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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뉴스와 사람들> 이번 시간은 조각가 김영원 작가와 함께합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지낸 김영원 작가는 조각 분야에서 최고로 권위 있는 '김세중조각상'과 '문신 미술상 대상'을 수상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가입니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3대 국새와, 해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된 이순신장군상 등을 제작하며 굵직한 작품들에 활발히 참여했습니다. 
2009년에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조각해 작가로서의 정점을 찍었고,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서울시에 저작권을 무상으로 기증하면서 의미를 더했습니다. 

□ 출연 : 조각가 김영원 작가
□ 진행 : 양창욱 정치부장

[인터뷰 내용]

▷양창욱 : 이 자리에 김영원 조각가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영원 : 안녕하십니까?

▷양창욱 : 제가 프로필에서 나오는 것을 얼핏 들으니까 47년생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해 연세가?

▶김영원 : 일흔 셋입니다.

▷양창욱 : 일흔 셋. 이 오랜 세월을 오직 조각 외길을 걸어오셨는데. 처음에 어떻게 입문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원 :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은 진흙을 퍼와서 장난감 만들고 노는 것이 유일한 놀이였습니다.

▷양창욱 : 흔히 말하는 흙장난을 말씀하시는 군요.

▶김영원 :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께서 진흙을 가져와서 자기 손을 만들어라. 그래서 미술시간에 내 손을 만들고 있는데 물끄러미 보시더니 너 어디서 배웠냐고. 그래서 배운 바도 없는데. 그러면서 이번 토요일에 김해에서 전국학생실기대회가 있으니까 너 진흙 좀 가져와서 나가자. 그래서 진흙을 퍼와서 토요일에 미술부 애들을 따라서 현장에 갔지요. 거기서 만든 작품이 고등부에서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양창욱 : 그 전에 배우신 적도 없는데? 우연찮게 선생님의 권유로 나간 대회에서?

▶김영원 : 예, 그런데 그것이 어릴 때 흙장난 했던.

▷양창욱 : 보통 솜씨가 아니셨군요.

▶김영원 : 그래서 그것이 항상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여러 선생님들 속에서도 그렇고 학생들 속에서도 미술실기대회는 쟤가 확실히 나가야 된다. 그래서 나가기만 하면 수채화나 무엇이나 제가 계속 상을 받아왔어요. 그런데 우리 집안에서는 하지 말라고 했지요. 

▷양창욱 : 집안의 반대가 있으셨군요. 왜 그랬죠?

▶김영원 : 유교집안이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아주 엄격한.

▷양창욱 : 흔히 말하는 환쟁이 이런 비하하는 그런 시대였죠.

▶김영원 : 유학자였으니까. 집안 망한다고 얼씬도 못하게 하고 손도 못 대게 했는데.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는 나를 법대에 보내서.

▷양창욱 : 선생님께서 공부도 참 잘하셨던 모양입니다.

▶김영원 : 공부는 좀 잘했습니다.

▷양창욱 : 공부도 잘하시고 조각도 잘하시고 수채화도 잘하시고.

▶김영원 : 그래서 법대 가라고. 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시골에서는 입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그 당시에 안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3학년만 되면 일부 학생들은 절로 들어가고 일부 학생들은 가까운 도시에 가서 학원을 다니는데. 그리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만 와서 시험을 보고 이렇게 학교에서 배려를 해줬죠. 그런데 안 그러면 대학을 가는 학생이 없으니까. 저도 부산 모 학원에 단과반에 등록을 해서 모의고사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모의고사 성적이 도저히 서울법대에 갈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았어요.

▷양창욱 : 오직 서울법대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셨는데?

▶김영원 : 할아버지는 거기로 가라 하셨으니까. 그래서 고민도 하고 나는 대학 진학을 하지말자, 농사나 짓자, 이런 생각도 했고.

▷양창욱 : 서울법대가 아니면 그 다음 단계의 대학도 있는데 그것은 아예 생각도? 서울법대가 아니면 안 간다?

▶김영원 : 거기에 가야만 군수가 될 수 있다. 그런 시대죠. 그래서 굉장히 실망하고 있었는데 나랑 같이 옆자리에서 재수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그 학생이 미술학원에 다니고 미술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는 학생이었어요. 그 학생이 자기 미술학원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길래 내가 잘 하는 것이니까 관심이 있어서 그 학원에 구경삼아 따라갔습니다.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보니까 내가 며칠만 하면 저 정도는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집안 몰래 거기 가서 배우기로 결심하고 원장님을 만났죠. 나 미대 가려고 하니까 받아주시오.

▷양창욱 : 선생님 홀로 그렇게 결심을 하셨군요? 많은 집안 어른들이 알면 안 되니까.

▶김영원 : 알면 경 칠 일이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학원 원장이 너, 안 돼. 3개월 가지고 무슨 미술대학을 가냐. 

▷양창욱 : 그렇군요.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군요. 선생님의 수상경력을 말을 해도?

▶김영원 : 말해도요. 그것은 학원 입시 실기가 아니다. 석고 데셍을 배워야 되고 인체 데셍을 배워야 되고 전통적으로 배워야 되지 네가 하듯이 마구잡이로 해서는 안 된다. 이러면서 1년을 여기 와서 재수를 해라. 그런데 도저히 재수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안 되고, 그래서 막무가내로 우기니까 같이 입시할 수 있는 학생을 불러서 얘 한 번 지도해봐라. 그래서 그 학생 밑에서 제가 3개월을 배웠어요. 같이 입시 시험을 보러 홍대로 왔는데 그 학생은 떨어지고 저는 붙었어요.

▷양창욱 :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제가 느낌에.

▶김영원 : 잘 그런 것이 아니라 못 그러는데.

▷양창욱 :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탁월했던 거죠. 선생님의 여러 가지 실력이나 작품들이.

▶김영원 : 그게 회자가 됐던가 봐요. 입시 채점했던 교수 중에 한 분이 데셍을 가르쳤는데, 수업시간에 너구나, 딱 알아보더라고요. 그래서 그 분 하신 말씀이 시커먼 ??처럼 전혀 엉뚱한 그림을 그려서 이것을 점수를 줘야 되는지, 안 줘야 되는지 논의를 한 끝에 얘는 개성이 있는 것 같다, 주자고 해서 점수를 줬다고.

▷양창욱 : 그때는 회화로 들어가셨네요?

▶김영원 : 아니죠. 조소인데. 그때는 전부 데셍을 기초로 배우고. 시험도 데셍도 하고. 조소를 한 것은 한참 이후에 천직이 됐죠.

▷양창욱 : 그러면 입학하셨을 때는 조소와 회화와 여러 가지 과목 중에 무엇을 하신 거죠?

▶김영원 : 내가 흙 주무르는 솜씨가 있으니까 당연히 조소를 선택했죠.

▷양창욱 : 저는 미대의 커리큘럼 과정을 잘 몰라서 들어가시면 원하시는 것을 바로?

▶김영원 : 아니죠. 입시 때부터 선택을 하는 거죠.

▷양창욱 : 제가 여기에 밝지 못해서. 그래서 조소로 쭉 가셔서 하셨군요. 그래서 학창시절 때부터 대학 들어가셔서도 계속 두각을 나타내신 건가요?

▶김영원 : 아니요. 입학을 하고 한 한 달 정도 조소를 가르치는 선생께서 저를 불러서 너 어디서 왔냐고 물어요. 시골 어디서 왔습니다, 라고 했더니 너는 조각이 안돼, 보따리싸고 고향가서 농사나 지어. 그 소리를 듣고 엄청 충격을 받아서 일주일동안 하숙집에서 두문불출하고 드러누웠어요.

▷양창욱 : 그때 이미 부모님들이나 어르신께서는 이미 미대 가는 것을 어느 정도 승낙을 하셨네요?

▶김영원 : 우리 할아버지만 모르고 나머지 분들은 대충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고민을 하고 진짜 포기를 해야 하나, 전문 지도교수가 안 된다,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해봐야 소득이 있겠는가, 하고 포기를 하려 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며칠 지나니까. 뱃속에서부터 배워서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도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1년 동안은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자. 지금 늦지 않다. 이래서 그냥 엄청 열심히 했지요. 그래서 제 대학 3년 동안은 그 청춘을 저당 잡힌 거죠. 실기실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2학년 되니까 점수도 좋고 장학금도 주고. 그리고 국전에 출품하라 해서 입선도 하고. 그래서 같은 동료들보다 앞서가는 그런.

▷양창욱 : 그래서 쭉 대학생활까지 마치시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셨어요?

▶김영원 : 대학교 3학년 때 우리 지도교수가 너 인체사실조각을 하면 안 된다. 추상을 해라. 앞으로 세계는 추상예술이 대세지 사실구상 해가지고는 빛을 못 본다. 그래서 열심히 추상미술을 했어요. 그때 전국 학생실기대회라고 첫해인데 그때 조소 부분에서 제가 그랑프리를 받았어요. 추상 쪽으로.

▷양창욱 : 나가시기만 하면 입선에 입상에 그랑프리시군요.

▶김영원 : 그래서 선후배라든지 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님들도 쟤는 추상조각에서도 대성할 아이다, 라고 저를 좀 아꼈어요. 3학년을 끝내고 제가 군대를 갔는데 군에서 제가 생각이 바뀐 겁니다. 왜 바뀌었냐면 제가 잘나가니까, 추상조각이 잘나가니까 거들먹거린 거예요. 시건방져가지고. 그래서 누가 이번에 너 입상했던 그 작품 도대체 무엇을 표현한 것이냐고 하면 우리 전통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야. 무언가 있어 보이고 무언가 거들먹거렸는데, 난 척 한 거지요. 그런데 군대생활을 하면서 전방에서 보초를 서면서 그 옛날에는 참 힘들었잖아요?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옛날에 좋았던 일을 회상하는 거예요. 혼자 즐겁게 좋았던 일, 내가 상 받았던 일, 작업했던 일,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상하게 내가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 당시에 서양미술을 우리가 배웠거든요? 미술사라든지 미학이라든지 모든 미술에 관한 지식은 서양 것을 가져다가 텍스트로 배웠기 때문에 그 쪽에서 다다 운동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자기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이런 것을 토대로 해서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내고 이러는데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전통이 없었잖아요? 남의 역사를 가지고 마치 우리 역사인척 남의 다리 긁는 그런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되겠다, 남들 따라가서는 절대 안 되겠다, 내 나름의 정체성을 찾아야 되겠다, 이래서 다시 이론공부를 한 거예요.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니까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산물인데,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이것부터 진단하기 시작한 겁니다. 위정자들을 생활을 과학화하자고 하고, 그 당시 새마을 운동이니 뭐니 하면서, 합리적인 생활을 하자, 생활을 과학화하자, 이런 이성주의적인 합리적인 세계를 70년대 초에 계도를 시켰고. 재야인사들이나 이런 분들은 정치를 좀 합리적으로 하자, 이래서 나름대로 활동을 했고. 또 노동자들은 분배를 합리적으로 하자. 이래서 모든 그 당시를 살아갔던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합리주의 정신이 컨센서스였다, 이것을 내가 느낀 거예요. 그래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예술양식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실주의다. 그런데 서양에는 사실주의를 이데아, 즉 이상주의적인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했다면 나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를 하자. 그것은 시대가 어느 시대를 가더라도 현실은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제대하고 나와서, 나오니까 마침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서 대학가가 시끌벅적하고. 그래서 그때 제가 주로 만들었던 연작이 어느 사형수의 얼굴, 그것이 지금 정치했던 이철희, 유인태, 이런 사람이에요.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언도된 분들. 그러니까 학교에서 또 난리 난거예요. 얘가 군대 갔다 오더니 애가 이상하게 되어 가지고 이상한 것 만든다. 그래서 그것을 만들다가 너무 직접적이라, 눈을 가리고 그러니까 너무 직접적이고 이러니까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좀 메타포가 있어야겠다. 은유적인 상징이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철봉에 매달린 이런 작품을 한 것이죠.

▷양창욱 : 그때의 시대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김영원 : 그것이 내가 한 10년 동안 끌어왔던 중력, 무중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10년을 했죠. 한 10년 쯤 지나고 나니까 80년대 87년도 이럴 때 자유가, 갑자기 억눌리던 자유가 한꺼번에 분출되어서 우리 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 간의 갈등이 증폭된 거예요. 그때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생채기내고 파편화되기 시작하고 그것을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내가 현실을 기저에 까는 작품을 하려고 했으니까 그것을 표현을 할 수는 없고, 또 내 스스로가 하나하나 쌓아왔던 사실주의가 또 어떤 한계에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잘 만든 작품을 패대기쳐서 깨트려서. 

▷양창욱 : 기존에 있던 작품을요?

▶김영원 : 기존에 있던 작품도 그렇고 내가 만드는 작품도 깨트려서 파편을 얼기설기 엮어서 또 작업을 했죠. 그것이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내 의지의 표현인데, 그것이 사회적인 현상하고 맞물린 거죠. 

▷양창욱 : 선생님 작품들은 어떤 시대와 사회상을 다 구현하고 표현하셨네요?

▶김영원 : 같이 왔죠. 단 하나는 그 당시에 민중화하는 친구도 생기고, 80년대에, 나는 그런 어울려서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리고 나는 항상 마음 속에 예술가는 호랑이와 같다, 호랑이는 산 속에 홀로 사는 것이니까.

▷양창욱 : 그런데 작품들은 다 사회 참여형의 그런 작품이잖아요?

▶김영원 : 그런 은유가 다 깔려있죠. 기저에 깔려있는데. 그것을 내가 내색을 별로 안 하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하고 또 그 쪽에 관심을 가지고 실존주의 철학하고 브릿지시키고 이런 작업을 했죠. 그러다가 90년대 들어오면서 갑자기 몸이 망가지는 거예요. 몸이 여기저기 탈이 나기 시작하고 내 작품을 내가 깨트리고 하는 것이 내 자신의 부정이잖아요? 내 자신에 대한 해체잖아요? 그것이 아마 심리적으로 많은 작용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몸에서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나랑 막연한 친구가 기공선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한 마디로 말하면 위빠사나와 비슷한 것인데, 몸으로 하는 선이에요. 그것은 기공을 이용해서 자기 몸을 보완해가는, 몸을 간호해가면서 자기 마음을 간호하고 자기를 해방하고 해탈하는 자유를 얻고자 하는 그런 선이에요. 그것을 시작하면서 제가 인생에 하나의 변곡점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 아주 끊임없이 나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고,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거기에 얽혀있는 나의 경계도 풀어내려 하고.

▷양창욱 : 그 지점에서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나요?

▶김영원 : 그것이 불교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양창욱 : 그래서 그 불교와의 인연도 생각들도 작품에 담기기 시작하나요?

▶김영원 : 그렇죠.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거의가 불교적인 개념이 깔려있고 그렇게 됐는데. 지금 DDP 앞에 서 있는 그림자의 그림자라든지 이화동 로터리에 홍익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거대한 8m짜리 작품, 홀로서다 그것도 그 기저에는 바로 그거예요. 내 작품은 어떤 한 내용이 규정할 수 없는 내용을 만들어요. 각자가 보는 것이 정답이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설치된 김영원 작가의 조각상 <그림자의 그림>

▷양창욱 : 다 나름대로의 해석권을 주는군요?

▶김영원 : 또 그리고 어떤 면이 앞면이고 어떤 면이 뒷면인가, 이것이 없어요. 보는 것이 앞이고 보는 것이 뒷면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화두처럼 던져주는 것이죠. 그리고 주로 제 작품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평면, 반반한 평면하고 표현이 된 입체하고 둘을 섞어서 입체가 평면이 되고 평면이 입체가 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바로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양창욱 : 제가 인터뷰를 계속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스님과 말씀을 나누는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은 큰 스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김영원 : 하다 보니까 성숙이 따로 어디 있겠습니까.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불상

▷양창욱 : 맞습니다. 너무 감동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런 불교적 세계관이 작품에 많이 구현이 됐는데. 강화도 무설전 신축작업, 이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되나요?

▶김영원 : 예, 강화도 무설전 그것은 조성을 할 때 거기 회주 스님이 친한 화가한테 이것을 좀 현대적으로 꾸며보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함께하자, 팀을 짜서 새로운 법당을 하나 만들자. 기존에 법당에는 너무 어떻게 보면 침체되어 있고 그리고 젊은 애들하고 소통도 안 된다, 새로운 세대들이 누런 금부처에다가 탱화 이런 것들이 거리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한 번 새롭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보자. 이것에 서로 뜻이 맞아서 그래서 저는 불상을 만들고 그 친구는 탱화를 그리고. 그리고 또 한 분은 홍대의 디자인과 교수인데, 그 분은 디자인을 하고. 등이라든지 모든. 그래서 무설전을 만들었죠. 

▷양창욱 : 거기에 눈에 가장 띠는 것이 하얀 색의 불상.

▶김영원 : 그래서 거기에 본존상하고 협시불하고 천불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스님들은 대체적으로 원래 있는 양식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저는 그렇게 해가지고는 새롭다는, 그리고 여지껏 해온 틀을 깰 수는 없다, 무언가 새로워야 된다, 조금이라도. 그래서 부처님마다 등신으로, 한 7.5등신 이렇게 비율을 맞추고, 실제 인간들처럼 그리고 각 부처님의 성격에 따라서 어떤 부처님은 아이돌 남자가수처럼, 또 어떤 부처님은 아이돌 여자가수처럼 S라인도 나오고 좀 시각적으로 무언가 예쁘고 매력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본존불도 무언가 우람한 남성다운 맛이 있어야 된다. 대웅이라는 것은 큰 수컷이다. 대웅이란 것은 그런 것 아닙니까? 수컷 웅자거든요? 큰 남자다. 남자다운 무엇이 있어야 보살님도 와서 면이 서니까 절도 하고. 머리는 크고 어깨는 올라가고 꾀죄죄한 불상이 있어가지고는 거기서 무슨 매력이 있겠느냐. 두 번 찾아올 것도 한 번도 안 찾아온다. 그래서 제가 조금 부처님한테는 좀 경솔한 발상이지만 그래서 그것을 만들었죠.

▷양창욱 : 그렇군요.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이 질문을 꼭 해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 여러 가지 주옥같은 작품들을 쭉 만들어 오시면서 또 저희들이 기억할만한 작품도 수없이 많은데,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조각하셨어요. 그런데 서울시가 최근에 광화문 광장 재조성 사업 계획안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이 세종대왕상을 이전한다는 이야기들이 그 안에 담겨서 여러 가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세종대왕상을 직접 조각하신 분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원 작가가 제작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김영원 : 사실은 세종대왕 동상은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20여 개의 조각 그룹이 있어요. 거기서 다섯 명씩 추천을 받고 두 명씩 추천을 받아서 53명이 추천 작가로서 경합을 했어요. 그래서 1차 심사에서 다 걸러내고 5명을 선정해서 이 분들한테 모형하고 보드를 제출해가지고 2차 심사를 했습니다. 그때 모형은 10분의 1크기의 모형, 이래서 경합을 시켰는데 저는 그 5명 중에 제가 포함이 됐으니까 한 보름 정도는 광화문 가서 살았어요. 그때는 광화문 광장 조성한다고 펜스를 쳐가지고 막아놓고 세종문화회관 계단 위에서 봐야 그 안이 보입니다.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한 보름 동안 엄청나게 고민을 한 겁니다. 크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세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방향은 어떻게 설정해야 되는가. 이런 것을 엄청 고민을 한 것이죠. 제가 그때 컨셉을 잡은 것이 북악산, 청와대 뒷산 북악산과 경복궁과 광화문, 그리고 숭례문이 있잖아요? 그것을 세종대왕께서 1447년에 개축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축을 딱 한 선으로 그어서 그 역사적인 축 위에 딱 모셨습니다. 그래야 정통성이 있고 역사성이 있는데. 모든 국민이 다 인정하고 25명의 자문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다 모여서 그 사람들이 수없이 같이 토론하고 논의해가지고 이루어진 겁니다. 그리고도 문화관광부에서 영정심의위원들이 그것을 아주 심도있게 심의해서 모든 것은 다 합격이다, 이 이상 좋을 수 없다, 이래서 만들어진 것인데. 

▷양창욱 : 지금은 서울시가 저작권을 갖고 있나요?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한다는 것인가요?

▶김영원 : 그렇게 하면 도덕성에 의심을 받죠. 무엇이냐면 내가 세종대왕 동상을 모셔놓고 나니까 만들 때도 내가 살 떨리게, 황송하고, 나 같이 이런 무지렁이가 이런 성군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럽고 그런데다가, 그때 내 동상 컨셉이 무엇이냐면 애민정신의 구현이에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자. 그래서 만백성을 하나로 끌어안는, 넓은 품에 끌어안는 그런 자세거든요? 그리고 가장 인자하고 자상한 그러면서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그런 동상을 하려 하는데 이것이 안 잡히는 거죠. 그래서 밤잠도 못 자고 자다가 헛소리도 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러한 상을 만들어놓고 세종대왕님의 동상을 저작권을 받아서 내가 돈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서울시에 자진해서 반납하겠소. 그 당시에 세종대왕 동상을 처음 조성해놓으니까 각처에서 저작권 문제로 전화가 계속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고 서울시에다가 조건을 걸죠. 가난한 사람,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을 찾아서 이 저작권료를 받으면 그것이 얼마든 나눠드리세요. 그래서 내가 저작권을 넘겼거든요? 그것을 이제 와서 이전의 수단으로 쓴다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양창욱 :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 분들께서 충분히 선생님의 마음과 뜻을 공감하실 겁니다. 아직 결정난 것은 아니니까요.

▶김영원 : 정 그렇게 우긴다면 나는 저작권을 환수하겠다. 소송 걸어서라도. 이것은 아니지 않느냐.

▷양창욱 : 알겠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 말씀을 들어야 되는데 어느덧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서 오늘 말씀은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인체 내면을 형상화하는 사실주의 조각가로 우리 조각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신 분입니다. 김영원 조각가 선생님과 오늘 뉴스와 사람들 진행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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