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뉴스와 사람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BBS 뉴스와 사람들 이번 시간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와 함께 합니다. 
1978년 문화방송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한 정동영 대표는 이후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며 소신 있는 보도로 '간판 앵커' 반열에 올랐습니다.
1996년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5대 총선에 전주시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낼 당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과 함께 일했는데, 20대 국회에서 나란히 여야 대표를 맡으면서 다시 만나 화제를 모았습니다. 

□출연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진행 : 강동훈 방송본부장
□방송 : 2019.2.4(월)

[인터뷰 내용]


△강동훈 : <BBS 뉴스와 사람들> 정동영 대표님 모시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날 첫 날인데, 대표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한 번 듣고 싶어요. 어린 시절에 굉장히 힘들었다고 하는데. 제가 들었던 정동영 대표님이 그렇게 힘든 일을 겼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형제가 어떻게 됩니까?

▲정동영 : 저는 유복하게 소년시절은 자랐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청년시절을 좀 고달프게 살았죠. 산골에서 회문산이라고 있어요. 전라북도 순창군. 고추장으로 유명하잖아요? 거기서 저희 어머님이 아들만 아홉 명을 낳았어요.

△강동훈 : 요즘 같으면 최고의 국가 애국자이신데.

▲정동영 : 딸을 한 명도 못 낳으셨는데. 제가 다섯 번 째 아들인데요, 제가 태어난 날이 공교롭게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휴전협정일.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휴전협정이 사인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나가야되겠다,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어요.

△강동훈 : 뱃속에서 듣고 나오셨군요. 

▲정동영 : 나와서 보니까 위의 형 넷이 다 없었어요. 제가 장남이에요. 그러니까 어쨌든 좌가 우를, 우가 좌를 서로 죽고 죽이는 그런 비극의 시간에, 비극의 계절에 저희 집도 아픈 역사가 있는 거죠.

△강동훈 : 태어날 때부터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그런 아픔이 있네요. 그러면 그때 마을 사람들이, 우리도 보면 여순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보면 제삿날이 같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정동영 : 저희 선친께서는 우익이셨어요. 대한청년단 활동도 하시고. 그래서 6.25가 났을 때 면장을 하셨어요. 25살엔가 면장을 하셨다가 그러다 보니까 아까 말했듯이 좌가 우를, 우가 좌를 모는 그런 비극적인 현장이 회문산이라는 산 밑의 마을인데, 회문산이 그 지역의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데에요. 전라북도 도당사령부. 남로당. 남부군이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다큐멘터리, 그 배경이 된 지역이죠.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어떤 동네 아이들은 아버지가 아무도 없어, 집에 놀러 가면. 엄마만 있는 거죠. 이상하다, 왜 이 동네 아이들은 아버지가 없지? 몰랐어요. 이제 철 들고 나서 비극의 땅이구나.

△강동훈 : 제주 4.3사건, 여순, 소위 말하는 그런 사건도 보면 다 그런 것이 있더라고요?

▲정동영 : 곳곳에 피 어린 이야기가 많습니다.

△강동훈 :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말을 못하고 지낸 그런 아픔의 역사.

▲정동영 : 이념이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간의 생명은 우주와 같잖아요? 그 우주를 그렇게 많이 파괴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증오와 적대의 세월을 걷어내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어야 되는 거죠.

△강동훈 : 그래서 오늘 같은 설날이 되면 세배를 어른들한테 올리잖아요? 추석은 조상님들께 오곡백과를 잘했습니다, 하고 올리는 것이고 설날은 어르신들한테, 주변 이웃분들한테 세배를 하는데. 대한민국의 이런 풍습은 아마 세계에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동영 : 예, 말하자면 공동체,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왔어요. 우리 조상들은요. 지난 세대에 많이 파괴되고, 이제 아파트에 살면 옆집에 누가,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전부 칸막이가 된 삶인데 다시 공동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공동체 복원의 단서가 명절 문화에요. 설날, 추석, 또 가족들 제사 모임이라든지 생일 모임이라든지 이런 가족 단위에서 점점 이웃 간의 공동체 회복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강동훈 : 설날 때 세뱃돈도 많이 주셔보셨어요? 받아보기도 하고?

▲정동영 : 집안 조카들도 많고 하니까 세뱃돈 준비해야죠.

△강동훈 : 어머니께서 정동영 대표님을 키울 때 정말 주변 경제환경이 썩 녹록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 자리까지 키웠을까요?

▲정동영 : 교육의 사다리 덕이었어요. 저는 산골에서 자랐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저희 부모님이 저를 유학을 보내신 거예요. 전주로. 그래서 전주에서 초등학교 나왔고 거기서 중학교 다녔고. 전주초등, 전주북중, 그 다음에 전주고등, 그리고 서울로 대학을 온 거니까 교육의 사다리가 그때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그 교육의 사다리가 많이 무너졌죠. 그 점에서 지금 국가 개혁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이 돈 없는 사람도, 부모가 힘이 없어도 자신의 능력과 꿈이 있으면 그 교육의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이것을 복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동훈 : 사실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 이런 말도 많이 했고 한 명만 키우면 집안이 대성한다, 이런 말도 했는데. 그런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지만 첫째 역할을 하고, 동생 분들도?

▲정동영 : 다 나름대로 자기 길을 갔죠.

△강동훈 : 그때 제가 듣기로는 어머니께서 아동복도 팔고 여러 가지 해서 모든 식구들을 다 대성시켰다고 하던데?

▲정동영 : 제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대학에 왔는데, 제가 유신 학번이에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선포해서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회수한 거죠. 그날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반열로 추락했구나. 청년의 피가 끓는 거잖아요?

△강동훈 : 그때 서울대학교 사학과 다니셨나요?

▲정동영 : 예, 그래서 최초로 대학교 2학년 때 유신독재철폐를 외치는 데모를 하다가 마포경찰서에서, 바로 앞이네요, 한 달 유치장에서 살기도 했고. 3학년 때는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동대문 경찰서 거쳐서 서대문 형무소 몇 달 고생했죠. 그리고 나서 강제징집. 청년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어둠의 터널, 자유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강동훈 : 그런데 그런 소위 말하는 어둠의 시대와 나름대로 학교 다닐 때 빨간색도 있었던 적이 있을 텐데, 어떻게 MBC 기자를?

▲정동영 : 글쎄요. 그러니까 취직하는 데는 그렇게 어떻게 보면 포용적이었다고 할까요? 집안 이야기하다가. 제가 대학을 갔는데 그 동네에서 아들이 툭 하면 유치장에 들어가 있고 툭 하면 어디 구치소에 들어가 있고 하니까 아들 버린다고 빨리 서울로 가시라고 해서 저희 어머니가 집 팔고 논 팔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한양대 뒷 비탈에 사근동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동네 분들이 아동복을 만들어서, 바지, 치마 이런 것을 만들어서 평화시장에 납품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그거 했었어요. 한 10년 쯤 했죠.

△강동훈 : 직접 가서 도와드리고?

▲정동영 : 어머니가 하루는 새벽에, 저는 친구들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데 새벽 5시쯤 되면 나가세요. 밤새 만들었던 옷 보따리 들고 77번 시내버스를 사근동에서 타면 동대문운동장에 내려서 평화시장에 가시는데. 하루는 그냥 아침에 들어오셨어요. 보니까 다리를 절뚝거리시면서. 그때는 버스에 차장이 있었어요. 보따리 들고 타는데 새벽부터 보따리를 들고 타냐고 밀쳤나 봐요. 길바닥에 나동그라지셨어요. 다리를 다쳐서 들어오셨는데 정말 죄스러웠습니다. 멀쩡한 아들 녀석은 누워 자고 나이 드신 어머니가 보따리 들고 시장에 다니셨다는 것이 너무 죄책감이 들어서 그 다음날부터 어머니, 제가 할게요, 해서 시장 배달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아동복 봉제 일을 했었죠. 그래서 지금도 평화시장에 가면 저 알아보는 분이 꽤 있어요.

△강동훈 : 그 당시 계셨던 분들이?

▲정동영 : 지금도 장사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평화시장, 동평화시장, 통일상가 이런데 가면. 제가 오후에 수금을 가요. 물건을 가져다 놨으니까 수금을 해야 되는데 장사가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니까 수금이 안 되면 어디 기다려야 되는데 기다릴 데가 마땅치 않아요. 통로는 사람 둘 지나다니기도 힘든데. 그러면 2층 올라가는 철계단이 있어요. 그 계단에 쪼그려 앉아서 시간 보내려니까 문고본 같은 것 가져와서 책 읽고. 그걸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정 의원이 학생 때 저 계단에 앉아서 맨날 책 읽고 그랬어.

△강동훈 : 그분들 보면 참 어머니와 같이 생각하는 분들인데.

▲정동영 : 그럼요. 찡하죠. 저는 그래서 얼마 전에도 청계천 공구상가, 지금 거기 난리에요. 무엇이냐면 전부 재개발 정비한다고 철거하는데. 사실은 거기는 정말 100년 가게 특별법이 필요한 데거든요? 

△강동훈 : 추억도 많고 정말 서울시민들과의.

▲정동영 : 10년, 20년 장사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4~50년, 60년, 70년 이렇게 된 분들이에요. 거기서 정말 이 세상에 있는 물건은 다 깎아내고 만든 동네거든요? 거기에 장인들, 직인들, 상인들, 젊은 예술가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데 그것을 싹 밀어버리고 고층 주상복합빌딩 짓는다는 것은 그것은 박원순 시장 철학에도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상인 분들, 장인 분들하고 만나서 100년 가게 특별법 운동을 합시다, 해서 그저께 운동본부도 같이 출범시키고 했습니다.

△강동훈 : 많은 분들이 나가시고 겨우 얼마 안 남았죠?

▲정동영 : 말하자면 땅 주인, 건물 주인의 권리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땅에서 땀 흘리면서 그 지역의 가치를 일군 세든 사람들의 권리도 보호되어야 한다. 무조건 땅 주인의 권리만 최고고 무조건 쫓아내서 밀어버리는 그런 개발, 그런 폭력적 개발 방식은 이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강동훈 : 사실 정동영 대표님하고 그런 인연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더 소중한 느낌을 받겠네요.

▲정동영 : 청계천에 한 5만 명 돼요. 세운상가. 거기를 제조산업, 제조문화 산업특구로 해서 충분히 그것은 보존할 가치가 있어요. 관광자원도 될 수 있고. 서울을 치매도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역사가 없다. 안 보인다. 600년 됐다고 하는데 100년 전 역사가 어디 있고 200년 전 역사가 어디 있느냐. 불과 몇십 년 전 것도 전부 다 밀어버리고 쓸어버리는데.

△강동훈 : 정동영 대표님을 우리가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분도 많이 있지만, 1부에서 제가 말씀드렸지만 또 방송기자, 앵커 정동영 이랬는데. 사실 제가 그때 기억하는 것이, 그때 저도 현장에 가 있었는데, 삼풍 백화점 시절에 어떻게 원고 없이 몇 시간 동안을 방송을 생방을 연결하는지 굉장히.

▲정동영 : 많은 분들이 삼풍 이야기를 해요.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때는 전국부장이었는데 보도국장이 자네가 현장에 가보라고 해서 부랴부랴 밤 9시에 임박해서 갔는데. 거기서 철야로 몇 시간 방송을 했죠. 정말 저는 시멘트 잔해 더미에 깔려있는 그 안의 생명들, 살아있는 사람들의 심정으로 방송을 했습니다. 저 분들 한 분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이 시청자들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아요. 보도기자로보다는 보는 사람들이 다 얼마나 충격도 받고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강동훈 : 그러면 그때의 그 육성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그 당시 현장에 앵커하실 때의 생생한 목소리인데, 오랜만에 들으시죠?

▲정동영 : 예, 아주 세월이 화살 같습니다. 정치를 안 하고 방송을 계속 했더라면 욕먹을 일도 별로 없었을 텐데.

△강동훈 : 그때 방송기자로 날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독일 현장에서, 어떤 때는 이라크 전장에서 바바리 코트 입고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갑자기 정치에 입문했는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정동영 : 삼풍 백화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아,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그 직후에요. 삼풍 직후에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이 있어서 고민을 한 거죠. 다른 것보다도 저는 MBC 노조 창립멤버입니다. 40여 명의 후배들과 함께 1987년 12월 12일인가요. 그때 MBC 기자노조를 만드는데요. 그때 방송이라는 것은 제도권으로서 청와대의 간섭이 너무 심했어요.

△강동훈 : MBC 공채 몇 기죠?

▲정동영 : 제가 13기입니다. 그래서 언론으로서 기자로서 제대로 자유언론을 구가하려면 정권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서 김대중 총재의 제안에 응했던 거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서 천정배, 추미애, 김한길, 정동채 이런 젊은 피 수혈, 3~40명의 전문가 그룹들이 들어갔습니다.

△강동훈 : 그 이후로 후배들, 동료들, 박영선 의원이라든지 이런 분들도 정가에 입문하는 하나의 디딤돌도 됐던 것 같은데.

▲정동영 : 제가 아는 분들이 방송에 있어서 당 의장하고 하면서 영입도 하고 그랬죠.

△강동훈 : 막차 탄 분이 신경민, 같은 앵커인데 그 분이 동기이신가요?

▲정동영 : 학교는 고등학교 동기생인데 MBC는 제가 먼저 들어왔고요. 엄기영 앵커도 제가 불러오려고 했는데 제가 부를 때는 안 왔고 나중에 참여는 했지만.

△강동훈 : 조금 전에 말씀하셨지만 방송인 정동영으로 남았다면 정치인으로, 또 대통령 후보도 하셨지만 어찌됐든 여러 가지 굴곡이 있었단 말이에요? 왜 편한 길을 놔두고, 아까 말씀하셨지만. 방송인, 정치인 둘 중에 하나를 한다면 지금 생각할 때 어느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정동영 : 정치를 하는 것보다 방송을 했으면 조금 더 행복했겠죠. 개인적으로는 소소한 행복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마 제 핏속에 아버지께서 지방 정치인이셨어요. 그 시절에 도의원도 하시고 국회의원 출마 준비도 하시고 그러다가 마흔여덟엔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의 피가 좀 있었다고 보죠.

△강동훈 : 저희가 보면 정동영 대표님은 항상 무언가 개혁을 하려는, 저희가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보면 말이죠, 정동영 대표님은 멘트라든지 아까도 잠깐 육성을 들었지만 진보성, 개혁적 멘트가 많이 들어가있어요. 목소리에 보면 유지가 아닌.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텐데. 선거 관련법 개정이라든지를 할 때 어떤 면을 개혁을 해야 우리나라가 바르게 살까?

▲정동영 : 저는 정치의 출발점은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신영달을 하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사업을 한다든지 다른 일을 하는게 낫죠. 정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를 추구하는 것이죠.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정치가 정말 굽은 것을 펴고, 그 다음에 그늘진 곳을 비추고 그런 역할을 하게 되면 훨씬 그 공동체가 사람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것이고. 정치가 아귀다툼같이 투쟁 일변도로 되게 되면 그 구성원들이 행복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거죠. 저는 그래서 국민의 삶은 곧 정치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동훈 : 좀 아픈 이야기 같습니다만 어쨌든 민주평화당이 여러 생각들로 해서 나와서 만들었는데, 지지율이 조금 안 나와요. 그래서 이런 당과 바른미래당이 있지 않습니까? 통합의 문도 열어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호남에서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민주평화당이 왜 이렇게 지지율이 낮을까,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보십니까?

▲정동영 : 역시 거대정당, 거대양당제도가 70년 온 제도에요. 하나의 문화죠. 그러나 국민들이 양당제의 폐해를 느끼거든요? 다당제에 대한 지지가 월등히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는 있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는 길을. 그래서 제가 당 대표가 되고 나서 지금 7달째인데요. 하나는 정치를 바꿔야 되겠다.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해서 그 불씨를 살려냈고, 또 하나가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는 그런 법을 좀 만들어야겠다, 100년 가게 특별법운동을 벌이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쫓겨나지 않을 권리에요. 이것은 일본이 100년 전에 도입한 법제에요. 차지법, 차가법이라고. 우리 교과서에 보면 물산장려운동이라고, 일제 강점기 때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이 선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의 내용을 보게 되면 부당한 임대료에 대한 저항 운동이에요. 일본 내에서 실시하고 있는 차지법, 차가법, 세든 사람을 일방적으로 쫓아낼 수 없는 법을 왜 조선에서는 실시하지 않느냐. 평양이나 서울에서도 건물주는 다 일본사람이에요. 세든 사람은 조선사람이에요.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 이런 운동이거든요? 그런데 100년 뒤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궁중족발사건 아시잖아요? 임대료를 100만 원 200만 원 받던 것을 1,000만 원, 2,000만 원 내라고 하니까 그런 불행한 사건이 났는데요. 어느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어요. 청계천에 있는 공구상가들은 몇십 년씩 됐기 때문에 상가임대차보호법을 5년에서 10년으로 보호 기간을 갱신해도 해당이 없어요. 몇십 년째 장사하고 있는데도 집주인이 재개발해야 되겠다, 나가라. 구제수단이 없는 거죠. 저는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정글이 아니잖아요? 그만큼 땀흘려서 가꾸어온 가게 주인들의 권리도 보호해줘야 된다, 그것이고. 또 하나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행복해지려면 불평등이 줄어야 하는데 불평들이 줄기 위해서는 소득 불평등과 함께 자산 불평등, 땅, 집, 부동산 불평등 이것이 불평등의 7할이에요. 3할은 소득 불평등이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집값, 땅값이 정상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정책의 실패에요. 정책이 일부러 조장해왔어요. 저는 이것을 잡기 위해서 분양원가 공개해라.

△강동훈 :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정동영 : 그런데 올해 1월 1일부터 시행이 됐습니다. 제가 법안 냈고 여러 가지 압박과, 법안을 핑계대고 안 하는 거예요. 법안이 자유한국당 반대해서 묶여있었고. 그러면 법안 철회하겠다, 해서 제가 법안을 냈다가 철회했다가 결국 국토교통부가 1월 1일부터 공공부문에서 61개 항목에 대해서 분양원가를 공개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거품을 잡는 효과가 있습니다. 평당 400만 원, 450만 원이면 집 지을 수 있는데 지방까지 다 1,000만 원씩 분양가 받잖아요? 이 거품,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20년 전에도 자가 보유률이 60%입니다. 10년 전에도 60%입니다. 2019년에도 60%에요. 자가 보유률이 늘지 않습니다. 주택 보급률은 지금 106%, 100%가 넘어요. 그런데 한 채 갖는 사람이 세 채, 세 채 가진 사람이 여섯 채, 여섯 채 가진 사람이 열 채, 이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첫째, 선거제도를 개혁해서 정치를 바꿔야되겠다. 두 번째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장사하는 분들에게 드려야 되겠다. 그리고 자산 불평등, 거품을 잡아야되겠다. 이 세 가지가 민주평화당이 밀고 오고 있는 실천적 노력이고 가치인데요. 이것을 인정해주시는 날 지지율도 올라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강동훈 : 첫 번째야 다당 구조에서 누가 같이 동의를 해야되겠지만 두 번째, 세 번째만큼은 정말 민주평화당의 정책이라 생각한다면 많은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동영 : 그래서 얼마 전에도 100년 가게 특별법 제정 정책협약, 청계천에 있는 장인들하고 그런 협약식도 하고 했습니다.

△강동훈 : 이제 설날인데 사모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정치인 정동영 대표님을 옆에서 같이 함께하는 정치적 동지인 사모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동영 : 제가 많이 미안하죠. 왜냐하면 아내는 전주 지역구에 살고 저는 여의도에 살아요. 그러니까 주말에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에는 지역에 갑니다. 집사람은 사실 정치의 ㅈ자도 관심도 없고 몰랐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침부터 밤까지 행사 저 대신 쫓아다니고 선거와 정치 바닥에서 생활하게 되니까 좀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죠.

△강동훈 :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저희가 전주 지역, 순창 고추장으로 유명한 정동영 대표님 태어난 곳 그 지역의 대표성, 학교를 다녔던 전주에 저희 전주 불교방송을 세우려고 합니다. 정부와 주파수 문제, 나머지 부분은 다 되어 있는데, 전주 BBS 많은 만공회 회원들이 있거든요? 월 1만 원 이상씩 BBS를 사랑하는 그런 분들이 후원금을 낸 데가 만공회입니다. 전주도 많이 있는데. 전주 BBS가 잘 설립될 수 있도록 거기 출신이니까 많이 도와주기를 바라는데, 그런 부분 권선 한 번 해주시죠.

▲정동영 : 예,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특히 전북은 월주스님의 공덕이 큰 곳이고 금산사가 대찰이고 교구본사가 선운사도 있고.

△강동훈 : 이번에 금산사 주지스님 출신인 원행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이십니다.

▲정동영 : 원행스님이 금산사에 계셨죠. 그래서 불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방송은 전북방송이 있죠. 그래서 불교방송이 전북에 포교방송뿐만 아니라 지역의 교양과 교육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동훈 : 전주 지역에 있는 분들은 사실은 정동영 대표님을 과거에 제가 현장에서 취재할 때 보면 호남의 그 다음 세대로 생각하고 많은 분들이 밀어주셨고 지지해주셨고, 그 마음은 계속 있을 거라 봅니다. 그래서 전주 지역, 특히 모악산을 중심으로 한 기가 꼭 다시 한 번 일어나시기를 기원해보겠습니다.

▲정동영 : 감사합니다. 불교방송에서 이런 좋은 설날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또 불자 여러분,청취자 여러분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 누리시기를 빕니다.

△강동훈 : 긴 시간 나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동영 :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동훈 : 설 특집으로 보낸 <BBS 뉴스와 사람들> 어제와 오늘 이틀동안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를 모시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