수집한 지가.

그래서 콘텐츠 면에서 있어서는 어느 박물관 못지않게 확보가 돼 있고요. 또 그런 걸 가지고 다양한 주제로서 이렇게 주제별로 이렇게 엮어서 특별전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기념관에 수장고가 있는데요. 거기에서 잘 보존되고 있죠.

▷전영신: 지금은 사립박물관 형태로 운영을 하고 계시지만 이 만해기념관을 문화재단에 위탁을 해서 영구적인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일을 목표로 두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전보삼: 이 기념관은 이제 항구적이어야 하잖아요. 또 이것은 비영리기관이에요. 법이 정하고 있어요. 그것을 실천하려면 공익법인에서 운영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있을 때까지는 제가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것을 공익법인화를 해서 공공의 어떤 자산으로써 운영이 돼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전영신: 3.1운동 당시에 만해스님께서 남기신 업적이나 발자취에 대해서도 소개를 해 주시죠.

▶전보삼: 그날에도 보면 다급한 상황이 됐어요, 태화관에 모였을 때요. 의경이 오는 소리도 들리고 해서 그 다급한 상황에서 최린이 손병희 선생을 제쳐놓고 만해더러 한 마디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용운 스님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말씀을 하셨는데

▷전영신: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전보삼: 기쁘다 더욱 힘쓰자하는 한용운 연설 끝에 독립만세였어요. 뭐가 기쁜가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 우리가 독립을 선언했기에 우리나라에서 죽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얘기예요. 생사를 뛰어넘어간 한 마디를 남긴 거예요. 그 짧은 한 마디에서 그날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놨어요. 독립은 우리의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맹렬한 기상으로 일어나서 정의를 위하고 자유를 위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역설했어요. 그리고도 옥중투쟁의 3대 원칙을 정해서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을 취하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 그랬어요. 그런 것을 요구하게 되면 총독부를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예 인정 심문 자체를 묵살하고 묵비권 행사했어요. 피고는 왜 말이 없는가 하고 다그치니까 한용운 스님께서는 조선사람이 조선을 위하여 독립운동하는 것은 100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 너희들이 무슨 재판이냐 이 재판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사람이 일본인 너희들을 재판하면 너희들은 그 재판에 응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말이 많이 있으니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서 만해가 유명한 옥중 독립선언서를 다시 작성해 내죠. 아주 명문 중에 명분이에요.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고 시작되는 아주 유류하고 시로써 문장으로써도 아주 뛰어난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독립선언서가 한용운의 옥중 독립선언서예요. 그것을 그날의 우리 민족이 가야 할 방향을 절절하게 읊어놓은 독립선언서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전영신: 이렇게 말씀을 들으니까 정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만해 스님과 관련된 일화도 많은데 가장 소개해 주시고 싶으신 일화 한 가지만 더 말씀을 해 주신다면요?

▶전보삼: 만해스님은 우리 민족 전체를 들어올릴 수 있는 저울추였어요. 조그마한 쇳덩이 하나가 만근을 들어올리잖아요. 일제의 그 엄혹한 시절에 우리 국민들이 갈 길을 몰라서 이렇게 헤매고 어려웠을 때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우리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 민족의 저울추였어요. 일화는 중요한 일화들이 참 많습니다마는 시간 관계상 그냥 제가 민족의 저울 추였다고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전영신: 알겠습니다. 저는 그 일화가 생각이 나는데요. 친일파 민영휘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협조해달라고 거절당했을 때 권총으로 위협을 했는데 민영휘가 이제 겁에 질려서 협조하겠다고 약속을 하니까 그 권총을 던졌는데 그게 장난감 총이었다고 이런 일화도 있었죠.

▶전보삼: 기자님께서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일종의 협박이었지만 만해의 기지에 놀라서 그 댁에서 많이 자금을 지원해 줘요. 그의 아들 민형식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만해를 충모하고 만해를 아주 크게 모셨어요.

▷전영신: 그러셨군요. 만해스님이 말년에 11년간 사셨던 곳이죠. 아까 말씀하신 심우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 문화재청이 사적으로 지정예고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가 됐습니다. 심우장이 갖는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설명을 해 주신다면요.

▶전보삼: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성스러운 우리 조국의 땅 심우장이에요. 이것을 85년에 서울시 사적 제7호로 지정을 했는데 민간인 살던 집이 최초로 지정이 됐어요. 그러나 이것은 지방정부가 하고 있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 집을 국가가 지정한 지정문화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우리도 그런 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성숙됐다는 데서 대단히 기쁘고요. 북향집이잖아요. 조선총독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들어앉은 집이에요. 살기는 물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도 덥고 그래요. 그렇지만 그런 물리적인 것보다는 어떤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해가려고 했던 만해의 의지가 잘 담겨져 있는 집이기 때문에 진작에 국가사적으로 지정이 돼야 된다고 저는 봤어요. 문화재 지정을 서울시에 제가 건의했을 때 이걸 3년 동안 안 해 줬어요. 그런 사례가 없다는 거예요. 개인이 살던 집이 무슨 문화재냐고 건물도 좋지 않은데 제가 3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설득해서 겨우 서울시 문화재 사적 제7호로 지정받은 지가 벌써 30년이 좀 지나가는데요.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것을 관리한다니까 더욱 반갑고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영신: 심우라는 이름도 불교설화에서 따온 이름이죠?

▶전보삼: 그렇죠. 심우라는 것은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한 과정이 10단계로 나눠져 있는 그 단계를 소를 등장시켜서 그것도 이제 우리가 소는 우리가 농업사회였잖아요. 농업사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소인데 그 소를 마음에 비유해서 마음을 깨치기 위한 그런 집이다라는 뜻으로 심우장이라고 얘기했어요.

▷전영신: 우리 청취자님께서 가까이 심우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존경합니다 하셨고요. 다른 청취자께서도 말씀을 들으니 한용운 스님 못지않으시게 훌륭하십니다. 또 소장님 진정하신 애국자시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계십니다. 관장님께서 만해 스님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된 계기가 드라마틱하던데요. 어린 시절에 한 스님께서 건네주신 책 님의 침묵 때문이었다 맞습니까?

▶전보삼: 예, 맞습니다. 저는 강릉 출신인데 집이 포교당 강릉 절 옆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포교당이 늘 마당이었는데 놀이터였는데 거기에서 늘 이렇게 의식을 하는 걸 보고 따라서 하다 보니까 반야심경을 자연스럽게 같이 따라 외웠어요. 그런데 내용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 내용이 뭔지가 굉장히 궁금해서 내용을 해독해 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60년대만 하더라도 강릉 포교당에 객성들이 나타나면 그분들 붙잡고 물어보고 질문하고 그랬어요. 질문이 싹이 돼서 스님께서는 이 책을 읽으면 다 되니까 이 책이나 열심히 읽으라고 던져준 게 님의 침묵이었는데 딱 받아드는 순간에 첫 구절부터 제가 생각했던 의문이 많이 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바로 색즉시공이에요. 그러나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다시 공즉시색이에요. 여기에 모든 진리가 있구나 하고 그 시를 달달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반야심경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님의 침묵을 열심히 읽으면 이게 한글로 만들어진 대장경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그 시를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빠져들어서 이건 단순한 시가 아니고 깨침의 노래 깨달음의 노래구나라는 하는 생각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님이 누구냐 하면 님은 없어요, 그 속에는.

그런데 님의 침묵이잖아요. 침묵의 의미가 뭘까 침묵의 프리즘을 통과한 단어가 님이에요. 그 침묵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 절에서는 적멸보궁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의미를 알아야지 님이 나타나요. 그래서 이것은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철학 시예요. 깨달음의 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100년의 전의 시가 지금은 역사 속에 있지 잘 읽혀지지 않지만 계속해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가 님의 침묵이잖아요. 그 이유는 바로 그런 깨달음이라고 하는 높은 경지의 내용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아마 우리 조국이 있는 한 영원히 읽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해요.

▷전영신: 관장님께서 후손들이 만해스님의 어떤 면을 배웠으면 싶으세요?

▶전보삼: 지조와 절조의 정신 또 높은 안목. 안목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노력을 해야 되겠죠. 가만히 놓고 보면 일제 식민지시대에 가장 행복했던 분이 누구일까 하면 한용운 스님이에요. 그 당시에 호의호식했던 사람들 역사 속으로 다 묻혔잖아요. 만해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행복한 길이 뭔가를 생각해 본다고 하면 그런 지조와 절조, 안목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해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연마하고 닦아야지 되는 거죠. 우리도 열심히 연마하고 닦아서 한용운 스님이 가졌던 그런 안목을 배우는 것 그게 우리들의 행복이 아닌가 생각해요.

▷전영신: 청취자님께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훌륭하심을 마음에서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의 좋은 뜻 존경합니다 이런 메시지 주셨습니다. 한 말씀해 주시죠.

▶전보삼: 더 깊은 내용과 이런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굉장히 기쁜데요. 남한산성에 만약에 오시면 방송 듣고 오셨다고 하면 제가 따듯한 차 한 잔 내려드릴게요. 그래서 더 깊은 얘기 나누기 바라요.

▷전영신: 감사합니다. 오늘 특별한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보삼: 네, 감사합니다.

▷전영신: 지금까지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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